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고 싶을때까지 내기 당구를 치다"
▲ 밑에서 올려다볼 때야 '소방훈련하나 보다~'라고 까불어대지만, 저 위에서 강풍을 동반한 저런 안개를 만나면 무슨 생각이 들까?
▲ 고레파니에 오르면서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멋진 구름불이 일어나는 설산보다는 산 밑에 자리 잡은 마을들이었다. 아무래도 저 산 너머보다는 기후가 온화하고 지형이 평탄해 작은 마을들이 군데군데 형성되어 있었다. 조건이 좋다는 것도 윗동네와의 비교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매일 물동이를 지고 수백 미터의 오르막을 올라야 할 정도로 이 곳도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기어코 발을 붙이며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 정착의 성공과 실패가 모여 역사가 되고 마을이 되었겠지. 어려서부터 유랑하고 방황하며 살기 원했던 나는 한 곳에 정주하려는 노력이 늘 버거웠고 그래서 그런 삶을 외면해왔는데, 오늘 고레파니에 오르며 산 밑에 형성된 마을을 바라보니 한 곳에 정착해 사는 삶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살든 우주 속 한 점이 되어 명멸할 뿐인데..라는 생각과 함께.
▲ 고레파니까지는 다시 1500미터를 올라야 했다. 다시 오르막이네 에혀~ 하면서 출발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올라갔다. 거의 뒷산 산책 수준. 이렇게 산사나이가 되는구나..라고 느끼는 순간 트레킹은 마지막 하루만 남기고 있었다.
▲ 강렬한 포즈를 취하면서 사진을 찍어달라던 아이. 엄마들이 자세며 표정이며 다 잡아주는 한국의 꼬꼬마들에 비해 확실히 여기 애들의 표정은 살아있고 남달랐다.
▲ 대체로 말이나 소들은 카메라를 들이대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양들은 렌즈 쪽으로 시선을 잘 주는 편이었다.
▲ 재민이와 이름을 까먹은 한국 청년. 하이캠프에서 잠깐 만난 이후로 따또파니에서 재회해 같이 출발했다. 건실하고 반듯하고 매사 정확한 이미지였다. 였는데, 이날 밤 내기 당구가 시작되고...
▲ 조랑말 트레킹 광고. 말 타고 이틀만 트레킹해도 궁디 절라 아플 듯.
고레파니를 오르는 목적은 푼힐 전망대에서 안나푸르나와 다울라기리 산군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혹은 재민이처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가기 위함도 있고. 씨버 말로는 푼힐에서의 일출광경은 한 번 볼만은 하지만, 트레킹 내내 보았던 눈 앞의 설산이 주는 감동은 기대할 수 없다고. 에이, 그래도 뭔가가 있으니 사람들이 푼힐!푼힐! 거리며 개떼처럼 몰려들겠지..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과연...?
고레파니에 도착하니 4시. 오늘 하루 꽤 빡씨게 걸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닥 힘들지 않았던 것은 적응 문제도 있거니와 그간 괴롭혔던 목디스크가 싹 나았기 때문. 이번 여행 직전 치료에서 의사는 트레킹과 긴 여행을 결사반대했는데,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는 여행 중에 통증이 사라져 버리니 "야 이 사기꾼 의사, 병원 새퀴들아, 엿 먹어라!" 소리가 절로 나왔다. ㅎㅎ!!
물론 한국에 돌아와서는 "쌤! 아파요! 잘못했으니 살려만 주세요!" 징징대며 의느님의 따뜻한 손길에 기대어 치료를 받고 있다. ㅎㅎ..
고레파니의 롯지는 무척 크고 객실은 넉넉해 보였는데 푼힐전망대를 가기 위한 사람들로 이미 북새통이었다. 안나푸르나 라운드와는 달리 단체관광객들이 많았고 게 중에는 나이 드신 분들도 꽤 눈에 띄었다. 체력적으로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안나푸르나를 즐길 수 있는 한계선이 고레파니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또한 부부, 애인, 불륜 등등의 커플도 많아 널럴한 관광지 느낌. 특히 중국인들이 와글와글했는데, 중국 여자가 취향인 씨버만 노났네..
저녁식사.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게걸스럽게 싹 다 비웠다. 먹고 나서 생각해보니 아차차! 오늘이 트레킹 마지막 저녁인 셈이었다. 잠시 어떤 감정이 들어야 하나 생각해봤는데 아쉬워해야 할지, 뿌듯해해야 할지, 무덤덤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냥 뭐라도 더 먹고 싶었다. 그래서, 재민, 한국 청년과 함께 동네 슈퍼를 찾아 나섰다. 가다 보니 당구장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입구부터 헤비메탈이 빵빵하게 흘러나왔다. 맥주도 한 병 시켜 묵고, 텐션 오른 셋이서 내기 당구 시작. 재민이는 다마수 물 30의 깍두기라 실질적으로는 나와 청년의 한판 승부였다. 첫판은 게임비 내기. 한국 청년 당첨. 해맑게 웃는 그 청년의 표정이 보기 좋았다. 둘째판은 꼴찌가 1등에게 레드불 사주기. 내가 1등, 청년 꼴찌. 졌지만 호방하게 웃는 청년의 미소가 넉넉해 보였다. 셋째판은 같은 방식으로 초콜렛 사주기. 내가 1등, 청년 꼴찌. 약이 올라 귓볼이 달아오른 청년이 귀여웠다. 넷째판은 비스킷 내기. 띠불놈아! 이젠 좀 이겨봐라~속으로 청년을 응원하며 큐대를 돌렸는데, 당구란 게임이 그렇다. 봐주려고 마음먹고 치다가도 결국 관성대로, 실력대로 칠 수밖에 없는 게 당구. 일부러 못 치는 건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니구.
이미 멘탈 터진 청년, 결국 또 꼴찌. 어떻게 내리 네 판을 다 지냐.. 모든 걸 내려놓은 표정의 청년, 서둘러 게임비를 계산한다. 막판까지 다 이겨버리니 승리의 기쁨보다는 패자에 대한 얄미운 감정이 들었다. 이 생키, 분위기 어색해지게 다 지고 지랄이야! 하는 마음.
간밤에 우리 방에 청년이 찾아왔다. 내기 품목을 가져온 것이다. 문을 열면서 이 놈이 고지식하게 내기 품목 다 사 오는 거 아냐? 은근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청년은 씩 웃으며 스니커즈 하나만을 건넸다. 미안하다는 말은 못 하고 미안하다는 감정만 눈빛에 담아. 짜식... 살짝 호감이 생겼다.
내일 새벽 일찍 푼힐 전망대를 거쳐 하산하게 되면 나의 트레킹은 끝이 난다. 나와 다르게 재민이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갈 예정. 같이 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재민이의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 일부를 내 배낭으로 옮겼다. 가다가 니 짐 다 버리겠다고 하니 낄낄대는 재민. 이때만 해도 물집 때문에 절룩거리는 재민이가 제대로 잘 다녀올까 걱정했는데, 우려와는 달리 5,6일 소요되는 코스를 4일 만에 주파하고 포카라에 내려왔다. 멋진 사진과 함께, "형! 여기는 꼭 가봐야 되는 곳 아니에요?" 비수를 내 심장에 찌르며.
꿈만 같았던 트레킹의 마지막 밤은 깊어만 갔다... 와 같은 상투적인 문장이 예외 없이 들어맞는 밤.
침대에서 몇 번 뒤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