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 ; 게르무에서 딸까지

"비스따리는 개뿔!"

by 블랙베어


어제의 무시무시했던 씨버의 설사와 도저히 피해 갈 수 없는 길가에 널린 동물들의 똥들을 밟다 보면 오늘의 기도가 단순해진다.


‘오늘도 설사하지 말게 하소서. 생산된 지 1시간 이내의 똥만은 밟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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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말, 노새, 당나귀들이 다 똑같아보였는데, 트레킹을 끝날 때쯤 이 셋을 어느 정도 구분하게 되었다. 보통 현지인들의 물건을 옮기는데 수단으로 이들을 이용하지만, 간혹 걷기가 힘들거나 고산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이 말을 타고 트레킹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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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말들이 궁뎅이를 흔들며 걷는 모습을 보면 무척 귀엽다. 방귀도 연신 뀌어댄다. 소리도 우렁차고 냄새도 제법 난다. 꾸밈이 없는 소리와 냄새다. 어차피 좁은 외길에서는 방귀와 똥을 피할 수 없다. 앞질러 가거나, 말 궁둥이에 코를 처박으면서 걷거나.



게르무에서의 일박은 평온했고 아늑했다. 밤에 나방들이 내 얼굴을 간지럽힌 것을 빼면 괜찮았다. 벌레라면 질색을 하는데 그나마 나방이라서 다행.


밤이 깊을수록 폭포 소리가 잘 들려 내내 침낭 밖으로 대가리만 꺼내어 폭포 소리를 들으며 잤다. 간밤의 폭포 소리는 어떤 그리움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는데, 구체적으로는 언제 적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지, 누구를 향한 그리움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득한 느낌만 주는 그런 그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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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 마당에 나와 폭포 감상을 했다.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주인장 아저씨. 불 켜진 2층 방이 내가 묵었던 방. '아침이라면 응당 이런 게 아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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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축축해진 모든 것을 안나푸르나의 강한 햇볕이 순식간에 말려준다. 당연한 물리적 현상이었지만, 그로부터의 감동은 강렬했다.



아침식사 메뉴는 티베탄 브레드였는데, 밀가루를 넓적하게 반죽해 기름에 튀긴 단순한 음식. 꿀을 발라 먹으니 먹을만했다. 나는 원체 꿀돼지라 꿀만 찍어 먹으면 웬만한 음식이 다 맛있다. 게다가 빵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르니, 앞으로 트레킹 내내 아침은 요걸로 해야지… 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로부터 딱 하루 더 먹고 그만두었다. 3일째 되니 보기만 해도 느끼한 게 식욕이 급감. 트레킹 중의 아침으로는 딸밧 만한 게 없는 것 같다. 간사한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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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에 튀기듯이 굽는 티베탄 브레드. 한 입 베어 물면 입술이 기름 범벅.




대부분 트레커들이 아침을 먹자마자 길을 나서는 데 반해 씨버와 나는 아침을 먹은 후에 밀크티와 과자를 즐기며 롯지 마당에서 시시덕거리다가 길을 나섰다. 이후에도 우리는 다른 이들보다 더 느긋하게 길을 나섰는데 묵었던 숙소 앞마당이나 마을 공터에서 차 한 잔 마시며 아침 햇살 쬐는 게 행복했고 힘차게 출발하는 세계 각국의 트레커들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났기 때문이다. 늦게 출발한다 해도 걷는 데는 자신이 있어 해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달할 자신감도 있었고.



오늘은 딸까지 가기로 정하고 출발! 한참을 걷다 보니 씨버의 걷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와는 달리 나름 경사가 있는 언덕도 몇 개 넘어야 하는 길이었는데 씨버와 속도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씨버는 시버대로 자신이 날래고 유능한 포터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일 수도 있고, 스케줄에 맞춰 트레킹을 진행하기 위한 계산일 수도 있었다. 결국 우리는 통상적인 하루 트레킹 거리보다 조금씩 많이 가긴 했다. 나는 나대로 평소 등산할 때와 같은 빠른 걸음으로 걷게 되었고. 뛰다시피 걷다 보니 호흡도 거칠어지고 등판에 땀도 묵진 하게 맺혔는데 그 느낌이 최고였다. 무엇보다 히말라야 땅을 밟고 있는 게 그저 신기하고 감사해서 한 달만에 외출하는 강아지처럼 촐랑거리면서 다녔다. 내가 광견처럼 뛰댕기자 씨버는 더 속도를 낸다. ‘비스따리’는 오늘부로 개뿔 호랑말코! 트레킹을 준비하면서 귀동냥이나마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네팔 말인 ‘비스따리 비스따리’, 즉 천천히 걸으라는 충고다. 천천히 걸어야 체력을 아낄 수 있고 그럴수록 높은 고도에 적응할 수 있다는 건데 아직은 그저 공자님맹자님 소리. 쌔파란 하늘이 이렇게 선명하게 길을 열어주고 있고, 니 맘껏 뛰댕기라고 골짜기의 바람이 등판을 밀어주는데, 비스따리면 어떠하고 뛰어가면 어떠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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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하디 흔한 동네의 폭포와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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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다방'. 길을 걷다 이곳에서 차를 마셨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따뜻한 차를 많이 마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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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에서 바라본 풍경. 레몬차 홀짝이며 먼 산 한 번 바라보면 캬~~~~ 당신들도 어여 떠나시오!!



짬쩨에서 점심을 먹으며 쉬던 중, 길을 가던 타일랜드 커플과 만나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들이 지나갈 때 나는 "짹짹" 병아리 소리를 흉내 내며 길가의 병아리들의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그게 재미있었는지 걸음을 멈추고 흥미롭게 쳐다보고 웃는다. 남자는 환갑은 족히 지났을법한 은퇴한 할저씨였고, 여자는 20대 초반으로 보일 정도로 젊었다. 그들은 우리가 먹었던 곳의 길 건너편 롯지에서 식사를 했는데 씨버는 참 부러운 커플이라면서 슬쩍 말을 건넨다. 아직까지 나와 씨버는 마음속에 느끼는 솔직한 심경을 같이 나눌 만큼 친해지지는 않은 상태. 이렇게 뭔가 겸연쩍으면서도 공범의식을 갖게 하는 여자 이야기는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실 그다지 부러울 것 없는 커플이었지만, 맞장구를 쳐주니 씨버가 기뻐한다.



슬쩍 이 정열의 태국 남자에게 말을 건네본다. 역시나 그도 대화를 하고 싶었는지 반겨준다. 간단한 통성명 후에 (웨어 알 유 프롬?…이딴거) “나 태국 완전 좋아함. 태국 여행이 최고. 킹 오브 킹” 엄지척을 해준다.


정열의 할저씨, 뭔가 뿌듯한 표정으로 내 말을 받아준다.


“오 그래? 많은 남자들이 너처럼 태국을 최고로 생각하지. 팟퐁 최고지?”


“오잉????”


왓 더!!! 대뜸 팟퐁이라니! 물론 팟퐁은 알고 있다. 방콕 최고의 환락가. 하지만, 자기네 나라 최고라고 치켜세워주는데 환락가가 최고라고 맞장구쳐주다니. 넉살 좋게 좋아,좋아만 해주다가는 대화가 산으로 갈 것 같아 팟퐁은 전혀 모르겠다는 의뭉스런 표정과 제스처를 지어 보였다.


“팟핑? 퐁퐁? 그게 뭐야??”


남자에게서 실망과 난감의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마치 나보고 이 자식은 팟퐁도 안 가보고 태국이 뭘 좋다는 거야?라는 표정. 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태국 사람들 스마일 최고. 바닷가 최고. 음식 최고.”


생각나는 대로 영혼 없이 아무 말이나 던지니 태국 남자 김샜다는 듯이 썩소를 날린다. 친해지려 대화하다가 서로 김샌 격이다. 그렇게 멋쩍게 안녕을 하고 서로 제 갈길을 떠났다. 이 부러운 커플 (온전히 씨버의 관점에서) 은 이후로는 전혀 보지 못했는데, 그들의 걷는 속도가 너무 느렸기 때문이다. 비스따리의 축복은 이 커플에게나 임하소서. 그건 그렇고 씨버와 점점 친해지고 대화가 많아진다. 씨버 이 녀석, 은근 여자를 밝힌다. 씨버의 취향은 알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취향이 순수하고 국제적이라 할 수 있겠다. 국적 불문, 미모도(거의) 불문. 하긴 피가 철철 끓는 나이 (24살) 니까. 껄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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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씨버는 오른쪽 롯지에서, 태국 커플은 왼쪽에서 점심을 먹었다. 롯지들은 대부분 식당을 겸하고 있다. 내리쬐던 강렬한 햇볕을 발 옆에 두고 환타를 마시던 그 시간을 다시 한번 만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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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영락없는 치킨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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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 솟아있는 봉우리가 이뻐 씨버에게 봉우리 이름을 물으니 모른단다. 이름 없는 무명봉. 그래서 내 이름을 따서 KIM's PEAK 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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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고도가 높지 않아 꽃이 핀 나무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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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개가 삶의 의욕을 잃고 축 처져 있길래, 손을 잡고 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지금쯤은 환생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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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딸'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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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계곡물. 거센 물살도 이 곳에 오면 유순해진다. 그만큼 평평하고 너른 분지형태의 마을, 딸.




게르무에서 출발해 상제, 자가뜨, 짬쩨를 거쳐 딸에 도착했다. 한라산 백록담 정도의 높이에 위치한 딸은 널따란 분지 형태에 자리 잡은 고요한 마을이다. 상류에서 내려오는 거친 계곡물도 이 곳에 이르면 얌전해진다. 딸에 오기 전까지는 이 정도 높은 고도에 이렇게 포근하고 널찍한 형태의 마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새삼 히말라야의 높은 고도와 웅장한 넓이를 생각해보고 흥분감에 몸을 살짝 떨었다. 지금까지는 계속 람중 디스트릭트 땅을 지나왔다면, 이제부터는 마낭 디스트릭트에 들어서게 된다. (디스트릭트는 한국의 '군'에 해당) 사람들의 외양도 티벳 사람들에 점점 가까워진다. 티벳 사람들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한국 사람에게도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딸부터는 사람들이 나에게 더 친절한 것 같기도 하고. 티벳은 우리나라에서 먼 곳이지만, 더 가까운 중국의 한족이나 일본인들보다 더 가깝게 느껴진다. 다음날 딸을 지나 마낭과 피상에 갔을 때 더 그럼 느낌을 받았다. 마낭에서 만난 어떤 서양놈은 나보고 이 곳 사람이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 좋다가도 좆치 않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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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김치를 찾아댔으면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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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마을에 저런 시원한 폭포 한 두 개쯤은 있어야 마땅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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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인물 사진. 둘은 형제였는데, 형은 형다운 동생은 동생다운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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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상자를 저렇게 짊어지고 다니는 현지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치킨 싫어하는 민족은 단연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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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 뭐니 해도 니들이 젤 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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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을마다 있는 출입문.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문 옆에 달린 작은 종(마니차)을 쳐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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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치킨 츄릅~ ㅎㅎ



롯지에 도착해 빨래를 좀 하고 멍 때리고 있는데, 맷 데이먼 닮은 놈이 탁자에 앉아 지도와 가이드북을 보면서 열심히 뭔가를 연구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나중에 그놈과 친해졌는데, 독일에서 온 헤첼이라는 청년. 그는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생이었고, 의학을 공부하고 있는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 잘 생기고 이쁜 선남선녀 커플이라 길게 쓰고 싶지는 않다. (질투? 인정!)

트레킹 중에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관찰하고 대화하면서 느낀 거지만, 롯지에서의 서양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 맷 데이먼 류. 생김새도 샤프하게 생겼다. 그들은 늘 탁자에서 지도를 펴고 가이드북을 읽으면서 다음 루트를 살핀다. 매사에 별로 흥분하지도 않는 것 같고, 늘 사근사근 말한다. 그렇지만, 특별히 가까워지기도 어려운 부류다.

둘째, 스티브 부세미 류. 얘네들은 지도를 보는 일이 없다. 지도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냥 가다 서고, 먹고 잔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트레킹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늘 롯지에서는 한 잔 걸치며 무언가를 (사람이 됐건, 풍경이 됐건) 그윽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 그러다가 대화라도 할라치면 말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내가 만났던 스페인과 이탈리아 놈들이 그랬다.

마지막으로 케니 로져스 류. 그들은 일단 멋진 수염을 가지고 있고, 나이도 꽤 들었다. 언뜻 성실해 보이지만, 뭔가 부패한 느낌도 준다.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대놓고 다가서기도 꺼려진다. 미소 짓는 엄근진 스타일?! 내가 만난 스위스에서 온 사람과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 그랬다.

어찌 되었건 이 황홀한 트레킹 중에 만난 도반들이니 모두 반가웠고 하나같이 정겨웠다. 말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지금도 다들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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