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엿 먹인 것은 팔 할이 바람"
▲ 산 중턱의 좁은 길을 따라 부지런히 오가는 대형 트럭들이 콧방귀를 뀌어대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트럭들의 행렬에서 ‘개발’의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그 냄새는 경쾌하되 잔인했다. 칼리칸다키 강과 주변의 산들이 차이와 경계 없이 어우러져 있는 한 몸 같은 풍경에 저 트럭의 행렬이 한 줄 스크래치를 내는 느낌이 들었다. 개발과 훼손도 하나의 자연현상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을법한 일을 두고 좀 신경질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것을 인식하자 나란 인간도 결국은 개발도상국의 콤플렉스 많은 소시민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시민이 가진 조바심과 편견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겠지.
묵티나뜨는 긴장을 풀어버린 절대 다수의 트레커들과 똥꼬를 바짝 쪼이고 긴장하고 있는 소수의 트레커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전자는 나의 경우와 같이 베시사하르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토롱라를 넘어온 사람들이고 후자는 반대방향으로 진행하는 사람들로 대부분 다음날 토롱라로 넘어갈 사람들이다.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은 반시계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고도를 천천히 올리면서 해를 등지고 걸을 수 있는 장점 때문이다. 반면에 좀솜 지역을 거쳐 토롱라를 넘어 진행하는 경우 해를 마주 보고 걷는 문제점 외에도 두 가지 문제점이 더 있다. 첫째는 이 곳 묵티나뜨를 포함한 좀솜-무스탕 지역의 엄청난 바람. 트레킹 초반부터 종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으면 분노게이지가 상승할 수밖에 없고 그만큼 트레킹을 즐기기 어렵다. 둘째는 묵티나뜨에서 토롱라까지의 고도차 1700미터를 하루에 극복해야 하는 점. 급격한 고도차로 인한 고소증세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 비아그라만 믿고 가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실제로 반대방향으로 걷던 한국인 트레커가 토롱라를 넘는 과정에서 고소증세로 사망한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위험하기도 할뿐더러 그닥 보는 재미도 없는 루트가 반대방향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향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어제 내려오면서 자전거를 끌면서 죽을똥 살똥 오르는 사람들도 보았는데 보자마자 내 입에서 아이고…라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는데 처절한 끌바(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 것)의 끝은 어디일지.. 무사안녕 하기를!
어제부로 고비를 넘었다…라고 한다면 오바, 육바, 칠바겠지만 한결 말끔해진 모습으로 절룩이며 식당으로 들어오는 재민이를 보면 추워 죽겄다 싶은 고생도 이젠 끝이라는 생각도 든다. 며칠 만의 핫샤워인가! 식당 의자에 앉아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쓱 한 번 쓸어본다. 자, 이제 아침을 즐겨보자~ 전투식량 먹듯이 허겁지겁 먹었던 실리가르카와 하이캠프의 아침과는 분명 다르군.. 밀크티를 두 잔 연거푸 마셔보고 천천히 메뉴를 읽고 주문한다. 씨버는 따깔리 음식이 최고랬지! 난 워낙에 귀가 얇은 호갱이라 누가 좋다고 하면 무조건 혹하고 넘어간다. 그래! 아침은 황제처럼 먹고 저녁은 황제처럼 놀라는 말이 있지. 우리 셋은 충분한 양을 시키고 충분히 소화시켜 가며 싹 긁어먹었다. 따깔리 따봉!
▲ 초반 트레킹의 수호신이 람중히말이었다면, 토롱라를 넘어선 이후의 수호신은 사진 속의 투크체 피크.
“형! 오늘은 어디로 갈까요?”
“몰라 까먹었어. 씨버! 오늘 어디까지 간다구?”
재민이와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토롱라 패스를 넘기까지는 하나의 길을 쭈욱 따라간다는 생각으로 걸었는데, 넘어오고 보니 길도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것 같고 나누어진 길을 따라 여러 루트가 가능한 것 같았다. 문제는 우리 둘 다 그 여러 루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졌다는 것이다. 나는 무스탕 지역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허가 문제와 비용 문제(하루에 입장료만 50불 ㅜㅜ)로 포기하게 되자 살짝 맥이 풀려 있었고, 재민이는 그저 나랑 이리저리 떠돌 생각이었다. 실망한 나를 위해 씨버는 무스탕 지역의 초입을 살짝 엿볼 수 있는 루트에 대해 이야기했고, 통상적인 경로에서 살짝 돌아가기로 했다.
“케니! 오늘은 까그베니까지! 어퍼무스탕 지역도 볼 수 있다”
그래, 오늘은 까그베니다. 무스탕 지역을 맛볼 수가 있다니! 기분이 좋다. 덩실덩실~
오늘따라 씨버 이 자식이 빨리 걷는다. 덕분에 재민이와 나는 뒤쳐져서 궁시렁대면서 걸었다. 사실 길이 지극히 평탄한 데다 까그베니까지는 외길이라 시버의 길 안내가 필요 없기도 했다. 시버는 시버대로 내 눈치 안 보고 음악이든 한국어 공부 테이프든 크게 틀어놓고 걸을 수 있었을게다. 같이 걷든, 따로 걷든 길은 눈물 나게 아름다웠고, 그림자로 판단하건대 걷는 내 모습도 아름다웠다.
▲ 한겨울에 느끼는 봄의 정취 ㅎㅎ 하룻밤만에 걸어서 이렇게 분위기가 다른 곳에 도달하는 것도 트레킹의 한 묘미
▲ 묵티나트 마을
▲ 절벽을 따라 걷는 산양들. 목에 걸린 방울에서 "따깔따깔" 소리가 났다.
▲ 네팔에선 인간보다 더 잘 나가는 소
▲ 무스탕 지역의 산들은 토롱라 이전의 산들과 사뭇 다르다.
▲ 심각한 좌우 불균형의 뚱띵이 ▼여전히 질문만 해대 쌌는 촌놈 재민이. 지금은 세계를 누비며 내 촌티를 걱정해준다.
▲아래 보이는 마을이 까그베니. 이미 도착해 발 닦고 있는 씨버가 저 멀리 보인다.
“형! 야크치즈 먹어봤어요?” 길 가다가 뜬금없이 묻는 재민.
“아니”
“아..그걸 안 먹어봤어요?”
야크 치즈도 안 먹으면서 트레킹은 왜 하냐는 표정이다.
“형! 그거 꼭 먹어야 되지 않겠어요?”
그러더니 야크 치즈에 대해 쏟아내는데. 그동안 그리고 이후로 재민이가 이야기한 것을 다 합쳐도 모자랄 정도로 많은 말을 쏟아낸다. 듣다 보니 그럴듯한 게 침이 고였다. 맛도 있을 것 같았고 세숫대야 크기의 둥그런 원판 형태로도 판매한다는 것에 흥미가 끌렸다. 티비광고에서나 보던 그런 형태.
“형, 웬만한 짐 다 버리고 야크 치즈만 10kg 싸서 가면 어떨까요?”
재민은 치즈에 환장하는 나도 질릴 정도로 집요하게 집착한다. 씨버도 한몫 거든다.
“야들아! 어리버리타면 짝퉁 사게 된다. 좀솜에 가면 제대로 된 집을 알려주지”
우와! 이후로 모든 마을에 들러 야크 치즈를 사서 먹었다. 보통 1kg 정도 사서 날것으로 조금씩 떼어먹기도 하고 게스트하우스 주방에서 통째로 구워 먹기도 했다. 날것으로는 조금 비릿했는데, 구워 먹으니 풍미가 확 살아났다. 미친 듯이 먹어댔는데 먹으면서도 이건 너무 무식하게 많이 먹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 두 번은 들 정도였다. 온몸과 배낭은 이제 치즈 꼬랑내에 점령당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랩탑 뚜껑만 열어도 치즈 꼬랑내가 진동할 정도. 좀솜에서 씨버가 소개해준 가게의 야크 치즈는 조금 달랐다. 색깔도 연해 노란색보다는 아이보리색에 더 가까웠다. 벽돌 크기만 하게 울퉁불퉁 못생기게 썰려져 있는 자태며, 불친절한 주인 태도를 보니 신뢰감이 확 들었다. 구워서 맛을 보니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맛은 아니었다. 하지만, 씨버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지!! 그곳에서 진퉁배기 야크 치즈를 즐겼다.
까그베니에 도착. 무스탕 지역의 신비스럽고 고요한 선경을 기대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막상 보니 트레킹 중 만났던 어떤 마을보다도 활기찼다. 롯지는, 이제는 호텔이라 불러야 마땅하겠지만, 훌륭했다. 방의 상태, 음식, 거기다가 와이파이까지. 백두산보다 높은 고도에서 터지는 와이파이를 접하며 흥분에 겨워 나는 서둘러 랩탑을 열었다. 가족, 친구, 한국 상황 등은 사실 별 반 관심이 없었다. 알아서 잘 살고들 있겄지. 서둘러 확인한 것은 월급통장이다. 거의 반년치에 해당하는 임금이 들어와야 했는데 그래야 이후에 안정적으로 여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얼굴이 후끈거린다. 설령 월급이 들어왔다한들 여기서 뽑아쓸 수도 없고 어차피 입금될 월급, 언젠가는 입금될 텐데... 그래도 기어코 확인을 해 보는데... 이런 개 같은 일이 있나!! 아직도 입금이 안 되다니. 썩을…
점심은 역시나 훌륭했고 (따깔리 따따봉!) 마을 구경을 위해 돌아다닌 지 얼마 안 되어 놀랍게도 어느 골목에 있는 맥도널드 간판을 발견했다. 와! 이런 곳에서 맥도널드라니! 흥분이 되어 뛰어가 보니 짝퉁! 맥도널드를 카피한 야크도널드. 하하. 오히려 짝퉁이라 기대가 더 되었다. 진짜 맥도널드면 보기만 하고 지나치려 했는데 야크도날드라 호기심이 발동해 안으로 들어갔다. 현지 식당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인테리어였는데, 특이한 것은 가게 안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팝송. 음악은 아무래도 좋았다. 옴마니밧메훔만 아니면. 그냥 나갈 수가 없어 햄버거를 하나 주문해서 재민이와 나눠먹었는데, 입 안 가득한 육즙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야크도널드뿐만 아니라 세븐 일레븐 같은 편의점도 잘 갖춰져 있고 소, 양, 말, 야크 들도 풍족한 그야말로 까그베니는 부촌이었다. 씨버 말로는 다른 곳에 비해 집값도 월등하게 비싸다고 한다. 오호라! 동네 똥개들도 1000루피 지폐를 물고 다니는 곳이 바로 여기구만.
▲ 월급도 제 때 못 받는 가난뱅이는 사절입니다.
▲ 본래 순박한 외양의 당나귀들도 이 곳에서는 부티가 났고 시종일관 도도했다.
▲ 야크도날드 ㅎㅎ
▲ 루카와 가니시를 보고 목이 터져라 불렀는데 바람에 소리가 다 날아가버렸다. 루카는 원래 묵티나뜨에서 바로 포카라로 이동하려고 했으나 마음을 바꿔 이 곳까지 같이 왔다. 이후로는 진짜 안녕.
오후가 되자 씨버가 예고한대로 협곡 쪽에서 바람이 무섭게 몰아쳤다. 흙먼지를 동반한 허리케인 같은 돌풍. 어찌나 갑자기 불어오던지 뜬금없이 뺨을 연달아 맞는 기분이었다. 그 갑작스러움은 그렇다 쳐도 일단 바람의 거친 세기에 놀랐다. 더 놀라운 건, 지금 바람은 축에도 못 끼는 장난 수준이라는 씨버의 말. 롯지를 나왔을 때는 따뜻해서 얇게 입고 나왔는데 바람이 불어오자 뼛속 깊숙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토롱라 시즌2인가 싶을 정도. 장강의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듯이 칼리칸다키 협곡의 뒷바람은 앞바람을 타고 넘어와 들이닥쳐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까그베니의 대부분의 집에는 창문이 거의 없었고, 있더라도 사람 얼굴만 한 이중창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그게 단박에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여유가 생겨 꽤 먼 곳까지 걸어갔는데, 돌아오는 길은 바람과의 사투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오지게 추운데 바람 막아줄 점퍼도 없고.
죽일 놈의 바람. 살면서 내게 낚싯대를 들이대거나 뒤통수를 때리는 못된 짓을 한 것도 모두 바람이었다. 물론 내 안에 부는 바람이라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왜 그렇게 못된 바람에 휩쓸려 다녔는지 모르겠다. 나의 미성숙, 나의 가난, 나의 방황도 다 바람 때문이다. 나를 엿 먹인 게지, 오늘 맞은 바람처럼.
바람 들어 풍선처럼 불어버린 내 인생이다. 괜히 바람 빼가며 살지 말자. 어차피 인생이 투쟁이고 도박이라면 바람 잔뜩 넣고 더 가벼워지겠다. 그 쪽에 걸겠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사비나처럼, 홀딱 벗고 야구 모자 하나 쓰고 둥둥 떠다녀야지.
▲▼ 절벽에 세운 토굴집(?)과 의문의 돌판. 불심을 수양하기 위한 장소인지 죄수를 가두기 위한 장소인지 불분명했다.
▲ 재민
▲ 바짝 마른 협곡이 황량함을 더했다.
▲ 달마가 간다!!
바람맞고 시뻘게진 볼따구를 비비며 숙소에 귀환했다. 해가 지니 바람이 더 거세졌다. 수억 마리의 늑대들이 건물아 무너져라 하면서 입으로 바람을 불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 곳은 벽돌로 지어진 튼튼한 집. 여유를 찾은 돼지는 따따한 난롯가에서 불을 쬐고 차를 마셨다. 더 이상 아늑한 곳은 지구 상에 없을 것이다. 아늑해진 분위기를 더해줄 고스톱 한판이 벌어졌다. 재민이에게 완벽하게 당했다. 어라? 이 놈 보소...완전 타짜네.. 마낭에서 만난 한국인 일행들은 재민이가 호구 중의 상호구라고 했는데.. 그 놈들은 타짜 위에 타짜였던건가.. 뭐 그런 거야?
의구심은 당장 다음 날부터 풀렸는데 모든 고스톱, 섰다, 원카드, 내기 당구에서 모두 내가 이겼다. 결국 한국인 일행들의 말이 맞은 셈.
침대에 누워 오후에 산 야크 치즈를 뜯어먹으며 바람 소리를 들었다. 주변이 깜깜한 게, 잠이 잘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