쇼핑은 허구다... 가짜 안도와 가짜 유대
# 지난해 한 관찰 예능 프로그램에 박세리 감독 집에 설치된 거대한 팬트리가 등장해 시청자와 패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편의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방대함이란. 이에 감동한(?) 많은 시청자들이 팬트리를 구입해 비슷하게 활용했단다.
무언가를 ‘쟁여놓는’ 소비는 우리의 일상에 만연해있다. 코스트코, 이마트 트레이더스, 롯데마트 빅마켓 등의 창고형 할인매장은 평일 저녁이나 주말이면 인산인해를 이룬다. 집에 돌아와 기본 열 개들이 포장을 여러 개 담은 거대한 물건 꾸러미를 트렁크에서 빼내면 왠지 모를 풍족함과 뿌듯함이 느껴지곤 한다. 가구계의 ‘패스트 패션’으로 불리는 이케아의 성공 역시 우리의 소비 트렌드를 반영해준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청승맞은 고가구 대신 산뜻한 컬러의 저렴한 가구를 사서 싫증 나면 빠르게 교체하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쇼퍼홀릭… 충동, 갈망, 중독 그 어딘가 쯤에?
언제부터인가 쇼핑이 점점 쉬워지고 있다. 예전에는 소파 하나 바꾸려고 해도 가족들이 회의(?)를 열어 최소 몇 주 이상 고민했던 거 같은데 요즘은 충동에 이끌려 쉽게 지갑이 열릴 때가 많은 것 같다. 소비에 ‘신중’이 덜어지고 ‘충동’이 더해지면서 목적과 가치관에 부합하는 소비의 철학을 고민하기보다는 자극과 쾌락을 만족시켜줄 만한 것을 찾아 헤매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 같다. 즉, 쇼핑에 있어서도 가치와 효용을 따지기보다는 얼마나 강한 자극을 주는지가 중요해진 것이다. 하지만 강한 자극에 탐닉하는 것은 중독으로 이어질 위험이 높으며 ‘쇼핑’, ‘음식’, ‘게임’ 등의 행동중독과도 관련이 깊다.
사실 필자의 온라인 장바구니에도 나만의 소중하고 애틋한 물건들이 많이 담겨 있다. 구매 전 설렘이 대폭발 하여 장바구니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택배가 오면 박스를 황급히 뜯으며 심히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곤 한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간절히 기다렸던 '그 아이'가 진짜 내 소유가 되는 순간 황홀했던 감정이 푹 꺼지면서 공허감이 밀려온다.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정말 간절히 원하고 바라던 것을 드디어 보고, 만지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게 되었는데. 왜 내 마음은 다시 허전해지는 건지.
내가 산 게 사실 내가 원한 것이 아니다?
콜린 캠벨의 저서 ‘낭만주의 윤리와 근대 소비주의 정신’에 의하면 전통적 쾌락주의와 구분되는 근대적 쾌락주의의 요체는 일차적 관심이 감각에서 감정으로 이동한데 있다. 개인들은 제품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품과 연관된 의미에서 만들어진 자기환상적 경험으로부터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소비의 본질적 활동은 제품을 구매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의 이미지가 부여하는 '상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 소비는 물질적이면서도 지극히 정신적인 활동인 것이다.
소비가 내면의 ‘빈 곳간’을 채워줄 것이라는 환상은 우리를 점점 강박적으로 쇼핑에 몰두하게 만듦으로 갈망을 부추긴다. 마침내 원하는 것을 손에 쥔 순간 느끼는 허탈한 마음을 애써 부인하려 하지만, 이 불쾌감을 못 견뎌 또 다른 ‘마이 위시리스트’에 담을 아이들을 찾아 헤매기 일쑤다.
우리가 소비로 채우려는 것은 비단 공허감뿐만이 아니다. 속칭 ‘인싸템’을 구입해서 타인과 ‘가짜 유대감’을 만들려 할 때도 있다. ‘인싸’란 조직에 잘 어울리고 유행에서 앞서간다는 인사이더(insider)의 줄임으로, ‘인싸템’은 여기에 물건을 의미하는 아이템(item)이 합쳐진 신조어다. 패션, 전자기기, 학용품, 음식 등 다양한 영역에 인싸템이 존재한다. ‘인싸템’을 갖고 있는 자는 자연스럽게 인싸인 것처럼 트렌드의 중심에서 화려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 다른 사람들과 암묵적 연대감을 느끼며 안도하게 된다. 나와 네가 갖고 있는 ‘인싸템’이 우리를 연결해주는 고리가 될 거라는 기대다. 그렇지만 이렇게 소비로 맺은 동맹은 결코 우리의 실제적 관계를 풍요롭게 만들지 못한다.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이나 마음이 통하는 사람에게 소속감을 느끼는지, 아닌지는 내가 어떤 물건을 '소유'했느냐와는 분명 다른 문제일 것이다.
상상적 쾌락 아닌 풍성한 경험 위한 소비로
그렇다면 ‘가짜 안도감’이나 ‘가짜 유대감’이 아닌 진정한 풍요로움을 위해서는 ‘무엇에’, ‘어떻게’ 돈을 쓰는 게 좋을까. 누군가에게 보여주거나 나의 상상적인 쾌락을 자극시키는 행위가 아닌 건강한 경험을 만들어주는 활동에 돈을 쓰는 것이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욕구에 귀 기울이며 풍요로운 경험을 만들기 위한 소비에는 신중함이 뒤따른다. 여기에는 무언가를 배우거나 텃밭을 가꾸거나 자신의 가치에 따라 누군가를 돕고 물질을 후원하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긍정심리학에서도 고가품보다는 경험에 돈을 투자했을 때 행복과 긍정 심리를 오래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밝혀왔다. 행복은 얼마나 갖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즐기느냐에 있다는 찰스 스퍼전의 말도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