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혜나 Aug 18. 2023

들깨는 할머니

처음 사본 들기름

 "아름아. 어떡하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십 분 전에 할머니께서 위독하니 마음에 준비를 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망연자실해서 앉아있는데 오 분 후에 할머니께서 깨어나셨다고 안심하라는 전화가 왔다. 다시 오 분 후, 온몸에 빠졌던 힘이 채 돌아오기도 전에 전화벨이 또 울렸다. 할머니가 결국 돌아가셨다고 했다.

 건강하셨던 할머니가 갑자기 허망하게 가버리셨다. 어깨 수술을 받으러 가신지도 몰랐다. 어깨가 계속 아파 힘들어하던 할머니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수술을 받겠다고 하셨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수술 후 변을 보지 못하던 할머니는 갑자기 혈액 속 칼륨 수치가 높아져서 심장마비가 왔다고 했다.      


 할머니 김치 배우고 싶었는데. 할머니 된장도 고추장도 아직 못 배웠는데.

 아빠의 장례식 이후로 누군가의 죽음에 그렇게 울어본 적 처음이었다. 할머니는 온통 너른 풀밭만 펼쳐진 것 같던 나의 인생에 유일한 비빌 언덕이었다. 내 마음에 비바람이 몰아칠 때면 잠시 피할 수 있는 작은 지붕과 같은 존재가 되어 주었던 할머니.

   

  어릴 적 할머니는 명절마다 소중히 숨겨두었던 쌈짓돈을 꺼내 오빠와 내게 다른 손주들보다 더 두둑이 용돈을 챙겨주었다. 그게 아빠 없는 손주의 마음을 명절마다 위로하던 할머니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농대생시절 방학마다 할머니댁에 가서 할머니 농사를 도왔다. 할머니가 가는 밭을 따랐다니며 일을 하면 할머니는 내가 고생하는 게 신경 쓰여 일도 제대로 못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더 할머니를 따라 밭에 가곤 했다. 뙤약볕 아래에 일 그만하고 일찍 들어가셨으면 해서.     

“할머니. 땅 팔지 마셔. 내가 졸업하고 농사지으러 올 테니까.”     

 두어 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했던 말을 할머니는 두고두고 기억했다. 삼촌들에게 “아림이가 땅 팔지 말고 두라고 했는데 시집을 홀렁 가버렸다.”며 여러 번 서운한 내색을 하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나의 이른 결혼을 안타까워했다. 첫째가 생겼다고 전화했을 때 화를 내시던 할머니. 그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된다.

 "우리 아림아."     

 할머니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손녀에게도 언제나 이름 앞에 '우리'라는 말을 넣어 불러주었다. 아이를 낳은 후 어느 곳을 가던 아이가 주인공이 되었는데 할머니는 늘 내 새끼들보다 나를 먼저 보았다. 아이들이 내게 붙어 치근덕거리면 "아이고. 엄마 힘든데 저리 가서 좀 놀아." 하며 한 마디씩 하시곤 했다.


 아빠를 많이 닮은 나를 가만히 바라볼 때, 그 눈빛이 떠나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눈빛이라는 것을 알아서 애써 딴소리를 하기도 했다. 조용히 한번 안아드렸다면 좋았을걸. 이제야 그런 생각을 한다.    

         

 들판에 들깨가 한창이다. 들깨를 보니 할머니가 부쩍 생각난다. 할머니는 매년 들기름을 짜서 2리터 소주병에 담아 주셨다. 그 정도 양이면 1년은 넉넉했다. 어느 날은 너무 많아서 주변이랑 나눠 먹기도 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들기름을 샀다. 300ml 작은 병이 삼만 원이 넘었다. 할머니는 자식들 모두에게 들기름 한 병씩 짜서 보내려고 얼마나 많은 깨를 심었을까? 그 깨를 심고 거두는 수고가 할머니의 육체를 상하게 했지만 할머니의 마음에는 위로가 되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 노동이 굴곡진 할머니 삶에 위로가 되었기를. 뒤늦게서야 그런 소망을 가져본다.         


시골길, 발길 닿는 곳마다 보이는 들깨가 할머니 같아서 산책길을 걷는 걸음이 자꾸 늦어진다. 여름밤의 습하고 무거운 공기처럼 마음이 자꾸 축축하게 내려앉는다.


내년엔 작은 밭을 구해 우리 먹을 들깨를 좀 심어 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로컬리를 지키는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