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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abella Jul 15. 2024

240622

예쁜 것만으로도 살 가치가 있단 말이에요

20일 늦은 밤에 피렌체 도착, 21일은 하루종일 외출. 이틀에서 사흘 가까이 중노동에 가까운 일정을 소화했더니 22일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한 터였다. 하지만 결국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사흘간 예정된 비 소식 때문이었다. 사흘간 집 밖으로 '진짜' 나가지 않으려면 식량을 비축해 둘 필요성이 있었다. 그 김에 밖에 나가서 맛있는 식사도 하면 겸사겸사 더 좋고.

내가 묵는 아파트 근처에는 작은 쇼핑몰이 있다. 마트라고 하기엔 크고, 쇼핑몰치고는 작은 곳이다. Coop이 있고, H&M등의 의류 브랜드와 카페, 젤라테리아, 리스토란테 등이 모여 있어 구경하거나 시간을 보내기에도 딱 좋다. 점심을 먹고 장 봐서 들어오면 딱 좋겠다! 계산이 섰다. 

오늘도 활기차게 집을 나선다. 이틀 내내 밤 모습과 흐린 하늘만 봤던 내게 처음으로 보는 맑은 피렌체의 하늘이었다. 한국에서의 내 이탈리아어 원어민 과외선생님 메기가 추천해 준 부팔라 치즈 마르게리따 피자를 먹고 싶었다. 넓고 세련된 매장에 친절한 직원들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맛있진 않지만 그래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피자였는데, 나는 늘 그렇듯 언제나 같은 문제에 봉착한다. 한국인 기준으로도 너무나 소식하는 사람이라는 것. 물론 피자는 이 동네 사람들도 가볍게 한 판을 다 먹지는 못하는지 계산을 요청하니 자연스럽게 포장해주려고 하셨다. 안 그래도 고민중이기는 했는데, 결국엔 포장해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사양했다. 반 판이 조금 안 되게 남은 피자는 너무 아까웠고 데워 먹으면 훌륭한 저녁일 것 같았지만, 곧 사흘치 먹을 장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까닭이다. 장바구니도 무거울 게 뻔한데, 피자 박스까지...어휴.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마트를 찾아 어슬렁거리던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서점이었다. 와, 서점! 한국에 있을 때도 교보문고나 영풍문고가 보이면 참새 방앗간 못 지나치듯 들르던 나였다. 안 그래도 이탈리아어 공부를 위한 아동용 원서를 사고 싶었는데 한국에서는 이탈리아어 원서 동화책이 구하기 어려워 보류하던 참이었다. Bambini(유아)용은 너무 쉽고 흥미가 일지 않았기에, Bambini->Ragazzi(아동->청소년) 쪽 서가를 기웃거리며 둘러보던 찰나! 내 눈을 잡아끄는 완벽한 책이 거기에 있었다.

이름도 찬란한 아이들을 위한 그리스 신화/노르딕 신화 책이었는데, 굉장히 두꺼웠고 하드 커버였으며 세련되고 근사한 삽화가 함께 포함되어있는 책이었다.


와, 이건 정말....완벽한데?

맹세컨대 십 분 넘게 그 책이 있는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작은 아라벨라 두 명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무겁잖아! / 하지만 내가 관심있는 내용이라 공부 잘 될 것 같은데! / 하지만 무겁다고! 이사 갈 땐 어쩔 건데? / 넌 뭘 몰라! 예쁜 것만으로도 살 가치가 있단 말이야!

등등.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두 아라벨라는 적당히 타협을 보기로 했다. 임시 숙소인 지금 집에서는 참고 나중에 진짜로 머물 집이 정해지면 그 때 사는 것으로. 결정하고 서점을 나오는데도 아쉬운 눈길이 계속 머무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서점을 나와 전날 갔던 코나드보다 훨씬 규모가 있는 Coop으로 향했다. 오늘의 메인 이벤트! 두둥.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반겨준 것은 그토록 먹고 싶었던 납작복숭아였다. 내가 처음으로 납작복숭아를 접한 것은 칠 년 전 까미노에서였는데, 덥고 쨍한 길 한복판에 기부제 무료 쉼터를 운영하던 마음씨 고운 청년, 이반이 나눠주었던 기억이었다. 그 때 먹었던 납작복숭아가 어찌나 달고 맛있던지! 그 후로 납작복숭아에 대해 항상 그리워했으면서도 이상하게 연이 없었더랬다. 복숭아와 요거트, 냉동 펜네 파스타 등등을 담고서 혹시나 라면 종류가 있을까 마트 안을 세 번 정도 빙빙 돈 것 같다. 도저히 없는 것 같아 울상을 짓고 포기하려던 순간, 기적처럼 내 눈에 라면 코너가 들어왔다. 일본식 컵라면과 봉지라면이었는데, 패키지가 온통 까맣고 코너가 아주 작아서 계속 못 보고 지나쳤던 것. 사흘치 식량만 사려던 계획이었으나 컵라면 네 개, 봉지라면 두 개를 집어들었다. 라면은 뭐, 두고두고 먹을 수 있으니까.

신나는 마음으로 쇼핑을 마치고 카운터에 섰는데, 헉. 이게 무슨 일이람. 카운터에서 계산을 봐 주는 오빠(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들 알겠지만 평균적으로 서양인들은 동양인보다 나이들어보이는 듯하니까!)가 기가 막히게 잘생긴 거였다. 약간 나른한 듯한 눈빛에 황금빛 갈색 머리카락을 길러서 맨 번을 한 카운터 오빠에게서 나는 눈을 뗄 수 없었고, 계산을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네 헤어스타일 엄청 멋있네!"

"뭐라고?"

"머리가 엄청 멋있다고!"

"하하, 고마워." 

그는 그런 칭찬을 별로 들은 적이 없는지 멋쩍어보였지만 기분이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장을 보고 나오며 친구들에게 문자를 돌렸다. 큰일! 마트 카운터 오빠 엄청 잘생겼음!! 문자를 본 친구들이 한 마디씩 궁금증을 보탰다. 얼마나 잘생겼는지 등에 대한 것들. 남자들은 여자 얘기만 나오면 예뻐? 라고 묻는다더니 이런 걸 보면 참 성별 가릴 거 없이 다들 미인을 좋아한다.

음료수까지 포함해 한껏 눌러담은 짐이 무거워서 낑낑거리며 아파트로 돌아갔다. 그냥 걸으면 십 분? 아니,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 같은 거리였는데 억만 광년처럼 느껴졌다. 에어컨을 고쳐 시원한 방 안으로 돌아와 장 본 걸 냉장고에 정리해 넣고서 뒹굴거리다가 식사를 하러 다시 바깥으로 향했다. 집에서 먹을지 고민도 했으나, 전술한 대로 앞으로 사흘 간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기에 집에 갇히기 전에 외식을 하고 싶었으므로. 그리고 다들 공감하겠지만 타향살이 이틀차는 딱 바깥 음식 구경하고싶어 할 시기이다.(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맞다.)

식당에 들어가서 리조또를 주문했다. 키안티 와인으로 소스를 한 보라색 리조또는 생긴 건 별로지만 맛은 근사했다. 양은 좀 많았지만. 계산을 요청하기 위해 서버와 눈을 마주쳤더니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카메리에리께서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Finito?(다 먹었어?)라고 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정말 정말 맛있었지만 나는 원래 조금 먹는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음식에 진심이라더니 남기면 굉장히 서운한 티를 내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억지로 먹으면 탈이 나니까. 어릴 때는 음식을 남기는 게 싫어서 언제나 꾸역꾸역 다 먹었던 듯한데, 커가면서 '남는 음식보다 내 위장이 더 소중하다'는 공지영 작가님의 말을 깊이 새겨듣게 되었다.('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에서 인용)

아파트로 돌아오니 레일라가 반겨주었다.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올리고 두어 바퀴 빙빙 돌린 후 파르디스와 마르코에게 레일라를 데리고 인사이드아웃 영화를 같이 봐도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레일라가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허락이 떨어져서 아이를 방으로 데려와서 인사이드아웃 1편을 이탈리아어 더빙으로 틀어주었는데, 언뜻언뜻 보는가 싶더니 나랑 노는 게 더 재미있었나보다. 장난꾸러기 레일라는 베개를 가지고 놀다가 영화가 채 반이 되기 전에 엄마를 보러 가도 되냐며 나갔다. 아직 애니메이션을 집중해서 보기에는 어린 나이인가보다. 

원래 오늘 안으로 소죠르노 신청서와 밀린 일기를 쓰려고 했으나 사흘간 비 때문에 갇혀있을 거란 생각에서인지 게으름을 부리다가 포기했다. 해야 할 일은 빗속의 아라벨라에게 넘겨버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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