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가장 명료한 것은
매일 아침이면 보이차를 마신다.
오늘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고요히 앉아 따뜻한 차를 한 모금 삼켰다.
곧 고민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을이 되니 어김없이 찾아오는 고민 — ‘대학원에 갈 것인가?’
몇 년 동안이나 머릿속을 맴도는 오래된 고민이었다.
머릿속에서 여러 계산이 오가던 그때, 문득 잊고 살았던 한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아이들도 어리고, 나도 젊어 매일이 버겁던 시절, 세상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열정 때문에 자주 흔들리던 나를 붙잡아주던 질문이었다.
'일주일 뒤에 죽는다면, 너는 오늘 무엇을 택하겠니?'
그 물음 앞에 서면 모래라도 두 손 가득 쥐어 보고 싶은 내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러면 얼마 안 가 답을 찾곤 했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자라고, 조금의 여유가 생겼을 무렵, 우연히 취직을 하며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질문을 잊고 살았는데 오늘 그 질문이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그 단어가 주는 불길함과 우울함 때문일 것이다. 죽음은 멀찌감치 밀어 두고 모두가 영원히 살 것처럼 분주하게 어디론가 달려간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생은 단 한 번뿐이고,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투명한 진실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죽음을 회피하는 것은 결국 진실에 눈을 감게 만든다. 죽음을 잊으려 애를 쓸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삶은 점점 죽어 간다.
끝을 알 수 없는 소설처럼, 방향 없이 흘러가는 나날 속에서 우리는 점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잊고 '열심히'만 살아간다.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죽음은 우리 삶을 깨우고, 방향을 제시한다.
'일주일 뒤에 내가 죽는다면?'
이 질문을 곰곰이 되뇌었다. 두 손에 반드시 남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였다.
아마 이번에도 거창할 것 하나 없는 것들만 손에 남을지도 모른다.
내 옆에 있는 사람,
미뤄왔던 말들,
그리고 한 번쯤 꼭 해보고 싶었지만 미뤄두었던 몇 가지 일들.
그렇게 소박하지만 진짜 소중한 것들만 손 위에 남아 나를 또렷이 바라보겠지.
오늘이라는 공평한 시간.
100세 시대라지만 내가 누릴 수 있는 건 오늘, 지금 이 순간일 뿐이다.
오늘을 충만하게 살고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것,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건에게 마음을 열고 에너지를 쏟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의 유일한 이유가 아닐까.
매일의 해가 뜨고, 다시 어둠이 찾아오는 반복은 단지 같은 날의 연속이 아닐 것이다.
그 속에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영혼의 성숙, 그것만이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라는 생각이 갈수록 갈수록 짙어지는 보이차처럼 진해지고 있었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걸어가는 걸음마다 놓여 있는가?
일주일 뒤에 삶이 끝나는 것이 두렵다면,
오늘을 충실히 살아내지 못했다는 말이 아닐지.
목구멍으로 따뜻한 차가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