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5 ; 짜메에서 피상까지

"고소 먹기는 싫어"

by 블랙베어


간 밤에 뒤숭숭한 꿈을 꾸었다. 게다가 오줌이 마려워 두어 번 깨다 보니 컨디션이 좋지 않다. 어제의 이뭐병 같은 산악마라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목디스크 증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심상치 않다.


출발하기 직전까지 목디스크로 인한 극심한 통증으로 주사치료를 받아왔다. 의사는 총 6개월 정도 되는 내 장기여행 계획을 듣더니 기겁을 하며 말렸다. 거의 협박에 가까운 어조로.


"호갱님! 대책 없이 나댔다가는 마비까지 올 수 있습니다요!!"


비행기와 버스를 오래 타는 여행은 목디스크 환자에겐 최악이라는 것. "예, 예"하며 대답했지만, 뒤돌아서며 바로 풋! 실실 쪼개며 병원문을 나왔다.

" 내 병은 내가 잘 아오!!"


역시나 만병의 근원이었던 서울을 떠나니 증상이 싹 사라졌다. 방콕에서도, 카투만두에서도, 바로 어제까지도. 돌팔이 자가 진단에 확신이 생기기 시작한다.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산으로 들로 뛰다니면 목디스크 따위는 절로 낫는구나..라고.


그런데, 어젯밤부터 조금씩 목과 어깨가 아파오더니 후일 토롱라를 넘어 좀솜에 이르는 1주일간 고통은 계속 나를 따라다녔고, 그 강도는 점점 심해졌다. 우이 씨.. 점점 더 아름다운 곳으로 빠져들어가는데 왜? 왜?


그렇다!!! 나는 하루에 무거운 배낭을 지고 최소 대여섯 시간은 걷는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적을지언정 심한 물리적인 부하로 인한 신체적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다. 아무리 멋진 자연에 감탄하고 동화되더라도 육체적 압박을 온전히 이겨낼 수는 없다.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순리일 것이다.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저 기쁘고 즐거운 마음에 모든 것이 괜찮다고 내 육체의 고통을 애써 숨기려 했던 것은 아닌지.. 어쩌면 5시간 반 정도 되는 방콕행 비행기 안에서도 여행에 대한 흥분되는 마음 때문에 의식은 못했겠지만 연신 목을 돌리며 어떻게든 고통을 피하려 했을 것이다. 그지 깽깽이 같은 경추 5번과 6번.



목디스크와 더불어 슬슬 압박해 오는 것은 고소 증세 (AMS). 예민한 사람들은 고소증세를 느끼기 시작하는 고도에 이르렀다. 고소 증상은 체력이 자신 있다고 해도 부지불식간에 찾아올 수 있다. 성별이나 인종을 가리지 않는다. 럭키냐 언럭키냐의 문제일뿐. 다행히 나는 럭키가이였지만, 불안감이 따라다닌 것은 사실이었다. 보통 고소증세로는 불면증, 소화불량, 거친 호흡 등이 있으며 심하면 악몽과 환청, 환영, 극심한 두통이 이어지다 사망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나에게는 특이하게도 고소 증세가 목디스크로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들었다. 그렇다고 씨버에게 말하기는 좀 쪽팔리기는 했다. 며칠이나 지났다고.. 불안해하며 침낭 안에서 조금 떨었다. 아흑! 고소 먹기는 싫단 말야!



어찌 되었건 태양은 떠올랐고, 아프건 쪽팔리건 불안하건 떠날 채비를 해야 한다.





▲ 아침에 창문을 열면 저런 풍경이다. 동네 뒷산 스케일 좀 보소!



아침을 먹으면 의례히 씨버의 브리핑이 시작된다. 씨버는 영리하게도 나에게 선택지를 물었고 그에 따른 소요시간과 각 마을의 특징을 이야기해 주었다. 상대적으로 먼 마낭과 가까운 피상. 마낭에서는 하루 휴식을 거치기 때문에 무리해서 마낭까지 갈 수도 있었지만, 어제의 독일놈과의 혈투 탓도 있고 목디스크로 인해 상당히 쫄아 있었기 때문에 피상을 선택했다. 게다가 고장 난 카메라가 기적적으로 다시 작동해서 천천히 사진도 찍어가며 유유자적하게 걷고 싶었다. 낮에 일찍 도착하면 밀린 빨래도 하며 멍 때릴 생각에 기분이 조금 편안해졌다. 론리플래닛에 소개된 피상이라는 마을이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와 머물고 싶기도 했고. 피상은 마을이 위치한 높이에 따라 어퍼피상과 로워피상으로 나누어져 있다. 난 어퍼피상을 선택. 이유는 별거 없다.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동서는 동, 남북은 남, 위아래는 위, 남녀는 여를 선택하면 된다. 그렇게 목적지를 정하고 느긋하게 차 한 잔 하며 남들 떠나는 거 구경하다가 출발!




▲ 이제 동네 뒤편 설산이 정겹게 느껴진다. 물론 올라갔다가 눈사태 한 번 맞으면 그대로 설인귀 되겠지만.



▲ 앞장서서 힘차게 걷는 동네 소들.







▲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은 내내 사진과 같은 계곡을 옆에 끼고 진행하게 된다.









▲ 마을 입구 혹은 사원에 늘 있는 마니차(작은 경통)들. 한 번 돌리면 경전을 한 번 읽는 것과 같다고 한다.




▲ 영국 처자 3명. 다들 쾌활하고 체력이 끝내줬다. 맨 왼쪽이 내가 기네스 펠트로 닮았다고 생각한 분.

이날 이후로 못 만나다가 내가 최고조로 망가졌을 때 다시 만나게 된다.




오늘도 여지없이 길을 가다가 새로운 사람과 만났다. 오늘의 주인공은 말레이시아에서 온 중국 국적의 여자. 이름은 들었는데 까먹었다. 대충 징쯔이 (차마 '장'쯔이라고는 못 부르…) 라고 하자. 일단 첫인상은 터프! 자기 몸뚱이보다 큰 배낭을 등에 지고, 그보다 작은 배낭은 옆에 메고 다닌다. 작은 배낭을 큰 배낭 위에 얹거나 아니면 작은 배낭은 앞으로 메면 무게중심이 쏠리지 않아 더 편할 텐데, 늘 한쪽으로 기우뚱한 채 걷는 그녀. 터프라기보다는 안쓰러워 보였다. 게다가 안 씻는지 덜 씻는지 좀 꼬질꼬질한 편이었다. 흙먼지 뒤집어쓰는 건 누구나 비슷할 텐데 유독 그녀의 몸과 배낭은 흙먼지로 가득했다. 몸에 무슨 흡진판이라도 달린 듯했다. 그나마 처음 만났을 때는 덜했는데, 이틀 뒤에 마낭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상거지도 이런 상거지가 없을 정도. 옷도 거의 한 벌만 계속 입는 듯했다. 나도 안 씻고 꾸리꾸리한 편이지만 그녀는 좀 심했다. 아무튼 징쯔이는 처음 보는 나를 무척 경계하는 눈치다. 아마도 내가 더럽게 생겼기 때문일 거다. 하여간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는데 주로 씨버한테만 말을 건다. 나와 편하게 대화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씨버도 새로 대화할 사람이 생겨서인지, 아니면 징쯔이가 마음에 들어서인지 신이 났다. 씨버 입 속의 라지에이터가 터진 셈. 나중 일이지만 여자 중에서도 중국 여자가 특히 좋다고 씨버가 귀뜸해주었는데, 그제서야 왜 이렇게 씨버가 징쯔이를 살갑게 대했는지 이해가 갔다. 암튼 죽이 잘 맞는 씨버와 징쯔이. 이제 시버는 나 따위는 내팽개치고 징쯔이와 보조를 맞춰 걷는다. 깨소금이 쏟아지는 광경을 보며 둘만의 시간을 위해 조금 속도를 내서 걸었다. 그렇게 속도를 내서 걷다 보니 씨버가 보이지 않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와 10미터 이상은 떨어지지 않는 씨버였는데. 하하하. 나도 나대로 씨버 없이 론리하게 걸으니 기분이 좋다. 오늘은 이렇게 혼자 유유자적하게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한참을 걷는데 어느새 스윽하니 내 옆에 나타나는 씨버. 짜식! 데이트 더 해도 되는데.. 씨버는 포터로써 사명은 잊지 않은 그야말로 된 놈이다. 뒤따라온 징쯔이와 이야기하니 첫인상과는 달리 느낌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틀 뒤 징쯔이는 씨버를 버리고 마낭에서 만난 어떤 남자를 마음에 들어하는데…





▲ 징쯔이와 씨버. 햇살을 받은 그들의 표정이 여유로워 간질거릴 정도.




▲ 길도, 목적지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오늘은 저기까지 간단다!




▲ 어제와는 달리 천천히 걷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니 (나 말고 징쯔이랑 ㅋ) 기분 업된 씨버.




▲ 트레킹 내내 왼쪽으로 보이는 람중히말. 이젠 좀 지겨워지려고 한다!



점심을 먹고 나른하게 쉬며 깜빡 잠이 들려고 하는데 씨버가 자기 휴대폰으로 음악을 튼다. 여지없이 네팔 노래. 걸을 때나 쉴 때나 계속 튼다. 나흘 연속 몇 시간씩 같은 것을 들으니 돌아버릴 것만 같다. 걸을 때는 그렇다 쳐도 쉴 때조차 특유의 찢어지는 경극 톤의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 짜증이 났다. 오늘은 작심하고 씨버에게 시비를 걸었다.


“씨버! 또 네팔 음악이야? 안 지겨워?”


씨버(24세), 나이에 맞지 않게 능청스럽다. 음악을 끄지도 않고 벌떡 일어나더니 네팔 춤을 보여주겠다면서 괴기한 동작으로 팔꿈치 꺽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 씨버가 추는 네팔 전통 춤은 인도 영화에서 보는 것보다는 조금 더 각지고 투박한 느낌. 어쨌든 꺽기 귀신이 사람을 잡아먹으러 달려가는 동작같이 느껴졌다. 평소 같았으면 황당해서 입을 벌리고 서 있었겠지만, 신나게 춤을 추는 씨버를 보니 나도 따라서 춤을 추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네팔 춤이 아니라 나만의 무국적 막춤. 네팔 음악에 맞춰 박자에 맞지도 않는 망나니 춤을 꽤 오랫동안 췄다. 롯지 앞마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우리를 쳐다보던 트레커들과 현지인들이 날 보고 미쳤다고 생각했을 정도의 뿌리 없는 막춤이었다. 그치만 더티댄싱의 무아지경에 빠지니 황당하게 쳐다보던 구경꾼들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이 춤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이렇게 춤을 추고 나니 기분도 상쾌해지고 네팔 음악으로 인한 짜증도 사라졌다. 물론 소화도 잘 되었고. 막간의 행복이랄까. 다만, 씨버는 트레킹 중에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가 같이 춤을 췄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렸는데 그때마다 창피했다. 많이 창피했다. 하하하.




▲▼ 다카리포카리 마을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래는 주인장과 그 딸.




다카리포카리에서 점심을 먹고 피상으로 가던 중 엄청나게 크고 특이하게 생긴 산을 발견했다. 온통 모래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었는데, 보는 순간 릿지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산이었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저 산 너머에 있는 지역에 대해 물으니 돌포지역이라고 답하는 시버. 돌포 너머서는 이름부터 간지 나는 무스탕 지역. 그러고 보면 저 산 너머 북쪽 방향으로 계속 가다 보면 국경이 나올 것이고 그곳을 넘어서면 티벳에 이르게 되겠지. 히말라야에 대한 내 로망은 에베레스트 등정도 아니고 트레킹 중 우연히 만난 기네스 펠트로와의 찐한 인연도 아니다. 바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네팔에서 티벳으로, 다시 티벳에서 네팔로 넘어가는 것이다. 마치 소금을 지고 히말라야를 넘어가는 티벳의 마방들처럼. 예전에 차마고도라는 다큐에서 그 모습을 보았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넋이 나갔고 넋이 나간 상태로 몇 개월 지내다가 결국 이 곳에 오게 되었다. 중국 정부에서 걸어서 히말라야를 넘어 티벳으로 입국하는 것을 금했다고 하는데, 참 소심하면서도 못돼 먹은 중국놈들. 언젠가는 꼭 국경을 넘고 싶다. 유순한 눈망울을 지닌 당나귀 한 마리를 끌고 천천히 육포를 씹으며.












▲ 피상가는 길에 만난 엄청난 바위산. 매끈한 바위를 발과 손으로 느끼며 단숨에 뛰어 올라가고 싶었다.




2시 조금 넘어 피상에 도착했다. 어퍼 피상에서 묵으려고 했으나 그곳은 바람이 많이 불고 춥다고 하여 숙소는 로워 피상으로 하고 어퍼 피상은 짐을 풀고 다녀오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어퍼 피상에 있는 사원을 구경하고 찻집에 들려 차를 한 잔 마셨다. 오늘의 멍 때리기 계획은 어퍼 피상의 찻집에서 성공! 다만 오늘로써 무척 친해진 씨버의 계속된 수다가 나의 멍한 정신상태를 깨우기는 했지만. 어퍼 피상에서 설산들을 보니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눈앞에 가까워지고 그만큼 위압적으로 느껴진다. 이제 본격적인 높은 고지에 도달했다는 느낌. 가슴이 빵빵해지는 충만감으로 숙소에 내려와 잤다.




▲▼ 난 피상을 만나 행복. 씨버는 징쯔이를 만나 행복.



▲▼ 어퍼피상의 집들. 바람이 거세어 지붕 위에 단단히 돌을 괴어 놓은 듯하다.







▲ 어퍼피상에 오르니 안나푸르나 (아마도 안나푸르나 II봉) 의 모습이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는 씨버





▲ 어퍼피상에서 내려다본 로워피상. 단독 가옥이 대부분인 어퍼피상에 비해 로워피상엔 대규모의 롯지들이 많이 지어져 있다.








▲ 다리를 건너는 양 떼들. 내가 찍은 거지만 잘 찍었다고 인정!!





▲ 저 문 안쪽이 양들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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