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데리고 제주 보름살이를 왔다.
낮에는 숙소에 있고 늦은 오후가 되면 바다에 수영하러 나가는 것이 대부분의 일과이다. 날씨도 덥고 예전에 제주에 살며 가볼 만한 곳은 웬만큼 다 가본 터다. 아무런 일정이 없이 세 아이와 24시간을 꼭 붙어있다가 보니 글을 쓸 여유는 감히 생각할 수가 없는 나날이다.
그나마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 합류하는 주말뿐이다.
토요일, 남편과 아이 셋을 묶어 컴퓨터박물관에 보내고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써 두었던 초고가 있어서 퇴고해야 했다. 허락된 시간은 두 시간 남짓.
30분 정도는 음료와 케이크를 주문하고 컴퓨터를 켜고 한글을 열고 모니터 속의 글자에 집중하기 위한 예열 시간으로 썼다. 그 뒤 30분은 어떤 글을 퇴고할 것인지 이것저것 뒤적이고 슬쩍슬쩍 건드리는 일을 했다. 그리고 겨우 몰입해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시간 정도 지났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 우리 다 끝났어. 주차장에 와 있어."
잔뜩 몰입 중이었는데 노트북을 덮어야 했다. 퇴고하는 동안 나는 글 속에 담긴 감정을 온몸에 들이붓고 있었다. 아팠던 시간에 대한 글을 퇴고하고 있던 터라 지금 상태 이대로라면 내게서 슬픔의 냄새가 잔뜩 날 것 같았다. 감정에 흠뻑 젖은 몸과 마음을 다시 두 시간 전으로 빠르게 되돌려야 했다. 어떤 일상에도 특별히 설레이거나 크게 낙심하지 않는, 일상을 무난히 살아내는 15년 차 주부의 그 상태로.
노트북을 덮고 일부러 화장실을 갔다. 소변을 보고 손을 씻는 행동을 하며 나를 되돌리려고 노력했다. 내 몸은 그 일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해내고 있었다. 동시에 내 안에 창작자는 화가 나서 눈을 흘기고 있었다. 나의 보통의 자아는 그런 갈등을 태연히 모른 척했다.
태풍 전야의 제주에서 성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아이들과 함께 왔다. 각자 가져온 책을 읽기로 했다. 내 앞자리는 8살 막내 차지다. 녀석은 마주 보고 앉아 본인이 가져온 책을 읽는다. 조용히 읽는 건 당연히 아니고 제 책을 읽으며 10초에 한 번씩 엄마를 부른다.
"엄마 이것 봐. 너무 웃기지. 큭큭큭."
"엄마, 이 얼굴 좀 봐. 킥킥킥."
"엄마, 이게 무슨 말이야?"
10초에 한 번씩 아이와 시선을 맞추고 대답해 주다 보면 내 책의 한 문단을 넘어가기가 어렵다. 한 문장이라도 제대로 읽고 싶은 엄마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내뱉는다.
"엄마 그만 부르기!"
아이의 표정이 이내 시무룩해진다. 덕분에 잠시 집중해서 문장을 읽는다.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 이번 여행을 함께하고 있는 책이다. 정말 찰떡같은 제목이 아닐 수가 없다.
5분이나 지났을까. 아이는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다시 엄마를 부르기 시작한다.
"엄마 여기 봐봐. 얘 표정이 너무 웃기지. 큭큭큭."
참. 귀엽다.
귀엽다는 말속에 엄청나게 많은 오묘한 감정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엄마가 되고 나서 알게 되었다. 귀여워야지 어쩔 수 있나. 나는 다시 아이와 눈을 맞추고 웃어준다.
아이들의 방학. 함께 떠난 여행. 책을 읽기도, 글을 쓰기도 쉽지 않은 현실을 적당히 수긍하기로 마음먹는다. 평화를 위한 타협을 하는 대신 다짐을 한다.
'돌아가선 내 시간을 어떻게든 더 악착같이 만들어 보리라! 살림 같은 건 인생의 중요 순위의 저 아래쯤으로 강등시켜 버리리라! 지저분한 집 따위는 사뿐히 무시해 주리라!'
엄마가 원하는 카페 독서를 했으니, 이제 다음 코스로는 아이가 원하는 블록방을 가야 한다. 아이는 연신 내게 '땡큐!'를 날리고 있다. 내 안에 창작자는 읽을 시간도, 쓸 시간도 충분히 내지 못하는 내게 '뻐큐!'를 날리겠지.
땡큐와 뻐큐.
둘 다 기꺼이 감당하는 오늘의 나는 최강의 무언가가 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