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수입산 찐라비올리가 되고 있나요?
새벽 한 시쯤 잠들었던 것 같은데, 세무서에 가기 위해 열 시쯤 침대 위에서 탈피를 위한 매미 애벌레보다 더 격렬하게 몸을 비틀며 일어나기 싫어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고요한 아침을 맞았다. 시계를 보니 아침 일곱 시쯤? 한국은 아마 오후 두 시쯤 되었으리라. 핸드폰을 켜서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안부 메세지와 밀린 답장을 보냈다. 거실에서 내 방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중문을 열고, 문을 하나 더 열고 들어와야 하는 굉장히 프라이빗한 구조인데, 귀를 기울이니 두 개의 문 너머로 꺄르르 웃는 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밤에 자며 헝클어진 머리를 슥슥 빗고 나가자 거실에서 나를 반겨준 건 고전적인 페르시아 미인 파르디스와 그녀의 두 아이들이었다.
큰아이는 어제 인사를 나눴던 레일라. 레일라는 낯을 안 가리고 싹싹하게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작은아이는 칠 개월 됐다는 로저. 커다랗고 동그란 눈이 엄마를 꼭 닮았다.
파르디스와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나는 일어났어야 하는 열 시까지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레일라는 고작 세 살 반인데도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천재였다. 나도 나중에 아이를 바이링구얼(이중언어구사자)로 키우고 싶다는 희망사항이 있는데....세 살 반 레일라와 세 살 반짜리 이탈리아어 구사 능력을 가진 나는 제법 죽이 잘 맞는 대화 상대였다.
한참 놀다보니 어느새 세무서로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간단하게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는데....누가 알았을까, 이렇게나 힘들고 더운 하루의 시작이었을 줄은.
보통의 경우 피렌체 첸트로까지 이동하는 데에는 트램이 유용하지만, 구글이 말하길 세무서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는 게 더 효율적이라 한다. 그래? 채택! 호기롭게 버스를 타러 나섰디. 당장 일 년 전에도 이탈리아를 여행으로 와서 버스를 탔던 경험도 있어서 자신이 있었다. 근처에 있는 타바끼(담배 가게인데 작은 매점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에 들러 버스 티켓을 샀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바로 눈 앞에서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지나쳤다. 에이, 버스 한 대 놓친 게 뭐....금방 올 거야. 그런데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나(feat.이오공감). 내가 놓친 버스는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날은 흐렸는데 그렇다고 시원하지도 않은 날씨. 콧잔등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연신 땀을 닦아내며 구글 맵이 띄워져있는 핸드폰 화면만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내가 버스를 놓친 시간이 11분, 그 다음에 28분에 올 거라며 올 거라며.... 오지 않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지친 미국인 커플은 커다란 캐리어를 끌며 자리를 떠났다. 결국 버스는 40분이 다 되어서야 왔다. 아마 그 시점에서의 나는 30%정도 녹아서 정류장 바닥에 눌러붙었고 그 이후 세무서부터의 아라벨라는 70%의 존재였으리라고 확신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50%나 되려나?
세무서에 도착하기 전까지 걱정이 많았다. 이탈리아 공공기관에 대한 (아주 정당한) 불만은 이탈리아 거주 한인들의 단골 안줏거리였다. 10분을 일찍 도착해도 시간 맞춰 오라고 돌려보낸 사람이 있다던데,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돌아가서 다시 예약해서 오라고 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내가 방문했던 피렌체 세무서 기준으로 아주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세무서엔 백발이 성성한 노인 직원분들이 아주 많으셨는데, 다들 영어를 잘하진 못해도 한결같이 친절하게 민원인들을 상대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탈리아어로만 대화를 나누었지만, 나는 얼마나 이탈리아 공기관의 영어 실력이 부재한지에 대해 알 수 있었는데, 아주 간단한 해프닝 덕분이었다.
내가 세무서를 예약한 이유는 '코디체 피스칼레Codice Fiscale'라 불리는 세무 번호를 발급받기 위함이었다. 예약 확인증을 가지고 가면 코디체를 발급받기 위한 서류를 주시는데, 영어 괜찮니? 영어로 된 신청서를 줄까? 라고 물으시기에 Si, Grazie, 답했다. 신청서를 가지고 대기실로 가서 앉아 작성하려고 보는 순간....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그건 영어가 아니었다. 그리고, 하물며 이탈리아어도 아니었다. 멘탈이 흔들리는 그 순간. 어디 보자, 이건 키릴 문자는 아니고...한자가 아닌 것도 확실한데......그 때, 신청서에 적힌 꼬부랑 글씨 중 딱 한 단어가 내 눈에 꽂혔다. Nombre. 이름! 이름을 뜻하는 스페인어였다. 확실히 하고자 옆에 앉은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이거 혹시 스페인어인가요?"
"맞아, 나한테도 스페인어 신청서를 줬어. 나도 폰 번역 도움을 받을수밖에 없었어..."
다행히도 아주머니께서는 어느 부분에 무엇을 작성해야하는지 친절하게 알려주셨고, 덕분에 신청서를 수월하게 작성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아이오와에서 왔다고 했다. 난 한국의 서울에서 왔다고 했더니 서울에 사는 건 마음에 드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글쎄...서울은 정말 정말 빠른 도시예요. 그걸 좋아하기 때문에 서울에 살고 있지만 가끔은 좀 느긋하고싶을 때도 있죠."
"그러면 아이오와가 딱 맞겠네."
우리는 함께 웃었고, 아주머니의 순서가 되어 작별인사를 나눴다. Arrivederci! Arrivederci too!
곧 나의 순서도 다가왔다. 역시나 백발이 지긋하신 멋쟁이 할머니 직원분께서 업무를 봐주셨고 5분이 채 걸리지 않고 코디체 피스칼레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발급받은 서류를 서류가방에 넣고 나왔더니 다시 후텁지근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분지라 덥고 습하다더니 그 말이 딱 맞는 듯했다. 그래도 나온 김에 해야 할 일이 더 있기도 했고, 이태리에 도착한 후 첫 식사는 꼭 맛있는 걸 먹고 싶었기에 근처의 식당을 검색했다.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와 후추로 만드는 카치오 에 페페 파스타를 너무 좋아했기에 그걸 먹고 싶었는데, 마침 주변에 카치오 에 페페라는 이름의 리스토란테가 있었다. 이건 운명이야! 호기롭게 식당으로 걸어갔다. 걸어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도착한 식당은 경악 그 자체였다. 깔끔하고 멋스러웠지만....이런 삼복 더위에 에어컨을 틀지 않다니. 이건 재앙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장에는 비행기에 달려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팬 두 대가 돌고 있었고, 한 대로 이 리스토란테를 다 커버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은 작은 에어컨은 전원조차 꺼진 채로 그냥 거기 있었다. 순간 돌아나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카치오 에 페페에서 카치오 에 페페 먹기. 얼마나 재밌는가. 그 생각 하나로 이를 악물고 파스타를 먹었다. 맛은 좋았다. 하지만 반 이상 남긴 걸 본 주방장의 표정이 좋진 않았다. 맛있었어요, 조그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정말이다. 맛있었는데...다만 더운데다가 뜨거운 파스타까지 먹었더니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몸에 열이 올랐을 뿐이다.
식당을 나와 연신 땀을 훔치며 우체국 위치를 검색했다. 체류허가증인 페르메소 디 소죠르노를 발급받기 위한 신청서, '키트 쟐로'를 우체국에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키트 쟐로는 노란 키트라는 뜻이다. 우체국에 도착하자 재미있게도 돈을 내고 들어갔던 식당보다도 시원한 냉방이 나를 반겨주었다. 내 앞으로는 예닐곱 명의 대기자가 있었는데, 다른 블로그 글을 읽어보니 키트 쟐로는 그냥 받는 것뿐이라 굳이 번호표를 뽑지 않고 사람과 사람이 바뀌는 사이에 재빠르게 가서 받아오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양반중에 양반, 조선의 공주 아라벨라 리.....는 아니고, 그냥 소심한 쫄보였기 때문에 번호표를 뽑았다. 어차피 밖은 덥기 때문에 우체국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었다.
시간이 지나 재빠르게 신청서를 받아 우체국을 나왔고, 앉아서 쉬고 싶었다. 이탈리아, 그것도 피렌체. 커피가 맛있는 카페는 널렸겠지만 나한테는 커피 맛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구글 맵을 켜 가장 신속하게 냉방이 잘 되는 카페를 찾았다. 들어간 카페는 커피보다 과일과 야채를 갈아 만든 부스터 음료가 주력이었는데, 내가 주문했던 음료도 정말 맛이 있었다. 만원이라는 거금이 들었지만...뭐, 위치가 위치니까 그러려니 하자.
카페 근처에 코나드가 있어 집에 가기 전 간단하게 장을 봤다. 제로콜라, 과일 음료수, 린스, 삶은 새우? 음료수가 두 병(큰 병)이나 있어 트램을 타고 돌아오는 길이 아주 고됐다. 사람은 미어터지는데 냉방은 미미한 건지 안 트는 건지....땀이 빗방울 흘러내리듯 흘렀다. 감히 십자가를 지고 고행의 길을 걷던 예수님의 마음을 아주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 새우를 주워 먹었는데 다시 사먹을 것 같은 맛은 아니었다. 새우를 먹고 누워 뒹구는 사이 에어컨이 고쳐졌다. 원래도 숙소 침대는 좋았는데 에어컨까지 나오니 정말.....내 방 상태를 확인하러 온 마르코에게 Such a Paradiso! 오바를 떨었다. 시원해진 방 안에서 넷플릭스로 케이트 허드슨과 앤 해서웨이가 주연을 맡은 Bride war(신부들의 전쟁)을 보았다. 생각 없이 보기 딱 좋다고 생각했는데 유치하다고 평점은 별로인 듯 하더라.
영화를 보고 나니 디스코드에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전편에 등장했던 살구, 키위, 그리고 릴리, 7(가칭). 우리는 한국에 있을 때에도 자주 디스코드 채널에 모여 수다를 떨곤 했다. 이 모임을 일단 조랭이떡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혼밥을 싫어하는 나는 이탈리아 시간으로 사는 내 친구들에게 풍경을 보여주겠다며 카메라로 리스토란테로 가는 길을 촬영해 보여주었고, 한술 더 떠서 다른 사람의 얼굴이 안 나오게 한다는 조건 하에 식사하는 모습까지 스트리밍했다. 요컨대, 멤버십 라이브랄까. 유튜버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신난 나는 식사 도중 몇 번이고 Thanks for your superchat!을 연발했다. 부산 가스나 살구의 '쟤 또 저러네'는 덤.
피렌체는 예로부터 소가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죽 공예가 발달했고, 남은 고기로 티본 스테이크가 발달했다는데. 대부분의 피렌체식 티본 스테이크 레스토랑은 1.2~1.5,kg부터 주문을 받는다. 한국인 기준으로도 소식하는 나로서는 절대로 먹을 수 없는 양. 하지만 우선 직원에게 물어라도 보자는 마음이었다.
"이거(스테이크) 몇키로부터 주문 가능이야?"
"그거 양이 엄청 많아. 우리는 1.5kg부터 주문 받고있어. 하지만 네가 혼자 먹고 싶다면 이거 또는 이거를 추천해 줄게."
다행히 가게에는 1인 손님을 위한 스테이크 메뉴도 준비되어 있었고(티본은 아니지만), 다른 가게에선 종종 다 못 먹을 것 같아도 무조건 많은 양을 주문하게 하는 곳도 있는데 이 곳은 1인 메뉴를 먼저 추천해준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 어제 여기로 이사왔어. 자주 올게."
"그래? 반가워. 또 보자!"
테이블 담당 서버와 인사를 나누고서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은 더위가 한풀 꺾여 시원해져 있었다. 비록 자리에 함께 있진 않았어도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산책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와 쉬고 있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꼬마 레일라가 나를 위해 준비했다며 무지개색으로 그린 꽃 그림을 건넸다. 사랑스러운 천사야!
신이 나서 친구들에게 한껏 자랑을 하고 났더니 드는 의문. 한국은 대체 몇 시인거야?
헤아려 보니 해는 이미 뜨고도 남을 시간. 우리 조랭이떡 멤버들은 다들 이미 이탈리아 시간으로 산다며 자조 섞인 농담을 했다. 나의 프리랜서 친구들이란! 잠들며 내일은 기필코 아무 데도 나가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누구나 알듯이 계획은 계획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계획이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