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고물상 안에 있는 한 컨테이너에서 세콤(secom)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다. 제대로 된 집도 아닌 작은 컨테이너에서 살고 있는 아이는, 새벽마다 몰래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문 앞에 걸터앉아 사이렌에 묻혀 들리지도 않는 울음을 서럽게 터트렸다.
https://blog.naver.com/dnrhannong 사진출처
아이를 홀로 키운 아버지는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잘생기고 재치도 있으며, 강단도 있는 그는 어디에 가도 사람들의 중심에 있었다. 그래서 바빴다.
그런 아버지 밑에 짐덩이처럼 남겨진 아이는 늘 사랑이 필요했다. 아빠가 나와 시간을 보내지 않는 건 그만큼 자신이 매력 있는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빠의 관심을 가져가는 여자들은 모두 들꽃같이 예뻤고 아빠를 웃게 할 수 있었다.
아이는 아빠에게 사랑받을 수 없는 자신을 원망했다.
.
.
.
혼자가 된다는 것.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며 울고 있는 어린시절의 기분이 또 나를 찾아올까 두려웠다. 어른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를 지났음에도 내 한부분이 여전히 아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누군가가 곁을 떠나는 상황이 오면 기억 속 사이렌이 울리며 모든 이성적 판단을 할 수없는 지경이었다.
'난 이 사람 없이는 살아갈 수 없어'
어린 내게 당연히 주어졌어야 할 '함께하는 시간'
내 사랑의 기준이 낮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곳에 있었다. 나와 맞지 않는 게 명확한 사람도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사랑받을 자격 없는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니까.
나를 낳은 아빠도 주지 못했던 관심과 사랑을 주는 이를 극히 높게 평가했다.
나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내 삶을 통제하려하거나 집착하는 사람도 용납할 수 있었다.
사랑해준다면.
어느 날, 그런 내게 정말 멋진 사랑이 찾아왔다.
우연히 친구와의 모임에서 만난 그는,
사랑으로 나를 휘두르려고 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 간절히 원해줬고, 매일 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확인 시켜주었다. 아빠와 닮은 부분이 많았던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건 순식간이었다.
마음이 커질 수록 두려웠다. 매일 내 삶의 영역에 더 크게 자리잡는 그에게서 버려진다면 더 크게 아플 거 같아서. 긴장을 멈추고 사랑하기까지는 꽤 오랜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천천히 함께 겪어주었다.
그에게 버려질까 불안해하는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으면서도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만약에 내가 살이 10Kg 쪄도 사랑할수 있어?"
"너무 예쁠 것 같은데, 내가 사랑하는 네가 더 커지는 거잖아."
불안함이 불러오는 <만약에 게임>. 그는 어떤 질문에도 귀찮아하지 않고 내가 듣고 싶어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고민 끝에 나는 상처 받기 두려워 마음을 절제하는 대신, 나를 떠날 일이 없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도시락을 싸고 찾아가 기쁘게 해 주기도 하고, 없는 지갑을 털어 특별한 선물을 해주기도 했다. 나의 연애의 최우선 순위는 '그 사람이 나를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즐겁고 만족하는 건 순위 안에 없었다. 그를 만족시켜주고 기쁘게 해 주면 더 이상 내가 버림받지 않을 거라 믿었다. 가장 예쁘고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불안함도 따라왔다. 절대 나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갈 수 없도록.
자기 계발은 나를 사랑해서, 혹은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었지만 그 사실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남자 친구의 군대 입대
만난 지 1년이 좀 지나고 그 사람이 군대에 갈 때가 되었을 때.
그는 미안한 마음에, 혹은 군대에서 헤어지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군복무를 기다려달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남자 친구의 걱정과 달리, 그의 군생활을 함께 겪는 일은 내게 기회였다. 가장 힘들고 외로운 시기에 곁을 지켜준다면 고마움에서라도 관계를 지켜 나갈거라고 여겼으니까.
그동안 외롭고 지쳐가는 내 감정은 얼마든 무시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사랑받는 최고 곰신 되기'에 열중했다. 소포와 편지를 보내고, 소대원 전부에게 간식을 따로 챙겨주기도 했다. 강원도 최전방, 3Km만 넘어가면 북한 땅을 앞두고 있는 그 험한 곳까지 차를 빌려 면회를 가기도 하고, 지인과 약속이 있을 때도 양해를 구하고 밖에 나가 30분이 넘도록 전화를 받는 일이 허다했다.
'어때, 내가 최고지? 그러니까 나를 떠나지 않을꺼지?'
내 헌신의 속내는 겨우 이거였다.
내 삶을 위해 써야 했던 에너지를 남자 친구에게 쓰는 게 전혀 아깝지 않았었다. 그런 지극정성을 보며 그의 지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남자 친구에게 말했다.
'놓치면 후회할 거야, 있을 때 잘해'
입대 초반 이등병일 때까지만 해도 "네, 잘해야죠. 전역하자마자 결혼하고 싶어요" 하고 당당하게 대답했던 그는 전역이 가까워질수록 이런 말을 듣는 게 불편한 듯했다. 눈치 빠른 나는, 혹시라도 부담감에 사랑하는 마음이 줄어들까 싶어 황급히 웃으며 그 질문을 대신 받았다.
"에이,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위태롭게 꽃신을 신고, 그의 힘든 시기를 잘 지켰다는 기쁨도 잠시,
서서히 함께하는 시간을 기쁘게 여기지 않는 그를 발견했다. 그를 만나면서 가뜩이나 뛰어난 눈치만 더 늘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잘 아는 그는 점점 대담해져갔다.
군대 안에서 억압되었던 시간들. 가까이에서 지켜봐서 그가 얼마나 고생 했는지 알고 있었다. 사회에 나왔으니 하고 싶은 일이 많을 거라 생각하며 서운함을 달랬다.
새로운 교제권에 대한 호기심, 사회에 적응해야 한다는 부담 등 그가 변해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늘 충분했다.
그렇게 그에게서 점점 나를 줄여나갔다.
제대 한 이후로 여유가 없다는 말을 믿고, 그가 여유를 찾을 수 있도록 두손 걷고 그를 도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유가 없다'는 말은 핑계였다. 그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어도 내게 내어주는 시간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더 이상 그의 이유를 납득 할 수 없을 때, 이별을 스스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아차 싶을 만큼 그에게서 나는 '을'이었다는 것도.
'그래. 솔직히 말하면 지쳤어. 이제는 그에게서 눈을 돌려 나를 돌보고 싶어.'
이 마음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곧, 나를 돌보려는 시도를 칭찬하기로 마음 먹었다. 사실 정말 대단한 발전이기도 했다.
나는 헌신하거나 애쓰지 않아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그를 붙잡아 두는 게 나를 더 힘들게 한다면, 함께한 시간이 아까워도 놓아주자.
그리고 그 에너지를 나에게 쓰자.
남자 친구에게서 졸업하기.
그동안 함께 했던 따듯한 날들이 스쳐 지나가 목을 뜨겁게 매어왔다. 저 속 깊이에서부터 울음이 터져 나왔다. 가장 깊은 지하실을 알고 공감해주었던 그가, 곁을 떠나 나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건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이별 이후,
주위 좋은 사람들을 만나 많이 울었다. 그 사람과 만난 시간에 메어 있지 않으려면 쏟아야 할 눈물의 분량이 있다고 여기고 최대한 열심히 울었다. 최대한 빨리 털고 일어나고 싶었다.
누가 배열한건지, 헤어진 다음 날부터 세 달동안 바쁜 일정들이 쌓여 있었다. 일상에서 조금도 위태롭고 싶지 않아서 후딱 슬픔을 쏟아냈다.
점차 변해갔던 그였지만 사실은 이해한다. 그리고 많이 고맙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아야 하는 사랑을 대신 차곡차곡 채워 나가 준 것. 마음이 어려울 때 당연한 듯 위로해준 것. 나를 가장 귀한 사람으로 대해주고, 마음이 독립할 수 있게 된 지금까지 옆을 지켜준 것이.
정말 후회없이 사랑했다. 사실 많이 과했다. 내 평생 누군가를 위해 이만큼 공을 들여본 적 없었다. 네가 이런 과한 사랑을 받을 필요가 있어서, 그래서 날 만난거였더라면 좋겠다 .
'그래. 너도 최선이었겠지.'
많이 배웠고 행복했었다. 그 시간을 그 사람과 겪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 사람을 만나며 내 모난 부분을 많이 깎을 수 있었다. 연애하기 이전의 내 모습과 비교했을 때 놀랄만큼 성장한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를 먼저 돌봐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스물한 살부터 스물넷까지.
가장 시행착오가 많을 나이에 그 사람을 만나 아프지 않게 배울 수 있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몰아 쉬는 기분이었다. 이젠 정말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갈 수 있겠구나. 갑자기 여행을 떠나도,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거나 사람들을 새롭게 만나는 것도 오로지 원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내게 선물 같은 시간을 주자.
미래에 가정이 생기고 챙겨야 할 식구들이 있다면 마음 편히 갖지 못할 나를 위한 시간.
외로울 때 무엇을 하는지, 그런 내게 어떤 처방이 필요한지 스스로 찾는 시간.
아침에 일어나 일기를 쓰며 내 감정이 어떤지 돌봐주고 기분이 나아질 수 있는 처방을 선물해주자.
평소 읽고 싶었던 책 꺼내 읽기.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연락하기.
음악을 듣고 글을 쓰기.
목적지 없이 운전하기.
깔끔하게 차려 입고 카페에서 시간 보내기.
이별은 나를 힘들게 하고 불쌍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연인과의 많은 약속에서 벗어나 정말 원하는 나를 알아갈 수 있는 기회다.
상대에게 집중해 있는 마음을 나에게 돌려 스스로 채워줄 수 있는 시간이다.
2020.3.16 늦은 겨울, 3년 5개월 연애를 정리하며. 선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