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젓가락 부대 나온 놈이야"
트레킹의 출발점인 베시사하르부터 이 곳 딸까지는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비슷한 일정으로 움직인다. 중간 여정은 조금 차이가 있더라도 셋째 날은 대부분 딸에서 묵게 된다. 그런데, 딸에서부터는 다르다. 고도가 2000미터 이상 높아지기 때문에 각자의 체력 여하에 따라 하루에 가는 거리의 차이가 나기 시작한다. 총 2주 정도 소요되는 전체 트레킹을 마치게 되면 대략 2~3일 정도의 차이가 난다. 아침 먹을 때, 같이 묵었던 일본 아줌마 부대와 독일 커플과 이야기해보니 다들 다나큐까지만 걷는다고 한다. 씨버도 다나큐까지 가자고 했고. 하지만, 지도를 펴보니 짜메까지 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짜메까지 가고 싶다고 말하니 씨버가 씨익 웃더니 한 마디 한다.
"거기까지 졸라 멀다."
"상관없다! 졸라 걷자"
알겠다고 하는 씨버 녀석. 또 웃는다. 아마도 고생 좀 하라고 웃는 듯싶다. 결국 씨버 말대로 고생은 했는데, 이 날 짜메에 도착해서 너처럼 잘 걷는 트레커는 처음이라는 칭찬도 받았다. 하긴, 상처뿐인 영광일 뿐.
나, 젓가락 부대 나온 놈이다. 젓가락 부대는 11사단의 애칭. 졸라게 걷는 부대다. 그런데...
여기에는 함정이 하나 있다. 빽으로 편한 보직을 받은 데다 무릎과 허리를 부여잡고 행군하는 동료 군인들에게 초코파이를 나눠주며 악명 높은 11사단의 행군을 간접으로만 체험했지.......만 야구도, 군대도 기록만 남는다. 난 11사단 젓가락 부대, 지구를 반 바퀴 걸어야 제대하는 곳을 나온 남자.
아침을 먹으며 독일 커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슈트트가르트인지 프랑크푸르트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하여간 "트"로 끝나는 도시에서 온 대학생 커플. 두 명 모두 존잘. 그리고 친절 다감했는데, 맘 놓고 편하게 친해지기에는 조금 시간이 걸리는 타입이긴 했다. 며칠 뒤 조우한 한국인 일행들과 우연히 이 독일인 커플 이야기가 나왔는데 다들 이 커플이 재수 없었다고 엄청 씹어댔다. 이 새퀴들, 열폭인가? 괜한 심술인가? 싶기도 했지만 일행 모두 맹렬히 욕해대기에 잠자코 있었다. 하여튼 난 이 커플이 좋았다.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할 정도.
어제에 이어 아침 메뉴는 티벳탄 브레드. 처음 먹고 반했던 음식이 이틀 만에 물리기도 쉽지 않은데 그걸 이 빵이 해냈다. 그래도 에너지 보충을 위해 꾸역꾸역 먹었다.
▲ 독일 가게 되면 너 찾는다. 헤첼! 쌩까지 마라잉~
▲ 안나푸르나 라운드 길은 트레커들을 위한 길이기에 앞서 이 곳 사람들의 삶의 길이다. 그래서, 걷기에 더 편안하고 때로는 숭고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등산을 위한 길이 아닌, 일상을 위한 길이라는 것이 마음에 든다. 말 방귀 소리는 여전히 맑다. 노새들의 눈망울도 한없이 맑다.
▲ 잠시 쉬고 있는 씨버. 엄마 생각?... 하긴, 저 산 너머 방향으로 가면 씨버 고향이 있긴 하다. 산을 천 개 정도는 넘어야 하겠지만.
계곡길을 따라 씐나게 길을 걷던 중, 이번 트레킹 기간 중에 가장 인상적인 사람 한 명을 만났다. 30대 정도의 독일 남자였는데, 흰색의 두꺼운 다운점퍼를 입고 땀을 한되박씩 흘려가며 걷고 있었다. 낮에는 햇볕도 따갑고 기온도 높은 편이라 걸으면 땀이 제법 나는데도 이 독일 곰팅이, 헤비한 땀을 흘리면서도 절대로 흰색 패딩을 벗지 않는다. 이후에도 여러 번 마주쳤는데 패딩 벗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마에 흐르는 땀의 양을 봐서는 이미 몸에서는 온천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을 텐데…근성인지 미련함인지 한결같았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미 트레커들 사이에도 화제가 된 모양. 여기저기서 그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외양뿐만 아니라 걷는 내내 중얼중얼하는 수상함까지 더해지니 눈에 더 띈다. 그런데, 나는 이 놈이 마음에 들었고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걷는 속도가 나와 비슷한 데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지나칠 때마다 계속 인사를 나눴기 때문이다. 우연히 같은 바위에 걸터앉아 쉬게 되자 좀 더 길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는 말이 너무 빨랐고 특유의 입속에서 맴도는 중얼거리는 어투 때문에 그의 말을 반도 못 알아들었다. 이럴 때면 모자란 내 영어 실력이 아쉽다. 게다가 대화의 주제가 두서없고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막무가내로 해대기 때문에 듣다 보면 정신이 쏙 나가버린다. 그야말로 막 던지는 스타일. 일례로 내가 한국에서 왔다니까 북한 핵이 날아와서 미국과 중국이 싸우게 되는데… 하며 무슨 김일성이 솔방울로 수류탄 만드는 얘기 같은 황당한 이야기를 계속 지껄인다. 나름 경건한 자세로 듣던 나도, 억지로 들어주는 척하는 표정이 역력한 씨버도 더 이상 대화 불가라고 판단. 씨버가 눈을 찡그리며 살짝 맛이 간 놈 같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래도 난 왠지 이 놈이 좋았다. 그가 쓰고 있던 동그란 안경 (존 레논이 즐겨 쓰던) 도 마음에 들었고. 이 놈과는 3일 정도 짧게나마 이야기를 하며 다녔는데, 그 이후로는 못 만나다가 열흘 뒤 고레파니에서 극적으로 상봉하게 되었다.
한 번은 같이 길을 가다가 카터칼을 꺼내 드르륵드르륵 소리를 내며 나보고 따라오라고 하는 것이다. 뜨억…하는 마음에..간신히 왜?라고 물으니 내가 버섯을 따줄 테니까 같이 요리해서 먹자는 것이다. 그러더니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숲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내가 망설이자 뒤돌아보고 안 따라 올 거냐며 턱짓을 했다. 반쯤은 풀려 있지만 집요해 보이기도 한 그놈의 눈빛을 보니 겁이 덜컥 났다. 그놈이 따는 게 버섯인지 내 장기인지 알 게 뭐람. 씨버도 벙 진 표정. 결국 거부했는데 돌이켜보면 후회도 된다. 이상한 놈은 맞지만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았으니…
다나큐에서 점심을 먹었다. 롯지 주변이 한참 공사 중이라 무척 시끄러웠는데, 이 곳에서 묵지 않고 더 가기로 한 것은 잘한 것 같았다. 이 생각은 점심을 먹으면서 더 확고해졌다. 좀 색다른 게 먹고 싶어 사과파이를 주문했다. 그냥 사과파이가 아니라 커스터드 크림이 들어있는 고급진 사과파이였는데, 한 입 먹자마자 멘붕! 골판지 씹는 식감에다 사과향은커녕 곰팡이 썩은 눅눅한 벽지 같은 냄새와 맛. 게다가 커스터드 크림은 더 최악. 말의 콧물을 받아 그대로 응고시킨 것 같았다. 더 이상은 못 먹을 것 같아 씨버가 먹고 있던 딸밧과 바꿔먹자고 하니 다행히 씨버가 오케이! 씨버에게 물으니 맛있다고 한다. 사과파이는 그렇다 쳐도 커스터드 크림은 도저히 먹을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그것까지 싹 다 비우는 씨버.
▲▼ 체크-포스트가 적힌 곳에 들려 퍼밋 카드에 스탬프를 받아야 한다. 도장 찍힐 때 기분 흐뭇하다.
▲ 안나푸르나 만년설산은 점점 가까워지고!
▲ 말 콧물 쨈을 바른 골판지 요리를 대접해주신 고마우신 주인장 아줌마. 미소가 예뼜다.
다나큐부터는 조금 힘이 들었다. 흰 패딩 독일 남자가 나만 만나면 속도를 냈다. 자기보다 앞서 나가는 게 싫은가 보다. 그럼 쿨하게 보내줘야 하는데 나도 경쟁심이 생겨 더 빨리 속도를 내며 걸었다. 이 날만큼은 씨버가 내 속도를 못 따라올 정도니 어지간히 독일 놈을 이기고 싶었나보다. 내가 앞서 나가면 독일 놈은 뭔가 중얼대며 갑자기 뛰쳐나간다. 그 뒤는 뻔했다. 실속도 의미도 전혀 없는 찌질이 두 마리의 산악 마라톤. 이게 뭐하는가 싶다가도 '이겨도 병신, 져도 병신이라면 이긴 병신이 되거라'란 말을 되새기며 기를 쓰고 이긴 병신이 되고자 했다. 결국 우리 둘 다 거의 같은 시간에 짜메에 도착했는데, 완전 탈진 ㅋㅋㅋ. 덕분에 씨버가 예상한 시간보다 1시간 반쯤 일찍 도착했지만. 다리가 풀려 숙소 침대에 쓰러지며 이게 무슨 지랄인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어떤 감동도 재미도 없이 남은 건 비긴 병신 두 명. 무언가 부족한 놈들이 쓸데없는 경쟁에 매달린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
짜메는 2700미터에 위치한 마을이다. 우리나라 백두산 높이인 셈. 이제부터는 조금씩 고소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하긴 고소에 대한 대비래 봤자 별거 없다. 무리하지 말고, 따뜻한 차 많이 마시면 충분하다. 하나 더 있다면 그날 잘 곳보다 더 높은 곳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와 자는 것. 신체가 높은 곳에 한 번 적응하면 더 낮은 곳에서는 문제없다고 한다.
최악이었던 점심과는 반대로 이 곳 짜메에서 이번 트레킹 음식 중 베스트 1위라 할 만한 음식을 먹었다. 빵장(카레라고 보면 된다)에 밥뿐이었는데, 빵장 맛이 기가 막혔다. 8시간 정도 걸어 허기진 탓도 있겠지만, 암튼 살면서 먹은 카레 중에 제일 맛있었다. 공깃밥 다섯 공기는 먹은 듯하다.
피씨방이 있다고 해서 소화도 시킬 겸해서 가 보니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대략 6대 정도의 컴퓨터 중에 부팅이 제대로 되는 놈이 없었고, 간신히 부팅이 된 놈으로 사진 두 장 보내는데 40분 소요. 그나마 끊기지 않은 게 신기한 일. 하긴 이 깊은 산속에 랜선이 깔린 것이 더 신기한 일이기는 했다.
깜깜한 골목길을 더듬어 걸어 숙소로 돌아와 잤다. 늦은 밤, 비긴 병신 두 놈에게 축복을 빌며 잤다
▲산속에 있는 움막 같은 곳에서 차를 팔던 소녀. 16살이었고 티벳에서 건너왔다고 한다. 씨버와 잘 아는 사이. 남동생하고 함께 산다는데 부모와 왜 떨어졌는지는 묻지 않았다. 눈빛이 맑고 인상이 고왔다. 남동생은 사진 찍는 게 부끄러운지 도망가버렸다. 그 움막의 모습과 움막 안의 차 그릇, 밀크티 향내. 지금은 어느 것 하나 선명하지는 않지만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