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9 ; 틸리초 왕복

"고소당하다"

by 블랙베어


새벽 6시. 재민이와 함께 씨버를 기다리며 식당에 앉아 있었다. 이미 똥 싸고 밥 먹고 짐 싸고 준비 완료. 오늘 하루 만에 틸리초를 왕복으로 다녀오려면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쉴 새 없이 걸어도 족히 10시간은 걸리는 길이다. 게다가 위험한 구간도 있어 날씨라도 나빠지면 지체되고 고립되어 조난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한시라도 일찍 출발하는 것이 좋다. 루카와 가니시는 이미 한 시간 전에 출발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는데 씨버가 어슬렁어슬렁 거리며 등장. 어설픈 한국말로 천역 덕스럽게 한 마디 한다.


"안, 녕 하시요! 좋은 아침!"


이 자식이!! 늦었는데 천하태평이네. 한 술 더 떠 조금만 기달려달라고 한다. 보아하니 가기 싫은 표정이 역력하다. 기다렸다가는 너무 늦어질 것 같다. 에이 니기미 뿡! 씨버, 너 없이 간다.


씨버는 미안한지 대문 바깥까지 나와 배웅해주는데 여전히 잠이 안 깬 표정. 사실 틸리초까지는 외길인 데다 짐도 거의 없어 씨버가 굳이 같이 갈 필요는 없었다. 씨버도 이걸 알고 있었을 것이고, 포터나 가이드로써의 직업적 의무감도 덜했겠지. 그간 이래저래 신경 쓰느냐 피곤하기도 했을 것이고. 난 씨버를 포터나 가이드로써가 아닌 친구로서 동행하고픈 마음이었는데, 쉬고 싶어 하는 씨버의 마음까지는 헤아리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티 나게 늦장 부릴 것은 뭐람. 이런저런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틸리초에 대한 기대감으로 다 털어내고 경쾌하게 출발!



초반 두 시간 남짓한 산행길은 완만하고 평탄했다. 이건 뭐, 소풍이네! 발걸음이 가볍다. 풍경은 최고다. 고개를 하나 넘을 때마다 틸리초를 둘러싸고 있는 7000미터급 3개의 봉우리의 모습도 점점 가까워진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로 인해 컨디션은 최상. 이 모든 게 축복이네. 그야말로 완벽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었다. 그렇지만, 뭐 두고 봐야지. 좋다가도 좆치 않을 수 있으니. 내 인생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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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햇살을 받은 빨래에서 익어가는 빵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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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많은 출렁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만큼 길이 외지고 살짝 위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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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에서 숱한 야크들을 만났다. 이 놈들은 우리가 지나가면 옆으로 비켜나 살짝 길을 터준다. 생긴 거에 비해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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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허리 깨쯤에 난 작은 길을 따라 틸리초를 향해 걸었다. 초반에는 폭도 꽤 넓고 평탄했지만, 나중에는 으익! 하고 쫄았던 좁고 위태로운 길도 등장한다. 며칠 전 마낭에서 만난 한 부부도 길이 너무 무서워서 중간에 포기하고 되돌아왔고 할 정도.그 말 듣고도 설마 했는데 몇몇 구간에서는 진짜 후달렸다. 사진도 제대로 못 찍고 그저 빨리 통과하는데 급급할 정도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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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좁은 길을 따라 내려오는 재민이. 옆은 까마득한 절벽인 데다 마른 흙길은 미끄러워 조심해야 했다. 게다가 물집으로 인해 발바닥은 이미 만신창이. 어설펐지만, 근성 하나만은 최고다. 훗날, 근성가이 재민이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진짜 8848미터 정상) 우뚝 서게 된다.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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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찔하고 위험해도 매력적인 길임에는 틀림없다. 감동에 차서 눈물이 살짝 났다. 부을 대로 부은 얼굴에 즙이나 짜고 있는 게 등신 같아 보였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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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출발한 루카와 가니시를 도중에 만났다. 힘들어하는 우리와 달리 이들의 표정은 평온 그 자체.




한참을 가다 보니 "미끄럼 주의" 푯말이 나타난다. 어라? 여태껏 떨리는 무릎 부여잡고 '씨바..이러다 조때는거 아녀..' 를 몇 번이나 내뱉으며 좁은 낭떠러지 길을 걸어왔는데 여지껏 지나온 길보다 훨씬 더 무서운 길이 있다는 거네?! 이건 뭐 후퇴하라는 거야, 뭐야? 그러나. 잃은 것도 별로 없는 삶. 재보고 생각하고 주저하는 것도 덧없고 귀찮다. 그냥 가면 된다. 나도 안다. 절대로 추락하지 않으리란 법도 없지만, 반드시 떨어지지도 않을 거라는 걸.



조금 떨리긴 했지만, 어찌 되었건 즐겁게 통과. 즐겁게 통과하는 데는 재민이가 일조했다. 나보다 더 긴장했는지 거의 기는 수준으로 걸었는데, 그게 뭐라고 계속 웃었다. 잠시 내가 살짝 맛이 갔나 보다. 미끄럼 구간을 통과하니 본격적으로 가파른 오르막이 나타났다. 진절머리 나는 오르막. 위험한 구간을 통과하고 나니 긴장이 풀렸고, 긴장이 풀리니 지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속도를 늦출 수도 없다. 여기서 지체했다가는 해가 진후에 미끄럼 주의 구간을 통과할 수도 있고, 그건 너무 무서운 일. 그렇다고 틸리초를 포기할 수는 없기에 재민이와 말수를 줄이고 걷는데만 집중했다. 틸리초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여, 가져온 비스켓만으로 간단히 요기하고 바로 출발. 이 날, 인생 과자를 만났다. 워커스 숏브래드. 재민이가 포카라에서 잔뜩 싸가지고 와서 나눠먹었는데 천상의 맛이었다. 놀랍게도 영국산. 음식, 여자, 축구에 관한 최악의 나라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런 맛난 과자도 생산할 줄 알고, 흠..뜬금없는 영국의 재발견.



인생 과자를 먹으니 힘과 정력이 샘솟!! 정력은 쓸데가 없으니 오롯이 걷는데만 힘을 쏟으면 된다.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니 눈 앞에 목적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별거 아니겠구만.. 생각하며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어,어, 뭔가 이상하다. 발걸음이 잘 떼어지질 않는다. 일단 다리가 천근만근에 온 몸에도 힘이 빠진다. 벼락같이 고소증세가 나를 후려친 것이다. 이후로 컨디션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미 고도는 5000미터에 이르렀으니 고소 증상이 나타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은 법. 설상가상으로 오후가 되자 산 위에서 부는 바람까지 얼굴을 때려댄다. 눈 작고 피부 두껍고 입술까지 두터워 빙하기에도 최후까지 견딜 수 있는 얼굴이 자랑이었는데, 히말라야 칼바람 한 번 맞으니 무방비 무용지물. 본격적인 고산병 증상인 두통이 시작되고 다리는 거의 다 풀려버려 스틱에 기대 굴욕적인 자세로 질질 발을 끌며 올랐다. 삼십 걸음 정도 걷다가 멈춰 쌔액쌔액 숨 고르고, 다시 이십 걸음... 위로라도 받으면 괜찮아질까 싶어 내려오던 한 트레커에게 얼마나 가야 하는지 물었다. 30분만 더 가면 돼! 힘을 내 친구! 이 정도를 기대했건만,,,


"한 시간.. 아니 한 시간 반쯤.. 메이비!" 내 몰골을 쳐다보더니 예상시간보다 한 시간쯤은 더 부른다. 식빵! 식빵! 욕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굼벵이처럼 기어가듯 가고 있는데 낯익은 무리들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며칠 만에 조우한 기네스 펠트로가 이끄는 영국발 쓰리 시스터즈팀.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겠다 싶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명랑한 척 즐거운 척 인사를 했는데 날 아는지 모르는지 눈만 찡긋, 쌩~하고 지나쳐버린다. 이런 썅것들이! 분노와 섭섭함에 울컥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녀들을 향해 잘 먹고 잘 살기를 빌어줬다. 내가 빌어준 대로 잘 먹고 잘 살다 보면 (영국산 워커스 숏브래드도 매일 처먹으면서!) 그녀들도 수년 내에 포동포동하고 주름 가득한 아지매가 될 것이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훨씬 푸근해질 것이다. 이것은 결코 저주가 아니다. 그쪽 유전자가 워낙에 쫌 그렇기에. 앞으로 쭈욱 잘 먹고 잘 살길.



마지막까지 쥐어짜며 걷다 보니 드디어 틸리초 정상. 살짝 눈물이 났다. 재민이에게 내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계속 돌렸다. 가난과 소심함은 나라도 못 고친다. 찔끔 흘렸던 두 방울 눈물도 뺨에서 곧 얼어버리고 정신이 온전해지자 천천히 틸리초를 감상할 여유가 생겼다. 정상에는 나와 재민, 루카와 가니시, 벨기에에서 온 남자 1명만 남아있었다. 루카와 가니시는 곧 하산하고 우리 3명만 남아 틸리초를 감상하며 멍때리기 시작. 호수에 발도 담그고 눈썰매도 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날씨가 너무 추웠고 두통도 더 심해져가기에 이내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돌아가는 시간도 이미 늦은 상태. 내려가는 길에 트레커를 아무도 못 만났으니 우리가 이 날 마지막으로 내려온 사람들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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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틸리초. 호수의 무심한 푸르딩딩함이 괜히 야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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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틸리초의 매력은 3가지쯤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글리시어돔, 캉사르캉, 틸리초피크. 둘째, 최고 높이의 호수 (씨버 위키) 셋째, 베이스캠프의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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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깔모자 모양의 설산 너머 무스탕 지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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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카와 가니시, 서수남과 하청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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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틀거리는 안나푸르나 산군의 근육을 제대로 느껴보기에는 안나푸르나 지역에 이 만한 곳이 없다고 본다.






베이스캠프로 내려와 벨기에 가이와 함께 라면을 사 먹었다. 롯지는 이미 폐쇄된 상태. 식당만 영업하고 있었는데 이마저도 다음 주에 틸리초 길과 함께 잠정 폐쇄된다고 한다. 1주일만 늦었어도 틸리초 못 볼 뻔. 평생 처음으로 흘린 정상의 눈물도 못 닦아볼 뻔.



라면은 기가 막혔다. 현지식 인스턴트 누들이었는데 충격적으로 맛있었다. 뜨거운 국물이 내장을 적시니 내내 굽어있던 손가락도 펴질 정도. 호수를 보았을 때의 감동은 라면 국물의 감동에 비하면 저리 가라였다. 바닥까지 핥아먹었다. 힘과 여유가 생기자, 돌아갈 길에 대한 걱정은 자연스럽게 사그라든다. 배를 채운 양재동 뚱띵이는 천하무적이다!!



벨기에 가이가 대뜸 한국의 이슈에 대해 물어본다.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상대방 국가 사정부터 물으니 다소 황당하긴 했다. 알고 보니 내 얘기보다는 자기네 나라 사정에 대해 하소연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왕과 정치세력 간의 갈등과 다툼이 심한 벨기에였다. 나도 분위기에 휩쓸려 울나라 캡틴들을 까대기 시작했는데 이러다 보니 벨기에 놈과 죽이 잘 맞았다.


"특히 그 각하께서는 **도 많고 *같고 **하더니..참 **같은 분이시지"


"아! 그래? 우리 왕께서도 **하시고 ***해서 아주 그냥 확!."


"하하, 하여간 건배하자! 갓 블레스 쌍놈들!"


뒷담화, 아니 각하 헌정은 언제나 즐겁다.



라면빨로 버티며 하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비슷한 속도로 걸었으나 내 보폭의 반도 되지 않은 짧은 보폭으로 착착착착, 4박자의 엄청난 속도로 걷는 벨기에 가이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벨기에 가이도 앞서 가다 몇 번씩 뒤돌아보며 나와 재민이를 기다려주었는데 그게 미안하기도 했고, 캉사르까지 가야 하는 그의 사정도 고려해 우리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라고 하며 무사안녕을 빌어주었다. 신비의 경공술을 펼치며 우아하고 아름답게 점이 되어 사라지는 벨기에 가이. 찰지게 자국 왕을 까대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난 뒤뚱거리고, 재민이는 절룩거리며 한참을 걸으니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고 저 멀리 실리카르카 마을이 보였다. 집집마다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환영도 보일 정도로 반가웠다. 그만큼 배가 고프기도 했고. 이 때는 실컷 풀을 뜯고 놀던 야끄떼도 주인아저씨와 함께 귀가하는 시간이었는데 돌아오는 내내 이들과 마주쳤다. 마을 사람들의 희미한 미소와 야크 목에 달린 방울소리가 지쳐있던 내게 얼마나 위로의 힘이 되던지. 직접 보고 듣지 못한 이들은 절대 알 수 없으리라.



"내가 말야 수많은 곳을 다녀봤지만, 거긴 캬... 그야말로 인크레더블이야!"


롯지에 귀환, 발도 씻고 쓰레빠 질질 끌며 식당에 내려갔는데 한 무리의 유러피언들이 와 있다. 그중 몇몇이 틸리초에 관해 묻기에, '인크레더블'에 유독 힘을 실어 대답해주었다. 그들도 내일 아침 왕복으로 다녀올 예정이었으니 궁금하기도 할 터. 폴란드 여자는 아예 내 카메라를 뺏다시피 가져가 오늘 찍었던 사진을 살펴보기도 했다.

사실, '인크레더블'이란 단어는 며칠 전 만난 독일 청년 헤첼이 한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알프스가 있긴 한데.. 이 곳은 정말 캬.. 인크레더블!"


멋진 표현이란 생각이 들어 언젠가 베껴 써먹을 작정으로 외워두었다가 오늘에서야 사용했다. 사진도 보여주고 이야기도 들려주니 유럽피언들, 촌스럽게도 흥분하기 시작한다. 폴란드 남자가 묻는다.


"거기 다녀오는데 얼마나 걸려?"


"9시간 반 걸렸어. 근데 너희들 정도면 그 시간도 안 걸릴걸?"


우리 같은 뒤뚱이와 절룩이에 비해 월등히 체력이 좋아 보이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는데, 생각보다는 재민이와 내가 느림보가 아니었던 듯싶다. 2주 후 트레킹을 마치고 포카라 시내를 쏘다니다가 우연히 이 폴란드 커플과 마주쳤는데 만나자마자 대뜸 하는 말이


"너 때문에 우리 죽을 뻔했어. 틸리초 다녀오는데 13시간이나 걸렸어! 니 면상 딱 봐났는데 잘 걸렸으!!"


웃으면서는 이야기하는데 목소리엔 분노와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13시간 걸렸으면 한밤중에 천 길 낭떠러지 길도 걸었을 텐데 얼마나 날 욕해댔을꼬..



틸리초를 다녀온 직후엔 모든 것이 좋았다. 레몬티 한 잔에 피로가 풀린다. 한껏 늘어진 표정으로 반겨주는 씨버도 귀엽게 느껴진다. 긍정과 행복의 순간이다. 오매불망하던 틸리초를 다녀왔으니까. 압도적이었던 그곳의 풍경에 여전히 취해있는가 싶었다. 거기에 행복한 저녁식사가 기다리고 있었고. 오늘 도착한 유럽피언들까지 합세해서 시끌벅적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숟가락을 들려고 하는 바로 그때, 갑자기 뼛속부터 추워지기 시작한다. 와! 생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순간, 딱 직감했다. 몸살로 인해 최소 며칠은 꼼짝도 못 할 것이란 걸. 설마 이러다가 주..죽진 않겠지..란 걱정까지 들 정도의 얼음장 같은 오한. 도저히 밥이 들어가지 않아 거의 다 남겼다. 뚱띵이가 밥을 남겼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상태라는 것. 앞에 앉은 재민이 상태도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머리가 아프고 춥다며 두꺼운 패딩을 껴 입고도 덜덜 떨고 있다. 우리 둘 다 고소당한 것이다. 멋진 풍경과 끝내주는 추억을 가진 죄로. 결국 함께 죽어가던 재민이는 춥고 머리 아프다고 하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대로 트레킹은 끝인가? 싶을 정도로 멘탈은 무너져가고, 당장 재민이를 따라 침낭에 들어가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이때, 역사에 남을 위대한 선택을 했다. 방에 들어가지 않고 식당에 남아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텨 보자고 다짐한 것. 난방이 없는 방보다는 난롯불이라도 쬘 수 있는 식당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난롯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루카를 향해 마구 지껄였다. 되도 않는 멍청한 소리를 꽤나 해댔을 텐데 참을성 있게 다 들어주는 고마운 루카.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재민이를 따라 방 안에 들어갔다면 밤새 끙끙 앓았을 것이고 며칠은 꼼짝도 못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으로 들어간 재민이는? 다음날 멀쩡한 채로 식당에 나왔다. 그거야...뭐.. 놈이 어리고 쌩쌩하니 무슨 짓을 하든 다 나았을 것이고!) 아무튼 기적이 일어난다. 서서히 몸이 덥혀지면서 회복되기 시작했다. 오한이 사라지는 정도를 수치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회복은 구체적이었다. 그렇기에 더 드라마틱했고. 단지 불만 쬐고 앉았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좋아지다니. 부랄을 탁 치는 깨달음!! 아하, 난로의 연료로 쓰이는 야크 똥! 이 야크 똥이 기적을 일으킨 거구나! 다른 걸로는 설명이 안 된다. 기적 같은 회복에 신이 나서 방방 뛰고 싶었다. 실제로 방방 뛰었다. DJ 씨버가 음악을 틀었고 함께 막춤도 추다가 루카, 가니시, 씨버와 함께 다트게임을 했다. 결국 내가 다트 세계 챔피언에도 올랐고! 난로에 불이 꺼질 때까지 웃고 떠들고 지랄하다가 행복에 겨워 잠이 들었다. 내 몸, 사랑스러운 내 몸, 불멸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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