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8 ; 마낭에서 실리가르카까지

"동침의 괴로움"

by 블랙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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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의 첫날, 한눈에 봐도 방이 20개는 넘을 만한 대저택 같은 신축 롯지에서 묵었던 트레커는 나, 루카, 재민. 씨버와 가니시를 포함하면 5명이서 전세 낸 셈이였다. 무엇보다 여주인은, 참으로, 이뻤다!


씨버 왈, "케니! 이거 알아? 틸리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호수야(4900미터)"


네팔인들의 흔한 높이 부심을 부린 곳, 틸리초를 향해 길을 나섰다. 훗날 이야기지만 인터넷에 ‘가장 높은 호수’라고 검색해보니 다른 호수들만 주르륵 나왔다. 결과적으로는 구라였지만, 다른 의미의 결과적으로 착한 구라였다. 그 구라에 홀려 다녀왔으니까. 구라를 동반한 씨버의 뽐뿌질도 있었고, 틸리초를 둘러싼 6,7천 미터급 설산을 눈앞에 가까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트레킹 첫날부터 틸리초 노래를 불러댔다. 다만 겨울철에는 길을 폐쇄할 정도로 길이 험했고 전체 라운드 일정 중 2,3일은 빼야 한다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는데... 시간은 차고 넘쳤고, 안전도 그리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여행 책자에 나온 문구들, 이를테면 ’다소 위험하니 주의가 필요함..’ 또는 ‘…안전을 위해서 피하는 것도 좋다…’ 정도로 소개된 곳은 실제로는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진짜 위험하면 아예 책자에 소개되지도 않을 것이고, 설령 있더라도 '죽더라도 책임 못 짐' 같은 무시무시한 경고가 붙어 있을 것이다. 자칫 애매하게 소개했다가 낭패 본 여행자들에게 고소당할 수도 있을 테니. 책자에 소개된 틸리초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실리카르카란 마을로, 신축 롯지가 2개 들어서 있는 최근에 형성된 마을이다. 론리플래닛에는 틸리초를 다녀오기 위한 표준코스로 캉사르-틸리초베이스캠프-캉사르 여정의 2박 3일 코스만 소개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린 캉사르 다음 마을인 실리카르카에서 1박 하고 가벼운 짐만 꾸려 하루에 틸리초를 왕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겨울 시즌에는 틸리초 베이스캠프가 폐쇄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가보니 식당만 영업하고 실제로 폐쇄되어 있었다.) 캉사르에서 하루 만에 왕복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캉사르에서 두어 시간 더 걸어 도달한 실리카르카는 론리에도, 트레킹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마을이었다. 즉, 알만한 사람만 가는 곳. 당연히 씨버의 안내로 가게 되었는데, 가는 내내 자신이 실리카르카를 잘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랑질을 어찌나 해댔는지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였다. 뭐, 그래도 씨버, 니가 짱이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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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낭 숙소 앞의 개와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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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낭에는 자체 베이커리를 갖추고 있는 롯지가 정말 많았다. 또한 이 곳의 커피 맛은 기가 막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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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오른쪽 양반이 내가 묵은 롯지의 사장님.타이거 JK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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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 헤븐, 마낭이 멀리 보인다. 실리카르카를 향해 가면서도 연신 뒤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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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색해할 줄 알았는데, 만난 지 몇 분 만에 친해진 씨버와 재민. 붙임성 좋은 씨버와 둥글둥글한 성격의 재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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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사르에 도착, 점심을 먹기로 했다. 지금껏 내 음식 선택의 운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무난하게 딸밧을 먹거나, 딸밧이 싫증 나면 메뉴판 젤 위쪽의 대표음식을 먹었다. 안전한 선택이니만큼 다들 먹을만했다. 불불레의 모모, 짜메의 빵장, 마낭의 버섯 버거와 크로와상은 감동 이상이었고. 그런데, 이 곳에서 평생 잊지 못할 핵폭탄을 맞고 말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판은 본척만척 재빠르게 볶음밥과 딸밧을 시키는 씨버와 재민. 나는 쭈욱 메뉴판을 훑어보다가 "어머! 이건 먹어야 해!" 소리가 절로 나올 메뉴를 발견. 바로 '까르보나라 스파게티'였다. 우왕! 이런 곳에서 깔보나라를 먹게 되다니. 감격에 겨워 바로 주문했다.


- 밀크는 야크 젖을 사용했을까? 혹시 귀하다는 산양 젖으로?


- 면은 직접 뽑나? 아니지, 사서 쓰겠지. 옘병, 유난 떤다! 밀가루로 만든 국수가 거기서 거기지.


- 이 곳에선 돼지는 별로 보이지 않던데.. 돼지 베이컨 대신 다른 뭔가를 넣으려나? 양고기? 쇠고기?


- 바보야! 문제는 쏘스지! 생크림과 치즈만 듬뿍 넣고 볶아줘도 그게 어디야?!


-근데..왤케 안 나오는 거야? 오늘 안에 먹을 수는 있는 거야?


혼자 온갖 망상에 빠져 있는 사이 씨버와 재민이의 음식은 나왔고 어느새 두 명은 말도 없이 뚝딱 해치웠다.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주문한 깔보나라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닦달할 웨이터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고프다 못해 아픈 배를 움켜쥐고 주방으로 쳐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떡인지 면인지 알 수 없는 불어 터지고 떡진 덩어리가 한편에 놓여있다. 오케바리.. 거기까지는 그래..참을 수 있었다. 쏘스! 쏘스는 어디 있는 거야? 두리번거리는데 잔뜩 쫄은 표정의 여주인이 날 보고 배시시 웃는다. 그리고 고백했다.


"까르보나라 만들 줄 몰라요..미안해요"


철푸덕. 마음 한쪽이 무너졌지만, 가까스로 추스리며


"그렇다면 토마토소스라든가, 뭐 그런 걸로 비벼라도 주세요"


난감한 표정을 짓는 주인장. 결국 찬장에서 주섬주섬 깡통 하나를 꺼내더니, 그 통에서 표면이 누렇게 뜬 뻘건 액체를 몇 스푼 덜어내 불어 터진 면에 비벼댄다. 비볐다기보다는 발랐다고 해야 맞겠다. 그러더니 배시시 웃으며 나에게 접시를 건넸다.


그렇지만 이미 식욕은 저 멀리 날아갔고 괴상망측한 음식을 받아 들고 황당한 표정만 짓고 있으니 주인은 미안하다면서 또 웃는다. 웃는 얼굴에 화 낼 수도 없어 접시를 들고 나와 떡진 면을 잘라먹는데... 우왕! 충격과 공포. 토마토 소스도 아니고 케찹도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쏘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퀘퀘하고 누린 맛.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맛이 아니었다. 이 천상의 맛을 혼자 맛보는 게 억울해 씨버와 재민이에게 한 입 먹어보라고 권했는데 다들 비쥬얼을 보더니 단호하게 거절. 그 와중에 어느새 여주인이 주방에서 나와 겸연쩍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억지로 1/3 먹고 포기. 이번 트레킹 중 압도적 워스트 1위 음식. 한국이었으면 진심, 주방장 귓방망이를 날렸을 것이다.



마낭에서 실리카르카까지는 고도차가 대략 500미터로 제법 많이 올라가야 했다. 몸이 긴장할 법도 한데, 어제 강가푸르나 방향으로 충분히 올라가서 고도 적응을 한 데다 주변 풍경이 끝장나게 아름다워 내 몸뚱이 따위는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씨버가 추임새를 넣는다.


“경치가 아름답기로는 실리카르카 마을이 최고지. 안나푸르나 전체 마을 중에서도 단연 탑 오브 탑!!”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제껏 보지 못한 안나푸르나 설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마을이 이 실리카르카였다. 최고의 선택이라면서 연신 감탄을 하는 재민. 이 녀석은 마낭에서 하루 휴식도 없이 올라오는데 꽤 잘 걸었다. 첫인상은 뭔가 어설퍼보이고 약해 보였지만, 점점 볼수록 강인하고 끈덕진면이 있었다. 또한 자기 내면의 욕망도 잘 읽고 솔직하게 그것에 따라 과감하게 행동할 줄도 아는 멋진 놈이었다. 나보다 낫군. 어린 노무 자식이. 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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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00미터 이상의 설산과 마을 사이에는 깊은 협곡이 흐르고 있다. 이 협곡을 옆에 끼고 마낭에서 실리카르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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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민이도 루카만큼 사진에 열정적이었는데, 실력을 더 쌓아 지금은 유명한 여행 촬영 전문가가 되었다. 트레킹 첫날부터 독수공방 하다가 이날부터 재민이와 방을 함께 쓰게 되었다. 여행 이야기나, 여자 이야기나, 여행에서 만난 여자 이야기나 하며 시시덕거리다가 자려고 했는데 재민이가 폭풍질문으로 나를 괴롭혔다. 시시콜콜한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예를 들면 "형, 서울 사람들은 뭐 먹고살아요?" 같은. 태어나서 서울에 한 번도 오지 못해 서울에 대해 궁금한 것은 알겠는데 서울 토박이인 나도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싶은 난처한 질문들을 쏟아낸다. 아무튼 호기심 천국의 질문왕을 만나 대답해 주다 보니, 자기 전 입안이 바싹 말라버릴 정도. 요즘엔 세계 곳곳을 누비는 재민과 연락이 닿을 때면 내가 먼저 묻는다. "재민아, 키르기스탄 사람들은 뭐 먹고 사냐?"



실리카르카에 도착, 깨끗하고 넓은 신축 롯지에 들어섰는데 손님이 우리뿐이었다. 게다가 여주인이 볼수록 매력 있었다. 씨버도 여주인이 이쁘다는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나를 보고 웃었다.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민망해서 대충 끄덕여줬는데, 내 맞장구가 약했는지 씨버가 조금 삐진 표정을 짓는다. 사실 씨버의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부터 재민이와 같이 다니게 되어 씨버보다는 재민이와 주로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가 좀 소외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씨버와 이야기하면 재밌기는 했지만 그의 네버엔딩 수다에 지친 것도 사실이었다. 인도식 억양과 특유의 빠르고 중얼거리는 영어도 알아듣기 힘들었고. 아무래도 징쯔이가 같이 왔어야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반대로 씨버가 나를 철저히 방치했을 것이고 거꾸로 내가 삐졌..아니 사실은 자유로웠겠지 ㅎㅎ. 다행히 오늘은 종종 루카, 가니시가 씨버의 좋은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밤에 작은 소동이 있었다. 저녁을 먹고 놀던 와중에 오줌을 누러 마당으로 나왔는데 쿰척쿰척하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살금살금 가보니 어둠 속에서 야크가 콧방귀를 껴대며 대가리를 바닥 쪽에 대고 끄덕거리고 있다. 뭔 짓을 하고 있나 싶어 가까이 가보니 마당에 펼쳐놓은 말린 마늘을 먹고 있었던 것. 내가 오는 줄도 모르고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허허 이 놈 보소. 저러다 애써 주인이 말려놓은 거 다 처묵겠네… 빠른 신고가 필요한 듯하여 주인에게 이야기하니 주인도 총알같이 튀어나와 소리를 질러대며 야크를 쫓아낸다. 부리나케 달아나는 야크. 주인은 마당 문을 자물쇠로 단단히 잠근다. 나는 호기심이 일어 담을 너머 도망간 야크를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영원히 사라질 것처럼 쇠 빠지게 튀어 도망가던 그놈이 문에서 약 30미터 떨어진 풀숲에 웅크리고 앉아 재침입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게 아닌가? 성격이 당돌한 놈이거나, 배가 너무 고픈 놈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덤불 뒤에서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고 있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몰래 다가가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그놈을 관찰하려고 했으나, 주위가 너무 어두웠고 더 다가갔다가는 배고픈 야크에게 해코지라도 당할 것 같아서 쭐래쭐래 되돌아왔다. 굳게 잠긴 대문을 보게 된다면 야크가 얼마나 애통해할런지..그깟 육쪽마늘 때문에 이리 구박받는 게 불쌍하기도 했다. 배고픈 이 야크, 내세에는 경북 의성에서 사람으로 태어나 마늘이라도 실컷 먹게 되기를 빌어본다. 옴마니밧메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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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크의 별미식 마늘, 아니면 발기불능 야크의 고육지책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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