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우니 슬펐더라"
마음 가는 대로, 차편 되는대로, 인연 닿는 대로 6개월간 떠돌아다니리라!
이렇게 다짐하며 시작한 여행. 즉, 꼴리는 대로 무계획으로 나대겠다는 것이었지만, 나름대로 컨셉 하나는 가지고 출발했다.
바로 "주저앉지 않고 계속 걸어가기".
그 어떤 매력적인 공간과 인연을 만나더라도 눌러앉지 말고 새로운 곳을 향해 지체 없이 떠날 것. 물론 맘에 드는 한 장소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자유가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맞는 말.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하지만, 이 여행을 떠날 즈음에는 자기를 붙잡는 그 어떤 인연도 뿌리치고 훨훨 떠날 수 있는 '여행자의 달콤한 배반'이 나를 더 사로잡았다. 어디서든 실컷 즐기고 미련 없이 떠나리라.
오늘은 마낭으로 '입성'하는 날이다. 해발고도 3500미터에 위치한 이 곳에서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고소 적응을 위해 하루 휴식을 취한다. 이를테면 정상 등정을 위한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 코스에서만큼은 '모든 길은 마낭으로 통한다.' 가 딱 들어맞는 셈이다. 길을 가던 노새 목에 걸린 방울에서도 '마낭마낭' 소리가 난다. 한 구간의 끝이자 새로운 세계를 위한 출발점이 되는 곳. 씨버에 의하면 없는 것이 없는 환상적인 마을이자, 많은 트레커들과 만나 교류할 수 있는 곳. 만일 씨바신이 나에게 안나푸르나 마을 중 어느 한 곳을 고르게 하고 그곳에 떨궈준다고 한다면 단연코 마낭을 고르겠다. 그만큼 매력적인 곳이었다.
이번 트레킹에서 만난 친구들 중 가장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던 이탈리아 친구 루카를 아침에 숙소에서 만났다. 그 전에도 몇 번 만나 눈인사를 했지만, 일정과 숙소를 함께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눈 날은 오늘이 처음이다. 루카도 나처럼 포터와 함께 다니는 중이다. 포터의 이름은 ‘가니시’. 힌두교의 신 가니시는 씨바신의 아들이며 평소에는 코끼리 형상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내 포터 이름이 씨버이니 이름으로만 따지면 부자지간인 셈. 네팔 사람들은 신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많이 짓는다고 한다. 가니시는 다부진 몸과 깊은 눈매를 가지고 있는 청년이다. 또한, 씨버보다 조금 더 현지인에 가까워 딸밧을 먹을 때도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먹는다. 나도 언젠가는 손으로 딸밧을 먹으려 했으나, 손톱 사이로 파고드는 찐득한 카레 국물을 상상하니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 씨버와 가니시. 끊임없이 떠들고 웃는 씨버에 비해 가니시는 말이 별로 없고 차분했다.
▲ 씨버와 루카
루카는 첫 만남부터 좋았다. 사람이 편해서 애써 꾸며댈 필요도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루카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에 농담 따먹기도 수시로 하며 시시덕거리니 길이 한층 더 즐겁다. 내 부족한 영어도 잘 참아가며 들어주는 이해심도 깊은 친구다. 수염을 덥수룩하니 멋지게 길렀는데, 이탈리아 영화감독 난니 모레띠와 무척 닮았다. 루카는 IT 개발자로 베를린과 런던을 오가며 일을 한다고 한다. 부러운 녀석. 나는 10번 마을버스를 타고 양재동과 대치동을 와리가리하며 밥 벌어먹고 사는데… 무엇보다 그를 간지 나게 하는 것은 항상 손에 들고 있는 필름 카메라. 디지털 시대에 무거운 카메라와 렌즈, 수십 개의 필름통을 가지고 다니며 사진을 찍기란 쉽지 않다. 루카가 필름통을 갈아 끼우는 것을 유심히 바라봤는데, 솔직히 그 모습에 반했다. 어찌나 능숙하게 카메라를 다루던지! 촤르륵 필름이 감기는 소리며 다 찍은 필름통을 가방에 툭 던져놓는 동작이 간지 그 자체였다.
게다가 루카는 척척박사. 모르는 게 없다.
“이탈리아 여자? 오! 노! 말이 너무 많고, 남자를 들들 볶아!”
“독일 여자? 오! 노! 뭐 하나라도 잘못하면 남자를 두들겨 패!”
“영국 여자? 오! 노! 싸가지가 바가지야!”
… “그러면 어디 여자가 좋아?”
“불가~리아!! 거기가 최고야”
이렇게 인생의 팁이랄까, 교훈 같은 것도 말해준다. 그래~ 가자! 가자! 다음번 목적지는 불가리~~~스!!
▲ 배낭을 멘 내 뒷모습 사진은 항상 한쪽이 저렇게 처져 있다. 패킹을 잘못한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심각한 신체 불균형 때문인 것 같다.
▲ 뭐랄까.. 길은 농익을 대로 농익었다.라는 표현이 적당할 듯싶다. 길을 둘러싸고 있는 환상적인 설산의 풍경으로 인해 지금까지 나의 수호자 람중히말은 이제 아오안.
▲ 내가 좋아하는 할아버지 사진 2장. 오래 건강하시기를!
▲ 트레킹 중 햇볕을 너무 많이 받아 피부가 까매지고 거칠어졌다고 우는 소리를 하자, 내 뺨을 쓰다듬으며 아직 하얗다고 웃음을 짓는 선글라스 낀 할부지. 할아버지의 거친 손길과 인자함이 그립다.
▲ 아이들에게 준비해 간 학용품들을 나눠줬는데 너무나 좋아했다. 더 많이 가져오지 못한 것이 너무나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혹여 트레킹을 떠나는 분들이 있다면 아이들을 위한 학용품을 선물로 챙길 것을 권한다.
"책 좀 볼라치면 밭 갈고 풀 뽑고, 집안일에.." 씨버가 이런 말을 하며 네팔이 열악한 교육환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문제가 있는데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 아팠다.
드디어 마낭에 도착! 해발고도 3500미터에 위치한 마낭 디스트릭트의 중심지 마낭. 트레커들의 편안한 안식처이자, 트레킹 코스의 정상, 토롱라를 향한 전진기지가 되는 곳. 다른 곳과는 다르게 이틀을 머물러서 가는 곳. 마낭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려주는 문을 통과하고 나니 왠지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러나, 막상 마을에 탁 들어서고 보니 맥이 탁 풀렸다. 아무리 둘러봐도 말 2마리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을 가진 길을 중심으로 200여 미터 펼쳐져 있는 작은 마을. 내심으로는 과일주스를 파는 시장도 있고, 꼬치구이에 맥주 한잔을 들이킬 수 있는 노천카페의 낭만도 상상했는데, 에게게... 마낭을 출발하기 전 씨버의 기름칠은 다 뭐람?!
“마낭가면 없는 게 없다. 필요한 거 다 살 수 있다아~~”
막상 도착하고 보니 개뿔. 거쳐온 마을과 다를 바 없는 소박하고 작은 마을.
▲ 마낭 전경.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사이즈는 작은 마을이었다. 첫인상은 당연히 실망. 그런데, 반전이!!
실망한 마음을 제쳐두고 롯지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오늘의 반전은 점심식사부터 시작되었다. 일단 메뉴가 고급지다. 마늘 수프와 버섯 버거. 와우~~ 버거, 버거라니!!! 마낭 코스모폴리탄 유니버스 따봉!! 수프 따위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마늘 수프가 고산병에 좋다고 씨버가 내 귓방망이에 대고 며칠 동안 주입하는 바람에 곁들이로 주문했다. 다행히 아직까지 특별한 고소증세는 없었다. 다만, 건강의 3척도인 쾌식, 쾌변, 쾌면 중 쾌면 쪽에 살짝 문제가 있긴 했다. 이틀 전부터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있었고, 꿈자리가 다소 뒤숭숭했다. 살면서 어떤 고민이 되었든 그 고민으로 밤잠 설치는 경험을 한 번 해보고 싶을 정도로 잠을 못 이기는 몸뚱이를 지니고 태어났는데, 이 곳에서는 숙면에 살짝 문제가 있었다. 마늘 수프가 어떻게든 해결해 주겄지! 버거와 수프는 입에 착착 감겼다. 고도 3500미터에, 수일 동안 노새를 끌고 식자재를 공수해 와야 하는 이런 곳에서 이런 퀄리티의 음식이라니! 감격 한 방이 뚱띵이의 아랫배를 강타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핫 샤워 한판! 뜨거운 물이 콸콸~ 끝내주게 나온다. 몸이 흐물흐물 녹아난다. 뜨끈뜨끈한 물이야말로 트레킹 중 최고의 마약. 쏴아아~ 샤워기에서 나오는 뜨신 물로 몸을 적시니 거의 환각상태에 이른다! 반전의 절정이었다.
다음 사람을 위해 최대한 짧게 해야 했지만, 양심의 허용치 내에서 최대한 오랫동안 했다. 샤워르가즘이 온몸을 휘돌았다. 앞으로 마낭을 떠나면 대략 5,6일은 샤워를 하지 못한다. 3500미터 이상부터는 샤워는 물론 머리 감는 것도 조심해야 하기 때문. 또한 롯지에서 뜨거운 물도 안 나오는 데다 자칫 찬물로 했다가 감기로 인한 고산병에 걸릴 수 있다. 이렇게 느릿느릿 핫 샤워를 마치니 황제가 된 기분이 들었다. 로마 황제처럼 남자의 심볼을 내놓고 덜렁덜렁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업! 되었다.
씨버는 밥을 먹고 마을 사람들과 카드놀이에 열중이다. 함께 마실을 나가려고 했으나 카드놀이를 더 하고 싶다는 무언의 눈빛을 보내는 씨버. 결국 혼자 롯지 밖으로 나왔다. 사실 혼자 다니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긴 했다. 이탈리아 친구 루카는 벌써 놀러 나간 듯했다.
양촌리 이장님처럼 뒷짐을 지고 찬찬히 마을을 둘러보았다.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니 풍경에서의 반전도 일어나며 서서히 마낭의 위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조금 높은 곳에 올라서니 안나푸르나와 강가푸르나의 육중한 몸체와 강가푸르나 빙하로부터 흘러나온 물로 형성된 커다란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고산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평탄하고 너른 지형을 가져 촌락을 이루기에 좋았다. 백호 (안나푸르나) 와 봉황 (마낭 피크) 이 마을을 양옆으로 호휘하고 살찐 젖소 (호수와 강)가 풍요로움을 더해주는 마을이랄까. 감동적인 버섯 버거와 핫 샤워 뽕에 더해 완벽한 풍경까지 감상하니 미친 듯이 마낭이 좋아진다. 게다가 구석구석 다녀보니 씨버 말대로 없는 게 없다. 병원, 박물관도 있고 프로젝터로 비디오를 틀어주는 작은 극장도 있었다. 게다가 자체 베이커를 지닌 롯지들이 많아 빵과 야크 치즈가 넘쳐난다. 갓 헤븐!
▲ 허술해 보여도 없는 것이 없는 쇼핑몰 거리
▲ 마을 병풍처럼 서 있는 강가푸르나 빙하. 클래스가 다르다!!
이런 천국을 한참 만끽하고 있는데 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다. 바로 루카와 징쯔이. 하하! 키가 큰 루카 옆에 착 붙어 다니는 징쯔이. 딱 봐도 루카한테 호감이 있는듯 했다. 그렇다면 루카의 마음은? 예상했던대로 새드엔딩. 루카와 나는 같은 롯지에, 징쯔이는 다른 롯지에 묵었는데 다음날 아침 징쯔이가 우리 롯지에 놀러 왔다. 마침 차를 마시고 있는 루카에게 같이 마실 나가자고 물었는데 (사실상의 데이트 신청) 현장에서 바로 거부당했다. 이때만큼은 징쯔이가 너무 딱해 보여, 먹고 있던 빵이라도 주고 싶을 정도. 그 이후로 루카와 징쯔이는 만나지 못한다. 뭐, 징쯔이도 나처럼 이런저런 까임을 당하면서 강하게 자라겄지…
마낭은 안나푸르나 라운드의 최고점인 토롱라를 바라보는 기준으로 왼편에는 안나푸르나 형제들이 오른쪽에는 마낭피크가 보인다. 고소 적응을 위해 오늘과 내일 양쪽으로 각각 한 번씩 올라보기로 한다. 오늘은 마낭피크쪽. 한참을 걸었다. 백여 미터 정도 올라왔다고 느끼는데,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풀 뜯는 소나 말이 드문드문 있을 뿐이었다. 시간도 꽤 흘러 어둠이 찾아오고 있다. 완벽했던 풍경이 좀 스산하게 느껴 지진다. 그런데, 그 스산하던 풍광 속에 한참을 서 있으니 범접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아니, 그 아름다움이 드러났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영겁의 시간 속에 존재하다 바스러질 내 자리와 시간의 무심한 찰나가 무서워졌다. 겁이 덜컥 났다. 허무한 것 까지는 아니지만 슬픈 감정이 들었다. 호사스러운 풍경 앞에 느닷없이 슬픔이라니... 웬 청승? 자꾸 마음을 다잡아보려 했는데, 그럴수록 더 슬퍼졌다.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잠자코 산만 바라볼 수밖에.
마을로 내려오니 배가 고팠다. 저기서 나를 찾는 듯한 씨버의 모습이 보인다. 하긴 점심 먹고 여태 싸돌아다니고 있으니 조금 걱정은 되었겠지. 날 찾더니 대뜸 어딜 갔냐며 살갑게 군다. 며칠 동안 괴롭히던 목디스크며 조금 전의 멜랑꼴리한 감정이 겹쳐 나도 모르게 냉랭하게 대했다.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더니 롯지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씨버. 난 좀 더 구경하다가 밥 먹겠다며 씨버를 먼저 보냈다. 동네 어귀를 어슬렁거리니 마침 동네 총각들이 제기차기를 하고 있는 것이 보여, 꼽사리를 껴서 같이 찼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차는 동작과 속도가 모두 날래고 빠르다. 리듬을 맞추지 못해 헛발질을 연신 해대니 모두가 웃는다. 젠장, 몸이 둔해져도 여간 둔해진 게 아니다. 적당히 차다가 빠져서 롯지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었다.
씨버, 루카, 가니시와 함께 있으니 조금 전 우울해졌던 마음이 풀어지는 듯하다. 사실 음식이 위로해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레몬티, 치킨커리, 브라우~니!!
가니시, 씨버, 루카와 함께 실컷 떠들다 잤다. 롯지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식당에서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논다. 대략 9시 정도까지 모닥불을 피우는데 그게 꺼질 때쯤이 취침 시간. 우리는 마지막 남은 장작 한 개가 꺼질 때까지 놀았다. 미친 듯이 웃고 떠들었다. 나의 찰나는 이렇게 변화하고 바스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