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 ; 불불레에서 게르무까지

"씨버가 탈이 나다"

by 블랙베어


잠을 많이 자니 허리가 아프다. 허리가 아파 침낭밖으로 일어나니 춥다. 추워서 다시 침낭속으로 들어가니 허리가 배긴다. 이리저리 뒤척여도 스프링이 전혀 없는 딱딱한 침대가 편할리 없다. 대략 밤 9시 즈음 잠이 든거 같은데, 새벽 5시가 넘어가자 전혀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을 빼꼼히 뜨고 침낭안에서 웅크리고 앉아 짙은 고동색의 나무로 된 벽면을 바라본다. 딱딱한 침대, 싸늘한 방안, 시큼한 나무냄새. 그야말로 축복받은 새벽이다. 이제 피똥만 안 싼다면 완벽한 안나푸르나에서의 첫 아침이라 할 수 있겠지. 행복감에 빙구처럼 혼자 실실거리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뜨기 전인데 다들 떠날 채비를 하는구나…등산용 스틱의 끝 부분이 돌에 닿을 때마다 나는 '틱틱' 소리만으로도 흥분되는 아침이다. 씨버가 8시쯤 출발하자고 하여 조금더 밍그적거렸다.


아침을 먹으니 힘이 솟! 정력도 솟! 이제 본격적인 트레킹 출발이다!!


본격적인 트레킹은 계곡을 가르는 철제 다리를 건너면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이런 철제 다리가 무서워서 조금 후달거렸지만 나중에는 미친개처럼 뛰어다녔다. 출렁출렁하는 다리의 움직임도 나쁘지 않고 설령 다리가 끊어져서 강가에 수장된다한들 그게 운명인게지 뭐…나이를 먹으면서 어쩔 수 없는 일에 어쩔 수 있는 것처럼 대응하는 일도 점차 줄어든다.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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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한 오분 쯤 걸었을까. 눈 앞에 나타난 설산. 람중히말(6900미터)이다!


"씨버야! 오늘은 저 꼭대기에서 소주 한 잔!"


요렇게 오도방정을 떨면서 가는데, 씨버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 게다가 걷는 것도 영 시원찮아 보인다.


"씨버 무슨 일이야?"


"아..으..케니.. 쏼라쏼라"


씨버는 나보다 영어에 유창한데다가 특유의 인도억양과 빠른 말투 때문에 못 알아들을때가 많다.



씨버가 자기 배를 가르킨다. 배탈이 났단다. 아니 배탈이 나더라도 외지인인 내가 배탈이 나야 정상이지, 어제 아침부터 줄곧 같은 음식을 먹었던 씨버가 왜?


이야기를 해보니 어제 다른 포터들과 함께 롯지 밖에서 한 잔 하다가 그대로 노숙했다는 것. 멀쩡했던 청년이 하룻밤만에 처참하게 꾀죄죄한 뇐네가 되어 버렸다. 안되겠다 싶어 좀 쉬어가자고 했는데 괜찮다며 쿨하게 걷는다. 쿨하게(쿨한척?) 걷다가 화장실만 보이면 화급하게 달려가 해결하는 씨버. 화장실이 없는 구간에서는 할 수 없이 풀 숲으로 달려갈 수 밖에 없었고. 혹시나 풀 숲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던 뱀이 시버의 엉덩이나 고추,고환 등을 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되었다. 만일 그 쪽에 물리기라도 하면 차마 내가 입으로 빨아낼 수 없는 부위였기에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결국 설사에 지친 씨버는 자기가 잘 아는 집에 잠시 들려 차를 마시면서 조금 쉬었고, 약을 구해 먹은 후부터는 컨디션을 조금씩 회복해갔다. 회복도 빠른 씨버.



저리 고생하는 씨버를 보니 트레킹을 할 때 가장 무서운 것이 설사병일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어, 천지신명간에 빌고 또 빌었다. 탐식과 대식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 뻔한 저의 위와 장을 보호해주소서…

트레킹 중에 발생할 수 있는 두통이나 목디스크 통증, 무릎 통증은 아프고 불편하면 그만인데 설사는 거기에 더해 더러운 꼴까지 보게 한다. 아픈 것과 더러운 것은 서로가 서로를 상쇄시킬 수 없다. 오히려 효과를 증폭시킨다. 더러움으로 인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더 아프게 되고, 아프면 더러운 것에 자연스레 무감해지면서 결국 더 더러워진다. 하여간 설사는 여행의 가장 큰 적이다. 씨버를 보며 여행 중 나의 기원은 단순해졌다.

'더러운 꼴을 보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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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중히말 (6900미터). 트레킹 중 처음 만나는 설산.



오늘의 목적지 게르무까지 가는 길은 평탄했고 편안했다. 몇 개 마을을 지나쳐왔는데 우리네 시골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풍경을 차이나게 하는 것이라곤 그들이 기르는 가축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소, 돼지, 닭이 많다면 이곳은 압도적으로 노새, 나귀, 말 등이 많았다. 아무래도 이동 수단이 동물이다보니까 그런듯 싶다.


가는 중에 몇몇 일행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나푸르나 라운드 길은 하나인데다가 일정도 거의 비숫해 앞으로도 자주 만날 사람들이였다. 그 중에 세 명의 영국여자들이 기억에 남았다. 특히 한 명은 약간 기네스 펠트로가 가진 우아한 분위기를 가졌는데, 그 외양에 마음이 끌렸다. 속으로 좋다 말것임이 99.99%로 확실하지만, 까마득한 소숫점 너머의 상상이 스쳐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그녀들이 인상적이었던것은 그녀들의 걷는 속도다. 내 것보다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배낭을 지고 성큼성큼 잘도 걷는다. 며칠 후, 높은 고도와 피로감으로 내 모습이 최고로 망가져있을때 조우했는데 그때도 그녀들의 표정은 편안했고 걸음은 경쾌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던 나도 가끔은 이런 서양인들의 체력이 부러울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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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동네 똥개 - 난 똥개가 좋아 똥개 사진을 많이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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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쉬어 간 곳에서 사는 귀여운 아기. 주인 부부와 씨버는 잘 아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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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스위스 알펜! -이 곳에서 알프스(?)의 정취를 느끼며 점심을 먹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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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돈으로 2500원 정도하는 볶음밥. 맛난다!!! 점점 고도가 올라갈수록 비슷한 음식인데 값은 두세배 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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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병원 - 씨버의 배탈증세가 심해졌다면 저기서 하룻밤 간병 했을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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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즈 취해달라고 양들에게 부탁한 적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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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 길은 우리네 시골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고도를 높히기 전이니까.




점심 먹고 조금 지나가 오늘의 목적지 게르무 도착. 대략 7시간 정도 소요. 씨버에게 가장 풍경 좋은 숙소를 잡자고 하니 폭포가 보이는 롯지를 잡는다. 10여분쯤 내려가면 폭포 밑에 위치한 숙소들이 많았지만, 나는 이 곳이 마음에 들어 오늘은 이 곳에서 자기로 한다.


씨버는 안나푸르나 라운드 포터 경험이 꽤 있어서인지 잡는 롯지마다 대박. 롯지에서는 방 값대신 반드시 식사를 하고 그 비용을 내야 했는데 고도가 올라갈수록 비용이 높아졌다. 그 날의 도착지에 갈 때마다 씨버는 롯지를 잡았고, 마치 사전에 예약한 것처럼 편안하게 방을 잡아 내가 걱정하거나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롯지에는 우리 말고도 네덜란드 부부와 미국에서 온 남자가 같이 묵었다. 네덜란드 부부는 이때까지만 해도 인물들이 다 훤칠했는데 남편은 며칠후 고산병으로 산귀신같은 얼굴로 변하게 되는데...

트레킹중에 고산병에 제대로 걸린 사람은 딱 두 명 봤는데 그 중 한 명이 이 네덜란드에서 온 남편이었다.



짐을 풀고 마당에 나와 폭포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특별히 압도당할만큼 거대하지도 않고, 빼어나게 수려한 풍경은 아니었지만 눈에 담기에 편안했고 질리지도 않았다. 볼매인 셈이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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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씨버는 자러 가고 나도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이는데 나방 같은 놈들이 창문에 따닥따닥 부딪히며 내 신경을 거스른다. 잠이 오지 않아 가져온 책 중에서 '군주론'을 꺼내 읽기 시작한다. 어쩌다가 이 책을 가져온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비현실적이고 압도적인 풍광의 히말라야 품에 있으면서 인간세계에 대해 가장 현실적으로 접근한 이의 마음을 헤집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첫 장은 주로 정복군주가 피정복 국가의 국민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당근과 채찍으로 비유되는 두 가지 정책 모두에 대해 적절하게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는데, 특히 채찍을 휘두를때는 복수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잔인한 탄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현실적인 통찰력과 냉정함에 혀를 내둘렀다. 트레킹중에 천천히 일독해 봐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이후에는 전혀 책을 읽지 않았다. 읽기도 귀찮았고 책을 꺼내 볼 만큼 심심하지도 않았으니까. 혹여 트레킹이 심심할까봐 책을 싸들고 가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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