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1 ; 야크가르카에서 하이캠프까지

"아, 사랑의 묘약"

by 블랙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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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캠프 위쪽 무명봉에 올라 재민, 루카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루카와 찍은 사진은 이게 유일하다. 이야기는 많이 나누었는데, 같이 찍은 사진은 이게 전부다. ㅎㅎ 좀 쑥스러워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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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재민. 나도 저 나이 때는 더 헤벌쭉 거리고 방긋 웃으며 살았어야 했는데...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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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지 나는 가니시. 그의 눈매는 서늘했고 입 주변에는 고독이 가득했다.




불불레에서 출발한 지 사흘 후부터 밤중에 자다가 두 번 깬다. 횟수도 시간도 늘 같다. 자정에 한 번, 새벽 3시에 한 번. 깨어나면 목이 말라 물부터 찾는다. 오늘도 여지없이 새벽에 깬다. 춥다. 물을 마시기 위해 상반신을 겨우 일으켜 세운다. 침낭 안에서 팔 한쪽 꺼내면 되는데, 목마른 것을 참고 잠들고 싶을 정도로 공기가 차다. 춥고 귀찮지만 물은 마셔야 했기에 침대 밑에 세워놓은 페트병을 집어 든다. 물을 마시고 잠시 벽에 기대어 숨을 쉬어보는데 흠.. 좋다! 공기 중의 냄새가 좋다. 방 옆의 화장실 냄새, 땀에 절은 배낭 냄새, 오래된 목재에서 나는 습한 냄새가 뒤섞인 쿰쿰한 냄새지만, 여행지에서만 맡아볼 수 있는 특별한 냄새다. 자다가 깨어 이렇게 앉아 있다 보면 과거도 미래도 가족도 빵도 히말라야도 다 사라지고 나와 어둠과 현재만이 남는다.



재민이의 발바닥 상태가 여전히 좋지 않다. 물집이 여러 군데 잡혀있고 터진 물집도 제대로 치료가 안 되어 상처가 오래갈 것 같다.


"형은 발바닥 괜찮으세요?" "형은 배 안고파요?" "형은 안 추워요?"


녀석은 자신이 아프고 배고프고 춥다는 표현을 항상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호기심 천국의 질문왕답다.



오늘, 내일이 고비다. 하이캠프를 지나 토롱라를 넘는 길은 경사도 급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이틀만 버티면 사정은 나아지는데, 고도도 확연히 낮아지고 여차하면 버스를 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재민이가 버스를 탈 놈은 아니지만. 다리가 잘리기 전까지는 걷고 또 걷는다고 하겠지. "형도 걸을 수 있지 않아요?" 요렇게 말하면서. 그 미련스러움이 나와 비슷하다. 다만 내 미련스러움에는 비겁함과 자아에 대한 원망이 서려있어 재민이의 그것과는 다를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하이캠프 (4900미터)까지 간다. 틸리초를 다녀와 고소 적응은 이미 되어 있고 체력도 풀 충전된 상태. 재민이도 절룩대긴 해도 근성 하나만은 최고였기에 잘 따라올 것이고. 제기랄, 너무 쉽잖아.


"씨버! 눈은 왜 안 오는데?"


"눈 오면 큰일 나!"


늘 똑같은 질문과 똑같은 답. 똑같은 하늘과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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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멀리 보이는 야크가르카. 가다가 뒤돌아보며 전날 묵었던 마을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느끼는 것도 트레킹의 재미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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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툭 터진 장갑. 거센 바람 때문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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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으로 불어내려오는 먼지바람. 지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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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친 바람과 고소 증세에 힘들어하는 형호. 3kg가 넘는 랩탑을 지니고 여행을 다닌다. 며칠 뒤 포카라에서 만나 형호의 랩탑에 저장된 '푸른 소금' 을 같이 보며 영화 속의 송강호처럼 동남아 어딘가에 식당을 하나 차리며 살고 싶다는 소망을 함께 나눴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신세경이 곁에 있을 리는 없을 것이라는 비관도 함께 나눴다. 형호의 첫인상은 과묵해 보였지만 그의 입담은 장난 아니었다.



계곡에서 바람이 오지게 불어왔다. 덕분에 흙먼지를 뒤집어썼는데 입에 먼지가 가득해지니 삼겹살이 간절해졌다. 이때부터 삼겹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결국 포카라에 내려와 처음 먹은 음식도 삼겹살과 소주.



점점 높아지는 고도와 날카로운 맞바람으로 트레커들의 걸음도 점점 느려졌다. 다들 하나같이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 낙타처럼 걷는데 그 모습이 웃기기도 했고 거룩해 보이기도 했다. 한참 가다 보니 한국인 무리가 보였다. 그들도 힘겹게 비스따리를 시전하고 있었다. 호흡이 거칠고 발걸음도 무거워 보였다. 하이캠프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전부터는 무척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틸리초에 갔더라면 참사가 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오싹했다.



점심 이후의 하이캠프까지 오르는 길은 하이킹을 넘어 '등반'이라 부를 만했다. 급한 경사도 문제였지만 급격하게 고도가 높아져 숨 쉬는 게 불편한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특히 일행에 있던 자매 중 언니가 유독 힘들어해 우린 돌아가며 그녀의 짐을 짊어지고 올라야 했다. 가뜩이나 힘든 데다 도움받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귀찮음이 뒤섞여 짜증이 날 대로 난 표정을 짓는 언니. 이 언니 성깔 있네.. 조심해야지..라는 생각이 절로. 하지만, 씨버는 그녀들이 거의 천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예쁜 얼굴은 찡그려도 예쁘다..라고 씨버가 명언을 남겼다. 세상은 넓고 취향은 참 다양한 듯... 암튼 말도 많이 건네보고 힘들어하는 그녀들을 위해 도움도 주려 하는데 그녀들의 반응이 영 시덥지 않았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씨버가 괜히 무시당하는 것 같아 속으로 발끈했다. 그래서, 그녀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며 속으로 고소해하기도 했고, 그녀들 앞에서 속도를 내서 기운 빠지게 하기도 했다. 뭐..내가 속이 좁았던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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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들에겐 반복되는 일상임에도 헥헥대며 겨우 올라간다. 하긴 나도 일상에서 헥헥 대다가 못 버티고 도망쳐 온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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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은 고도의 희박한 공기를 나눠 마셔가며 다들 힘겹게 올랐다. 중간에 좀 짜증 나는 일도 있었지만, 도착하니 마음이 풀어져 일행에게 레몬차를 쏴~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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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내려다본 하이캠프의 모습. 마치 평지 위에 태연히 놓인 듯싶지만 저래뵈도 4900미터에 위치해 있다. 하이캠프는 토롱라를 넘기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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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간 '인크레더블'한 산들의 보며 경탄하며 왔는데 오늘은 왠지 산들이 멋대가리가 없어 보였다. 멋대가리를 논하기 전에 사람의 마음을 할켜버리는 황량한 풍경에 몸이 움츠려들 정도.






하이캠프에 도착, 잠시 쉰 뒤 하이캠프 뒤쪽의 야산에 올랐다. 야산이라 해도 고도는 이미 5000미터급. 다들 하이캠프의 높은 고도에 잘 적응해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 때문인지 투덜대면서도 기어코 올랐다. 그만큼 고도가 높은 곳에서는 적응이 중요하다. 사진에 미친 루카는 지친 기색도 없이 이 산 저 산 뛰댕기며 셔터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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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너편 봉우리까지 건너가 사진을 찍는 루카를 보며 많은 트레커들이 감탄을 하고 응원을 보냈다.



고소적응도 했겠다, 따뜻한 차도 마셨겠다, 맛난 저녁도 먹었겠다,,, 충만감이 밀려들었다. 게다가 웃고 떠드는 와중에 다들 친해졌고 찝질했던 약간의 오해도 풀렸다. 내일은 새벽 4시에 출발하기로 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하고 일행들과 식당에서 헤어져 숙소 방으로 왔다. 그런데, 옆 방에 잠시 놀러 갔던 재민이가 방에 들어오더니 난리가 났다고 말한다.


"형! 큰일 난 것 같지 않아요?"


얌마!옆 방엔 니가 있었지 내가 있었냐..


평소와 같은 의문문으로 말은 했지만, 목소리의 톤이 달라진 것을 보니 큰일이 난 듯싶어 옆방으로 가보니 진짜 난리가 났다. 한국인 일행 중 우수가 탈이 나서 죽어가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식은땀을 흘려가며 벌벌 떨고 있는데 보자마자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연스레 틸리초에 다녀온 직후의 나와 재민이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는데, 그것보다 몇 배는 더 심각해 보였다. 아..고소증세구나. 상태가 심상치 않아 씨버를 부르니 우수를 본 씨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처음 보는 씨버의 심각한 표정! 일단 증상이 시작되면 달리 방법이 없다. 무조건 고도가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이 밤중에 험한 길을 내려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잠시 설왕설래, 우왕좌왕했다. 그러다가 상태가 더 안 좋아지면 씨버가 길을 안내해 같이 내려가기로 하고 우수의 배낭을 싸 두었다.


시간이 조금 흘렀는데도 우수는 좋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이때, 내 머리를 스치는 하나의 생각! 그래, 그것을 써보자!! 고소에 직빵이라는 그것. 사랑의 묘약으로도 불리는 블루 다이아몬드, 비아그라! 고소증세에 좋다고 하여 한국에서 처방받아 온 4알의 약이 내 배낭 어딘가에 파묻혀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배낭을 뒤져 비아그라를 찾아냈고 그것을 우수에게 먹였다.


자신 있었다. 우수! 너는 나을 것이다..두번 나을 것이다.. 주문을 외고 약효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수가 침대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오호! 약빨 쥑이네! 라고 감탄하며 우수를 쳐다보는데 나은 사람 치고는 우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부축을 받으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우수. 다들 긴장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안에서 꾸웨에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니 이제 내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느낌. 부작용인가..라는 끔찍한 생각과 이어지는 더 끔찍한 상상. 한참을 토하고 나서 다시 누워버리는 우수. 아..내가 먹인 저 약이 결정타가 되어 우수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다면? 오만가지 생각에 내 몸이 덜덜 떨려왔다.


이때 누군가 아무래도 체해서 그런 것 같다며 손을 한 번 따 보자고 제안했다. 뭐라도 해봐야 할 것 같아 손을 땄는데..

세상에! 다 죽어가던 우수의 상태가 서서히 좋아지는 것이었다. 우수도 살고 나도 살았다.



사태가 진정되고 재민이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형..아까 그거 뭐예요?"


"그거? 그거..비아그란데.."


"그게 뭐에 쓰는 거예요?"


"몰라? 비아그라가 뭔지 진짜 몰라?"


"...헤헤..알아요.. 들어는 봤어요.."


"(이 생퀴 봐라!) 알면서..."


"형..저 인도 가는데 필요하지 않을까요?"


인도 가는데 웬 비아그란가 싶었지만, 비아그라를 요구할 때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하는 법.


"하나 줘?"


"헤헤.."


훗날 재민이를 만나 비아그라에 대해 물어보니 쓰지는 않고 고스란히 가져왔다고는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밤에는 무척 추웠다. 비아그라라도 한 알 먹으면 따뜻해지려나.. 내일은 트레킹 중 가장 높은 곳인 해발 5416미터의 토롱라를 넘는다. 그간의 내 여정들을 돌아보니 젠장, 모든 것이 대체로 순조롭고 쉬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도 그러하겠지. 젠장,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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