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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abella Jul 15. 2024

240625

생일 축하해!

아침에 느즈막히 눈을 떴다. 내 방의 커튼은 두 겹으로 되어 있는데 보통 방 안 쪽의 암막 커튼은 젖히고 얇은 커튼만 드리우고 자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 고개만 돌리면 대강 오늘의 날씨를 가늠할 수가 있다. 센비는 아니었지만 추적추적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문득 굉장히 갑작스럽게도 암스테르담으로 떠나고 싶었다. 암스테르담에 있다는 반 고흐 미술관에 꼭 가보리라고 생각했는데, 비가 오니 왠지 가고싶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던 것 같다. 이역만리 먼 땅으로 날아왔는데 여기서도 또 떠나고 싶어하다니, 참으로 역마살 낀 인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두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하나는 비행기 티켓 가격 문제였다. 당일 떠나는 비행기를 구하려니 아무래도 비쌌다. 버스 루트를 찾아보자니 22시간을 찻길로 달려가야 한다고. 으! 당장 패스.

그리고 두 번째가 가장 중요했는데, 바로 이탈리아 비자를 받아서 들어온 사람은 소죠르노 실물 카드를 발급받기 전까지는 타 쉥겐 국가로 출국할 수 없다는 점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탈리아 거주자들이 모인 카카오톡 오픈 채팅이나, 네이버 카페에서도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화제였다. 주된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어차피 쉥겐국 항공으로 입국할 때 사람들이 비자를 자주 검사하지는 않는다. 잡혀서 실제로 불이익을 봤다는 사람도 드물다.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불가하며 그에 따라 운이 나쁘게 걸렸을 때 영원히 쉥겐 가입국에 입국이 불가하게 될 수 있다는 패널티가 있다.'

세상에! 영영 입국 불가라니. 그저 여행뿐만 아니라 수많은 직장에서 '해외 여행에 결격이 없는 자'를 뽑는데 이렇게 밀입국자로 낙인찍혀 입국 금지 처리가 된다면 앞으로의 인생이 순탄하지 않을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그러니 당연히 고려할 가치도 없었다. 하지만 한 줄기 미련을 놓지 못하고 웹 서핑을 계속하던 내게 들려온 단비같은 소식이 있었으니.

이탈리아에 입국한지 90일이 되지 않은 사람은 실물 카드 여부와 상관 없이 자유롭게 출국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사람마다 전부 말이 다르기도 하고 확실히 하고 싶었기에 대사관에 연락을 넣었다.

정확히는 넣고 싶었다.

내가 이탈리아 번호를 아직 개통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빼면 모든 게 좋았을 것이다. 이마를 탁 쳤다. 그리고 어차피 일자리를 구하고 여기서 생활하려면 이탈리아 번호가 필요할테니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 김에 당장 나가 핸드폰을 개통하기로 했다. 통신사를 선택하고 개통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따로 게시글로 빼서 정리할 생각인데, 이 글에서 짧게 서술하자면 이렇다. 아직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탈리아는 도시마다 잘 터지는 통신사가 다르다' 한다. IT초강국 대한민국에서 온 국민들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나는 피렌체에서 잘 터진다고 하는 TIM 통신사를 선택해 폰을 개통하기로 했다. 집에서 15분정도 걸리는 곳에 매장이 있어 서둘러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방 바깥으로 나가자 웬일인지 주방 식탁에 예쁘고 단정한 식탁보가 씌워져 있었다. 챠오, 파르디스와 인사를 나누며 물었다. 

"멋진 식탁보네! 오늘 손님이라도 오는 거야?"

"아니. 사실 오늘 내 생일이거든. 별 거 아니야! 그냥 가족들끼리 모여서 식사나 하는 거지."

"정말로? 너무 축하해!" 

별일이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아이 둘을 보는 엄마로서 파르디스를 위한 시간이 없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래서 오늘은 정말로 그녀를 위한 날이 되었으면 했다. 오면서 괜찮은 게 있으면 선물을 사야지.

오늘도 덥디더운 날씨가 이어졌다. 고작 십오 분 남짓을 걸어가며 땀이 비오듯 흘렀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카운터에 남자애 한 명이 앉아있는 작은 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통을 하려면 여권을 제출해야했는데, 대한민국 여권을 발견한 카운터 남자애가 한국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는 무심한 듯 저번에 3개월짜리 한국어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오, 그래? 적당히 리액션을 해 주었는데 조금 후, 그가 다시 워킹 홀리데이로 왔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했더니 처음에 애써 무심한 척 하려 했던 모습이 무색하게도 화색이 돌며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나도 내년 8월에 서울로 워킹 홀리데이를 가려고 준비 중이야."

"정말? K-컬쳐를 좋아하는 편이야?"

"응. 좋아해."

"가장 좋아하는 건 뭔데?"

"엑소도 좋아하고, 한국 드라마도 좋아하고...."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엑소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는 그 외에도 기생충과 이영지, 이영지 씨가 유튜브에서 진행하는 '차린 건 쥐뿔도 없지만'이라는 컨텐츠를 좋아한다고 했다. 개통을 마치고 나오며 너도 꼭 열심히 준비해서 서울에 무사히 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응원의 메세지를 건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점이 있기에 파르디스의 선물로 살 만한 게 있을까 싶어 들러 보았다. 카운터에서는 사장님이 딸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서점 일을 가르치고 있었다. 순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탈리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들 조슈에가 귀도의 서점을 맡아 보고 있던 장면이 생각났다. 서가를 둘러보다가 김호연 작가님의 밀리언셀러, '불편한 편의점' 이탈리아어 판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나와 한 때 좋은 기억으로 인연이 있던 책이어서 마침 기념할만한 책으로 딱 좋을 것 같았다. 

책을 구매하고 돌아가는 길에 '모카 아라'라는 카페 겸 바를 발견했는데, 유난히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베이커리가 예쁜 곳이었더랬다. 나는 스폴리아띠네 글라사떼(한국명 누네띠네)라는 과자를 정말 좋아하는데, 한 번쯤 공산품이 아닌 제대로 된 베이커리에서 구운 것을 먹어보고 싶어서 베이커리가 있으면 꼭 기웃거리곤 했다. 놀랍게도 아직까지는 파는 곳을 본 적은 없다. 모카 아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스폴리아띠네 글라사떼는 없었는데, 몸을 돌리려던 찰나 냉장고에 들어있는 치즈 케이크들이 눈에 들어왔다. 선물은 이미 샀지만 가족들이 온다고 하니 케이크도 하나 선물하면 좋을 것 같았다. 가장 예쁜 케이크를 구매하며 주인 할머니와 인사를 나눴다. 모카 아라라는 카페 이름을 언급하며 내 이름이 아라벨라라고 얘기했더니 주인 할머니가 함박 웃어주셨다.

집으로 돌아오니 가족들 맞이 준비를 하는지 멋들어지게 꾸민 파르디스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케이크와 책을 건네자 그녀는 정말 행복한 표정을 하고 나를 안아 주었다. 페르시아 풍의 푸른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방으로 들어와 조랭이떡 멤버들과 통화를 하며 떠드는데 예보처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둥이 치고, 빗줄기가 대각선으로 쏟아졌다. 점심으로는 요전에 사두었던 냉동 파스타를 먹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안타깝지만 맛이 역겨웠다. 먹다가 뱉고 싶을 정도였고 결국에 반 이상을 남겼다. 다시는 먹지 말아야지. 중얼중얼거리며 입을 씻었다.

그러던 중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척들이 온 것 같았다. 나는 극도로 외향적인 성격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가족 모임에 철판 깔고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의 철면피는 되지 못한다.....고민하다가 결국 파르디스에게 왓츠앱 메세지를 남겼다. 

"혹시 너만 괜찮다면 오늘 저녁에 가족들과 편하게 보낼 수 있게 나가있어줄게! 난 괜찮아~"

"아냐! 오늘 그냥 내 생일을 맞아 마르코의 엄마와 누나와 조카 두 명이 와서 가족끼리 저녁시간을 좀 보내는 것 뿐이야. 별 거 아니야." 

답장을 받았지만 마음은 더 심란해졌다. 저게 어떻게 별 거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본인이 계속해서 괜찮다고 하는데 내가 뭘 어쩌겠는가. 실은 나가봤자 오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도 없었다. 늦게까지 여는 펍에 가려면 첸트로까지 나가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집에서 친구들과 영화를 보기로 했다.

점심을 부실하게 때워 저녁에 뭔가 맛있는 걸 먹고싶었기 때문에 포장하러 나갈까 고민하다가 귀찮아서 가지 않았는데,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오는 것 같기도 했고....나가지 않길 정말 다행이었다. 연속으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는 건 바라지 않는 바였으니 말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절대로 배달어플을 사용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는데, 비가 좀 그쳐서 처음으로 사용해보기로 했다. 딱 한 번만이라고 의미 없는 다짐을 되뇌이면서. 사프란 리조또와 할라피뇨 치즈 튀김을 주문했는데, 리조또는 그냥 그랬지만 할라피뇨 치즈 튀김은 입맛에 딱 맞았다. 한국에서도 이런 튀김을 팔면 잘 팔릴텐데. 어플에는 비마트처럼 근처 마트에서 배달을 해 주는 기능도 있어서 음식배달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 하지만 장 보는 기능은 유용할 듯하기도 하다.

토독, 토독 내리는 빗소리를 배경음처럼 깔고 넷플릭스 영화 '시니어 이어'를 보았다. 17살에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치어리더가 20년의 시간을 지나 깨어나서 학교에 돌아가 프롬 퀸을 노린다는 내용이었는데, 빤한 로맨틱 코미디였지만 감동도 재미도 있고 킬링타임용으로 딱 좋은 듯했다. 같이 봤던 조랭이떡 멤버들도 좋은 영화였다며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영화를 보는 중, 파르디스에게 케이크를 같이 자르자고 메세지가 왔다. 나갔더니 그의 친척들이 자리에 모여 있어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파르디스와 가족들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해 주었지만 내가 있으면 다들 영어를 써야 할 것 아닌가? 생각만 해도 불편할 것 같아 한사코 사양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영화가 끝나고는 인터넷의 여러 게시글을 참고하며 페르메소 디 소죠르노 신청을 위한 키트 쟐로를 작성하였다.

소죠르노 서류 준비와 키트 작성에 대해서는 다른 게시글로 따로 빼서 작성하겠다. 

서류를 작성하고 누워 내일의 루트를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되새겨 보았다. 인쇄소에 가서 필요한 서류를 마저 뽑고, 우체국에 가서 제출하고, 부동산에 들렀다가 동네를 돌며 일자리 구하는 공고가 있는 곳을 찾아본다.....

입국한지 8영업일(주말 포함 10일) 이내에 꼭 신청해야만 하는 소죠르노이기에 타임어택을 하는 기분이었는데 신청하고나면 한시름 놓을 듯했다. 다른 사람들 말로는 지문 찍으러 오라고 알려주는 날짜가 아주 멀다는데 얼른 찍어버리고 실물 카드를 기다리게되면 좋겠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일자리도 구해야할 텐데, 일자리 구하는 운도 꼭 따라주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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