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한 모국어를 하다"
▲ 트레킹 내내 생각했다. 저 꼭대기에 홀로 서면 얼마나 외로울까? 으스스한 열망.
어제는 트레커 2명이 각각 다리 통증과 고소증세로 인해 아랫마을로 내려갔다고 한다. 본격적인 고소증세가 시작되는 지점에 온 것이다. 나에게는 이렇다 할 증세는 없었다. 목디스크로 인한 불편은 고소증세와는 큰 관계는 없어 보였다. 히말라야 귀신도 보게 된다는 환각증세를 겪으며 살인적인 추위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토롱라 정상을 죽을똥 살똥 넘으며 인간 승리를 경험하겠다는 초딩적 낭만은 물 건너갈 듯하다. 내가 나름 고도에 잘 적응하는 것 같고. 뚱띵이의 두꺼운 지방층도 추위와 바람을 제대로 보호해 주고 있으니. 게다가 눈보라는커녕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까지 한몫 더한다. '사서 고생'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너무나 순조롭게 진행되는 트레킹에 "불만 있습니다!"라고 투정 부리는 순간,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는데.. 이 이야기는 이틀 후에!
상콤한 아침이다. 목의 통증도 아침이면 한결 괜찮아진다. 커튼 열고 창문 밖을 내다보니 오늘도 여지없이 햇살이 촤르르르!
씨버와 굿모닝을 하고 너스레를 떨어본다.
"씨버! 네팔 왜 이래? 왜 이렇게 맑기만 한 거야?"
"케니! 지금은 건기야. 비 안 와. 한마디로 너 럭키야!"
"됐고! 눈 한 번 맞아보고 싶은데 어케 안 될까?"
"(이런 족밥을 봤나?) 눈 오면 캐고생인데?"
"토롱라 넘을 때 눈 좀 오게 해 주면 안 돼? 너 씨바 신이잖아"
"(이 생퀴가 쳐 돌았나?) 오케이. 히히!"
하긴 씨버는 토롱라를 10번 넘게 넘었고 지금보다 더 추운 1월에도 넘어봤으니 아침부터 흰소리를 해대는 내가 철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실없는 소리를 계속했다가는 꿀밤이라도 때릴 태세. 그래도 씨버 임마! 내가 너보다 10살은 더 먹은 형이야!
▲▼ 마낭의 아침 풍경. 아침 햇살 받은 봉우리들을 보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면 곧바로 쾌변 신호가 뜬다. 건강한 일상의 시작!
오늘은 고소 적응을 위해 마낭에서 휴식을 취한다. 트레킹을 떠나기 전날 카트만두의 여행사 사장님도 마낭에서만큼은 꼭 하루 쉬어가라고 했다. 요컨대 까부는 것은 좋은데, 적당히 쉬면서 까불라는 얘기. 실제로 어제 낙오한 사람들처럼 자신의 평소 체력과 당장의 컨디션만 믿고 휴식일도 없이 무리하게 움직이다가 낭패 보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한다. 오늘 만났던 풍차국 부부 (정확하게는 남편)도 위태위태해 보였다. 그들과는 게르무에서 같이 숙박했었는데 마낭에서 (역시 마낭은 만남과 사교의 장!!)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오늘 도착한 이들은 고소 적응 없이 바로 다음날 하이캠프(4900미터)로 직행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부인은 상태가 괜찮았지만 남편은 며칠 사이 좀비가 되어버렸다. 딱 봐도 고소 먹은 얼굴. 위쪽이 아니라 당장 아랫마을로 가야 할 몰골을 보니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 한마디 했는데 어깨만 으쓱. 아마도 내 말을 무시하고 진행할 셈인가 보다. 얼굴은 저래도 서양인 특유의 하드 바디가 받쳐준다면 무사하겠지… 란 생각을 하며 무사안녕을 빌어주었다.
이제껏 가장 여유로운 아침식사를 했다. 내가 묵는 롯지는 자체 베이커리가 갖추어진 곳. 당연히 커피와 크로와상으로 아침을 시작해야지. 제대로 된 된장질을 위해 우아하게 조금만 먹었다. 그러고 몇 시간 만에 큰 후회를 하는데...
오늘도 어제처럼 쉬엄쉬엄 혼자 쏘다니고 싶었다. 어제와 반대방향으로, 즉 안나푸르나와 강가푸르나 빙하 쪽을 둘러볼 생각이다.
“씨버, 오늘은 좀 쉬어. 나 혼자 다녀올게!”
“노노! 같이 가! 혼자 가면 정 없어!”
“아냐, 힘들게 왜 그랴… 쉬어!”
“노노! 위드 미~”
굳이 길안내까지 해주며 같이 가겠다는 씨버. 무슨 꿍꿍인가 싶었다. 아마 철없는 내가 어디 가서 사고라도 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긴 겁은 많은데 호기심도 많은 나 같은 애들이 사고를 많이 친다. 아무튼 씨버와 함께 느긋하게 산책이나 다녀올까.. 하며 기지개를 켜는데 징쯔이가 우리 식당으로 들어온다. 씨버와 나를 슬쩍 보더니 개나 소 보듯 지나치고 바로 루카에게 다가가서 데이트를 신청한다! 단호박 루카, 바로 거절. 주위에 찬바람이 쌩쌩. 여유 있는 표정의 루카를 제외하면 식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얼어붙었다. 나 같으면 싫더라도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횡설수설할 텐데, 루카는 단호하다. 그냥 싫다고 노!! 솔직히 놀랐다. 이 모습을 보고 슬그머니 롯지 밖으로 나와 씨버와 함께 깔깔대며 웃었다. 나름 징쯔이를 마음에 들어했던 씨버는 한 번 더 웃었을 것이고. 무안을 당한 불쌍한 징쯔이. 그렇지만, 몇 시간 후 카페에서 인도 왕자 몇몇과 어울려 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하! 그런 거 구만. 반전 혹은 반복.
▲▼ 고소 적응을 위해서 쉬는 날에도 살짝 높은 곳에 올라가면 좋긴 하다. 이 길을 따라 쭉 걸으면 강가푸르나 빙하지대로 갈 수 있다.
▲ 어린 소녀가 메기엔 무거워 보였지만 거뜬 없었다.
▲ 오늘 오르는 코스의 반대편에는 마낭 피크가 우뚝.
▲ 강가푸르나 빙하지대. 매끈하고 하~얀 극지방의 빙하가 아니다. 암회색의 지저분하고 거친 느낌.
▲ 혼자 가겠다는 나를 굳이 따라온 씨버. 점점 초췌해져 간다. 결국 오늘 강철체력 씨버도 퍼졌다. ㅎㅎㅎ
▲ 안나푸르나 라운드 코스의 정상인 토롱라 방향
▲ 대책 없는 몸뚱이에 못난 컨셉까지
가벼운 배낭을 지니 걸음이 경쾌해진다. 땀도 별로 안 나고. 성큼성큼 올라가니 꽤 높은 지대까지 올랐다. 우리처럼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발아래 점으로 보일 만큼 올라왔으니 소풍 치고는 조금 무리한 셈이다. 씨버도 그만 내려가고 싶은가 보다. 모른척하고 더 올라갔다. 한참 걷다가 참다못한 씨버가 묻는다.
“어디까지 갈겨?”
“쪼기~~”
대강 손가락으로 산 위쪽을 가리키니 한숨짓는 씨버. 평소에 잘 걷는다 칭찬해 주니까 이 뚱띵이 형이 정신 못 차리고 까부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거운 배낭 대신 씨버의 따가운 눈총을 등판에 받아가며 계속 걸었다. 다른 트레커 무리들이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올라오니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평평한 지대에 이른다. 씨버 말로는 안나푸르나 3봉의 베이스캠프라는데, 구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없고 그냥 평평하기만 했다. 대충 베이스캠프라고 말하면 이만하면 됐다며 그만하자고 내가 말할 것이란 계산도 섰을 것 같고.
“더 올라갈 거야?”
“당근이지”
주먹만 안 들었지, 이미 마음속으로는 나를 쥐어 패고 있는 씨버.
“야 씨버야. 힘들면 쫌만 쉬어. 나 혼자 올라갈게”
“오케이”
보란 듯이, 대자로 벌떡 풀숲에 누워 낮잠 모드로 돌입하는 씨버.
어라… 빈말인데… 도로 담을 수도 없어 씨버를 두고 출발. 뭐, 어차피 혼자 오려고 했던 건데.. 상콤한 기분을 애써 되살리며 걷는데 슬슬 불안해진다. 정해진 길도 없는 데다 경사는 점점 급해진다. 두 손까지 사용해서 기어가듯 올라가다 보니 본격적인 덤불 지대에 들어섰다. 불안하지만, 호기심은 계속 피어난다. 최대한 높이 올라가 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 정도 걸었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는 황량함 그 자체. 마낭은 까마득하게 보이고 사람은커녕 생명체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 날카로운 바람이 쌩하고 불어온다. 밑에 있던 바람과는 차원이 다르다. 어찌나 차가운지 얼음조각이 볼 따귀에 박히는 듯했다. 덜컥 겁이 났다. 혼자 가겠다는 날 걱정하는 씨버에게 혹시 저 위에서 설표라도 만나게 되면 한쪽 팔만 떼주고 목숨은 건지고 오겠다는 개드립까지 날렸는데, 진짜 뭐라도 튀어나올 분위기. 게다가 된장질 하느냐 아침을 적게 먹어 배가 고파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미친 짓을 했는가 보다… 후회막심. 부리나케 뛰어내려왔다. 그렇게 한참을 뛰어 내려와도 헐!! 씨버가 보이지 않는다. 길이 나지 않은 곳을 지나왔으니 대강 감을 잡아 내려가야 했다. 30분을 넘게 이리저리 헤매며 내려오는데 씨버의 머리가 멀리서 보였다. 살았군… 씨버도 내가 걱정되었는지 서성대며 이리저리 나를 찾고 있는 듯했다. 목숨을 건지고 보니 장난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좀 숨어있다가 본격적으로 씨버가 나를 찾아 나서려고 할 때, 짠~ 하고 나타날까.. 란 생각도 들었는데 그러기엔 배가 너무 고팠다.
▲ 퍼진 씨버. 씨버 말에 의하면 이 곳이 안나푸르나 3봉의 베이스캠프.
▲ 길도 없는 곳을 호기심에 마구 올라가버린 곳
씨버와 극적으로 상봉하고 배고프고 지친 우린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내려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배도 불렀겠다, 기분 좋은 낮잠 모드로 돌입한다. 카페 의자에 앉아 끔뻑끔뻑 졸기 시작하는데 좀 전의 그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맴돈다. 더 올라가 봤어야 했나… 조금만 더 오르면 만년설을 밟아볼 수 있었을 것 같다는 망상도 들었다. 귀여운 설표도 만나 볼 수 있었을 테고. 차가운 바람 한 방에 겁먹었던 자신을 힐책하며 편한 의자에 기대어 한참을 잤다.
▲ 가슴이 뻥 뚫린다아~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는데 마낭으로 입성하는 한 동양인 무리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중국 사람들인 줄 알고 그저 지나치려 했는데, 대화를 들어보니 한국인들. 반가운 마음에 촐랑대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우와! 반가워요”
“……네…”
와! 이런 싸가지들을 봤나. 귀찮아하고 무성의한 응대에 욱! 했지만, 어쩌랴.. 싸가지 없어도 동족인걸. 다시 비굴 모드로.
“괜찮으시면 저녁이라도 함께…?”
내가 비굴한 모드로 나갈 만큼 자국민들을 만난 게 반갑긴 했다. 결국 그들이 묵는 롯지에서 저녁을 함께 먹게 되었다. 남자 5명에 여자 2명. 각기 따로 여행 왔다가 포카라에서 만나 계속 같이 움직였다고 한다.
저녁을 먹으며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려 하는데, 신기하게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취한 상태에서 혀가 꼬여 말하는 것처럼 나오는 것이다. 내 입안에서 나오는 어눌한 모국어에 충격받아 정신 차리고 집중해서 제대로 말하려고 해도 좀처럼 제대로 된 한국어가 나오지 않았다. 우리말 안 쓴 지 일주일 만에 이런 참사가 오다니...
한참을 버벅댄후에야 혀가 풀리기 시작하고 그제야 대화가 편해지고 재밌어진다. 그 와중에 같이 내일부터 함께 할 동행자도 구했다. 나는 마낭에서 바로 토롱라로 가지 않고 틸리초 호수를 갔다가 다시 내려와 토롱라로 향할 예정이었다. 틸리초 얘기를 꺼내자 무리 중 재민이라는 청년이 같이 가자고 나선것. 오케이!! 일정을 맞추고 그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다 보니 시간이 벌써 9시… 갑자기 루카가 보고 싶어 부리나케 내가 묵는 숙소로 왔는데, 이미 불 꺼진 주방과 불 꺼진 방. 오늘 하루가 이렇게 불이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