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겁쟁이가 아니라, 완벽한 준비를 하던 중이었구나
좋게 말하면 조심성이 많고, 솔직히 말하면 겁이 참 많은 아이였다. 게다가 또래보다 체격이 컸던 아이는 자기 몸을 가누는 것이 남들보다 조금 더 버거운 모양이었다. 돌이 지나면 당연히 신발을 신고 아장아장 걸을 줄 알았건만, 아이는 장장 17개월이 되도록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세상을 구경했다.
돌 즈음 진행한 영유아 검진에서 의사 선생님은 "18개월까지는 지켜보자"고 하셨다. 한 달 뒤에도 걷지 않으면 대학병원을 가보자는 약속을 남긴 채, 나는 매일 밤 맘카페를 뒤졌다.
아무리 검색해 봐도 17개월까지 기어만 다니는 아기는 드물었다. 놀이터에서 또래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은 조급함으로 타들어 갔다.
불안해하는 내게 의사 선생님은 무심한 듯 따뜻한 위로를 건네셨다.
“어머니, 조심성 많은 아이는 걸을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완벽히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발을 떼요. 또한, 우리도 무거운 바벨을 들고 스쿼트하는 게 어렵듯이, 체격이 큰 이 작은 아이에게 자기 몸무게를 온전히 짊어지고 일어서는 건 엄청난 도전이거든요. 이 아이는 지금 자기만의 무게를 견딜 근육을 키우는 중이에요. 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안심하면서도, 하원 길 유모차에 앉아있는 아이를 볼 때면 다시 마음이 졸였다. '정말 걷기는 할까?', '어디가 불편한 건 아닐까?' 수만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던 크리스마스 이브 즈음이었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던 날, 우리는 눈이 쌓인 놀이터로 나갔다. 그날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신비로웠다. 유모차에서 내린 아이가 하얀 눈밭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듯 천천히 엉덩이를 떼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발을 내디뎠다.
비틀거림도, 넘어짐도 없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아이는 이미 수만 번 연습해 온 사람처럼 당당하고 안정적으로 눈 위를 걸어갔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대로, 아이는 자신의 몸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날 이후 아이는 넘어지는 법 없이 걷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앞질러 뛸 수 있을 만큼 단단해졌다.
그 찰나의 감동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선명한 사진처럼 남아있다. 남들보다 조금 늦었을 뿐, 아이는 결코 멈춰있던 것이 아니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쉼 없이 근육을 키우고, 무게를 견디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나는 아이의 첫 걸음마를 보며 다시 한번 배운다. 누군가의 속도가 나의 조급함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애 키우는 거 다 똑같다"는 말은 결국, 누구나 자기만의 속도로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뜻이었음을 말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기적처럼 다가온 그 걸음마 덕분에, 나는 오늘도 아이의 '조금 느릴지도 모를 오늘'을 조급함 대신 믿음으로 기다려 줄 수 있는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