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L ROUND ; 고레파니에서 나야풀까지

"봄봄"

by 블랙베어


새벽에, 푼힐에 올랐다. 매섭게 불어대는 찬 바람에 또다시 볼따구가 얼어붙었지만 '태양은 다시 떴고'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히말라야 산군의 조망은 뛰어났다. 태양이 다울라기리 1봉의 정상부를 비췄을 때 노인들도, 초딩들도, 나처럼 어정쩡한 청년들도 다 함께 "아.."라고 탄성을 내질렀다. 분명, "와~"나 "와우!"가 아닌 "아..."였다.




▲ 사람들로부터 탄성보다는 탄식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오게 만든 다울라기리 1봉.



푼힐에 오르면 보통 두 방향으로 풍경을 바라본다. 북쪽의 안나푸르나와 서쪽의 다울라기리. 안나푸르나 쪽은 3대 미봉 중의 하나라는 (괴이하게 뾰족하면 다 아름답대...절대 동의할 수 없다) 마차푸차레를 비롯해 안나푸르나 사우스 등이 보였다. 마차푸차레는, 듣던 대로 확실히 물고기 꼬리 모양이군..이라는 생각이 들뿐,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훗날 재민이가 안나푸르나 BC 에 다녀와서 제대로 된 마차푸차레 사진을 보여주는데 사진만으로도 한숨을 쉬게 만들었다. 하아..까다로운 년, 아무데서나 이쁜 모습 좀 보여줄 것이지.



다울라기리는 달랐다. 보자마자 가슴에 구멍이 쾅! 그쪽을 향해 108배라도 해야 될 것 같은 신성함.


대성당의 파이프 오르간으로 연주되는 장엄한 레퀴엠을 두 눈으로 들은 느낌.


죽음과 소멸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작은 용기를 주는 풍광이었다.


삐까뻔쩍한 세상에서 신나게 까불다가 가끔, 아주 가끔 꺼내어 사진으로나마 쳐다봐야겠다.


다시 오게 된다면 더 좋을 것이고!




▲ 동터오기 전, 투다닥투다닥 카메라 세팅하는 소리만 들렸다.








▲ 안나푸르나 산군. 정면에 햇볕 쬐고 있는 놈이 안나푸르나 사우스. 가장 오른쪽이 마차푸차레.





▲ 다울라기리 산군. 노출을 이빠이 끌어올려 찍으니 안습. 테크놀로지가 못 받쳐줬을 뿐 내 탓 아님.











▲ 마차푸차레. 에베레스트 쪽의 아마다블람, 알프스의 마테호른과 더불어 세계 3대 미봉이란다. 네팔어로 마차푸차레는 '물고기 꼬리'. 윗부분이 꽁치의 꼬리 같긴 했다.







▲ 다울라기리 파노라마




고레파니에서 푼힐까지는 500미터를 올라야 한다. 푼힐 '전망대'라는 말에 국립극장에서 남산 오르는 정도를 생각했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또한 오지게 추워서 몸땡이가 또다시 얼어버렸는데 최근 며칠 사이 몸이 얼었다가 녹았다가를 반복했다. 다시는 동태 눈깔을 무시하지 않으리라. 잡히자마자 얼리고 녹이고를 반복할 제 운명을 직감한 자의 눈빛은 저럴 수밖에 없으리니.



추우니 레몬차가 절실했다. 마침 전망대에는 레몬차를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줄이 너무 길었다. 가격 비싼 거야 그에 비례해 추억도 비싸질 테니 감당할 수 있었는데 긴 줄은 감당할 수 없었다. 할수없이 얼어붙은 채로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는데 눈 앞에 그가 나타났다. 흰 패딩 입고 존레논 안경 쓴 독일 놈. 이겨도 병신, 져도 병신인 둘만의 산악마라톤을 했다가 비긴 병신이 되어 버렸던, 내 장기를 따려고 날 깊은 숲 속으로 유인하려 했던, 전 세계의 모든 음모가 담긴 쪽지가 패딩 안주머니에라도 있는지 땀을 한되박 흘리면서도 두꺼운 패딩을 벗지 않던 그 놈이다!! 우어! 이게 얼마만이냐? 냉큼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역시나 며칠 사이에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다. 보자마자 횡설수설. 내가 세상에서 젤 빠른 사람이라는 말도 주변 사람들에게 한다. 여전하네 ㅎㅎ 재밌는 것은 푼힐에 오른 많은 사람들이 이 특이한 독일 존레논을 잘 알고 있는지, 그가 지나갈 때마다 재미있게 쳐다본다는 것이었다. 어딜 가나 화제가 되었던 그 놈.


반가워 악수를 하고 그놈에게서 이래저래 세계의 무서운 음모에 관해 듣고 있던 중 (씨밤, 곧 있으면 울나라도 핵폭탄 맞는댄다!) 해가 떠올랐다.


레몬차를 홀짝이던 사람들도, 카메라 렌즈 앞에 서서 묵언수행하던 사람들도, 핵폭탄 맞을 운명에 떨고 있던 나도 일제히 아!....



































▲ 아쉬워 한 장 더 찍은 사진. 해가 중천에 뜨니 모든 걸 말려버렸다. 풍경도 감동도. 서둘러 하산하자. 브렉퍼스트가 기다리고 있다아~~





아침을 먹고 재민이와 인사를 나눴다. 대략 5,6일 정도 소요되는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향해 떠나는 재민에게 대충 걷다가 내려와 야크 치즈나 구워 먹자고 했는데 사흘 만에 포카라에 나타났다. 물론 베이스캠프도 다녀왔고. 물집 잡힌 발바닥 때문에 걱정했는데 역시나 앙팡테리블! 전문 산악인의 싹이 이때부터 보였다.



지겨운 돌계단을 걸어 내려와야 하는 하산길. 나야풀까지는 고도 2000미터를 내려가야 하는데 끝도 없는 돌계단길에 지쳐버렸다. 오금팍이 쌔애애애. 귀찮아서 점심도 거르고 내려왔는데 그 때문에 삐진 씨버가 음료수 살 때마다 가장 비싼 레드불만 골랐다. 빨리 내려가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자고 꼬드기며 최대한 뛰어 내려오니 이미 나야풀! 씨버 녀석, 악수를 청한다. 아..끝났구나. 씨버의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이번 트레킹은 나에게 봄과 같았다. 우선 포근했다. 씨익 웃을 수 있는 공간이 이 우주에 '꽤 많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흔히들 인생을 계절에 비유하여 이야기한다. 인생 30은 한여름이요, 50은 만추요..이딴것 말고, 순간순간 생멸하고 변화하는 삶의 각 순간을 계절에 비유했을 때 근래에 착잡함으로 얼어붙었던 내 마음에 안식이 찾아와 데워졌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봄이었다.









▲ 나야풀(아래)에 도착하니 자연스레 출발지였던 베시사하르(위)가 생각났다. 내 꿈의 입구와 출구.




포카라에 내려와 한국음식점에서 삼겹살과 소주를 마셨다. 소주 맛이 맹탕이라며 두 병을 거뜬히 비우는 씨버. 이리 술을 좋아할 줄 알았더라면 트레킹 중에 맥주라도 자주 사줄걸... 랑탕 트레킹이 잡힌 씨버는 밤차를 타고 카트만두로 떠났다. 씨버와는 십여 일 후 카트만두에서 사소한 오해가 생겨 어색하게 재회하게 되었다. 내가 씨버에게 옷 몇 개를 부탁하여 카트만두에 있는 여행사 숙소에 맡겨달라고 했는데 며칠 뒤 카트만두에 도착하여 짐을 살펴보니 아끼던 비싼 옷 몇 개가 없어졌다. 누군가 그것들 중에 좋은 브랜드만 골라 훔쳐간 것이었다. 디젤, 라코스테, 노스페이스(이건 빌린 옷인데 ㅜㅜ) 그 와중에 유니클로는 안 훔쳐갔더라. ㅋㅋㅋ 씨버를 의심할 생각은 1도 없었고 단지 씨버에게 처음 놔둔 짐의 위치를 물어보려고 전화했는데, 씨버는 자신을 의심한다고 생각했는지 흥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책임지고 같은 것을 사주겠다고 했다. 나는 나대로 그렇게 말하는 씨버가 야속했고. 결국 다음날 아침 일찍 씨버가 찾아왔는데 처음 5초간은 반가움보다는 어색함으로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었다. 첫날과 같이 아침밥도 같이 묵고 ㅎㅎ



씨버도 가고 포카라에 혼자 남으니 적막했다. 이런 환상적인 트레킹 후에 힘 빠지게 무슨 적막함이냐.. 싶었지만 쓸쓸한 감정이 밀려왔다. 외로움과는 다른 쓸쓸한 무언가가.


하지만, 여행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다. 어디로 갈지, 누구를 만날지 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서게 될 미지의 길들이 쓸쓸함을 달래주는 유이한 위안거리였다. 다른 하나는 어딜 가나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현지 사람들과 길 위에서 만난 여행자들. 니들 딱 기다리고 있거래이! 케니베어가 달려간다~얏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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