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0 ; 실리가르카에서 야크가르카까지

"오르막 두 번! 가팔라요~"

by 블랙베어


아침이면 씨버와 함께 당일 루트와 목적지를 정했다. 결정은 전적으로 내 몫이었다. 내 결정이라지만, 실상은 씨버가 점지해주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복창할 뿐이고, 그게 내 결정으로 둔갑할 뿐이었다. 사실 그게 편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렇다고 독일 청년 헤첼처럼 책과 지도를 펴놓고 해야 하는 공부-탐구-연구는 넘나 귀찮은 일이었다. 그것보다는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데다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을 가진 씨버에겐 어리숙한 표정으로 네~ 네~ 거리며 맞춰 주는 게 낫다. 그래야 내 속도 편해지고 원활한 진행을 위한 도움도 된다.


오늘도 여지없이 아침을 먹고 나서 씨버가 내게 오늘의 목적지를 묻는다. 사실상의 통보지만.


"오늘은 야크가르카까지 가는 게 어때?


"야크가르카라... (사실은 쥐뿔도 모른다!) 흠.. 거기 좋지! 오늘은 거기까지 간다!!"


씩 한 번 웃는 씨버. 이어지는 루트 브리핑.


"(한국말로) 오르마악~ 두 번! 내리마악! 두 번! (손 끝을 천장으로 향하며) 오르마악~ 가파라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분명 능숙해진 한국말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씨버는 언어천재?) 라임까지 넣는다.


오르막 가파르다고 할 때는 내 눈치도 슬쩍 본다. 초반에는 수직절벽이라도 뛰어올라갈 기세로 뛰댕겼지만 이제는 오르막을 만나면 욕부터 나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딱히 날 걱정해주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오히려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난 그런 씨버의 모습을 즐기고 있고.



실리카르카와 야크가르카는 고도차가 없다. 하지만, 산을 하나 넘은 후 계곡 밑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가파른 오르막을 따라 걸어야 하는, 다소 지루하고 지치기 쉬운 코스를 진행해야 한다. 다행히 예상 소요시간은 4시간 반으로 짧은 편이었다.



내 목디스크가 심해진 것과 재민이 발에 물집 터진 것을 빼면 우리에게 별 문제는 없었다. 사실 이 정도 문제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 틸리초를 다녀온 어제저녁, 끙끙대며 죽기 직전까지 갔던 것에 비추어보면 오늘 아침, 우린 완벽하게 부활한 셈이었다. 아침 햇살을 등에 지고 앉아 신발끈을 조이며 모든 것에 감사했다. 기적 같은 밤과 빛나는 아침.



오늘은 씨버, 나, 재민이 순으로 일렬로 걸었는데 체력 문제와 물집 문제로 세 사람의 간격은 점점 벌어졌다. 고소로 인한 몸살 증세는 사라졌지만 지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재민이는 발바닥 물집이 터져 다리를 끌면서 걸어야 하는 상태였다. 내가 중간에 위치했는데 앞서가는 씨버와 뒤쪽의 재민이가 안 보일 정도까지 간격은 벌어져있었다. 홀로 걸으니 심심하긴 했으나 나름 호젓한 맛도 있는 게 괜찮았다. 온전하게 날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동화되는 느낌?!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틸리초를 둘러싸고 있는 세 봉우리들이 보였다. 어제 겪은 일들도 자연스레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지금은 이토록 선명한 틸리초에 대한 기억도 시간이 지나고 공간이 바뀌면 점점 흐릿해져 아득한 그리움으로 변할 것이고 그마저도 서서히 소멸될 것이다. 커다란 산을 하나 넘을 때까지 연신 뒤돌아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만하면 됐다 싶을 때까지 계속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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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지의 흰 대문과 돌담이 마늘 훔쳐 먹던 야크에게는 통곡의 벽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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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멀리 보이는 야크가르카의 롯지와 오늘의 진정한 챔피언 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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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틸리초를 둘러싸고 있는 세 봉우리들은 세 자매라 불러 마땅하다. 저 희고 매끈한 속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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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이하게도 이 곳에선 울타리를 치고 야크를 키운다. 뒤늦게 도달한 엔클로져 운동인가? 아무튼 이런 고지대에 저런 광활한 목초지가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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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룩거리며 위태위태하게 걷는 재민이를 노리고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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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털푸덕... 저 아래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한다. 이 곳에서 뾰족한 수는 있을 수가 없다. 그저 터덜터덜 내려갔다가 헥헥 거리며 올라가야 할 뿐. 그 자명함과 단순함이 맘에 든다.



가는 도중에 마낭에서 만났던 한국인 일행들과 재회했다. 원래 일정이라면 그들은 우리보다 하루 정도 앞서 나가야 하는데, 마낭에서 이틀을 푹 쉬었던 탓에 다시 이 길에서 합류하게 된 것. 나야 아직은 데면데면했지만, 일주일 이상을 같이 보냈던 재민이는 반가워 죽을 지경. 일행들은 물집으로 절룩거리며 걷는 재민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일행 중 가장 어리고 날랬던 재민이도 저런 캐고생을 했는데 자기들이 갔으면 죽었을 거라고 한 마디씩 한다. 그저 엄살인 줄 알았는데 다음날 참사를 지켜보니 그들이 실제로 틸리초에 갔더라면 진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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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었던 숙소의 2층 식당 창 밖에 걸린 야크 머리. 이 곳에서 야크 스테이크를 먹었다. 다소 질기기는 했어도 제대로 된 '불맛'을 즐겼다. 사진 속 성나보이는 코와 날카로운 이빨을 보니 괜히 무섭고 미안하네. 다시 토해 낼 수도 없고.



짐을 풀고 야크가르카 마을을 휘휘 둘러보았다. 재민이는 발이 아파 쉰다고 하여 혼자 나왔다. 호기심에 끌려 마을 위쪽의 너른 구릉지대까지 가게 되었다.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꽤 높은 곳까지 올라가 찬 바람을 맞으니 마음이 쓸쓸해진다.


야크들을 방목하는 곳을 둘러보다 아무데나 털썩 주저앉았다. 벌써 트레킹을 시작한 지 10일째. 온갖 잡생각이 드는 가운데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치고 어디로 가야할지 생각해보았다.


'아..생각하니 귀찮다'


'야 이 뚱띵이 새꺄! 니 여행인데 왜 이리 무관심이야?'


'아 몰랑 배고파'


'하..이 돼지새끼. 먹는 거는 졸라 신중하더만..답이 없네'


'아 몰랑 동서남북 아무데나 가지 머..'



사실 그랬다. 어차피 계획이나 일정 없이 떠난 여행이었다. 무형식의 형식, 무계획의 계획. 마음 가는 대로, 형편 닿는 대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고 싶은 생각만 가지고 출발했다. 물론 한 곳에 눌러있지 말고 어디에서든 배반하고 튀어나가자란 컨셉은 있긴 했지만. 아무 계획 없이 홀로 방랑하는 여행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할 것 같았다. 물론 홀로 싸돌아다니다 보면 온 몸이 싸늘해질 정도로 외로운 순간도 있다. 하지만, 난 이 외로움이 마음에 든다. 외로움이야말로 여행의 진정한 즐거움이다. 외로워봐야 즐길 수 있고 자신의 밑바닥도 제대로 볼 수 있다. '삶을 즐기되, 고독 속에 있거라!' 내가 이번 여행에서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나답지 않게 센치해지니 몸에서 위험신호가 울렸다. 꾸르륵~위장이 앓는 소리.


'그래! 어여 가서 먹자!'


그렇게 오늘 하루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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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크가르카는 롯지와 현지인들의 집 몇 채가 고작인 작은 마을이었지만, 많은 가축들 (양, 야크, 말) 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꽤 부유한 마을이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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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젤 아끼는 사진. 두텁고 보드라운 송아지의 속눈썹을 쳐다보면 잠이 스르륵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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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드라 주제에 꼬라보고 지랄이네~라고 야크가 생각한다..라고 생각했다. 힌두 사회에서 족보 없는 민족에 속하는 나는 영락없는 수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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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나보다 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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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과 야크를 돌보던 일꾼 두 명. 왼쪽 아저씨는 무척 수줍어했고, 오른쪽 청년은 내 카메라에 관심이 많아 빌려줬더니 사진을 여러 장 찍으며 좋다고 소리를 질렀다. 다시 나에게 건네줘야 할 때는 아쉬운지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고 차마 줄 수는 없어 나 역시 입맛을 다셔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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