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영화 《아가씨》의 유명한 대사다.
“아가씨는요. 그런 거 모르고 사는 게 좋아요?
큰 바다에 얼마나 많은 배들이 오고 가는지.
떠나는 이, 돌아오는 이, 보내는 이, 맞아주는 이.
아가씨 제일 멀리 가 본 게 어디예요? 뒷동산이죠?”
숙희는 아가씨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인 줄만 알고 따르려고 했던, 운명인 줄만 알았던 인생을 완전히 바꾸게 하는 사람이다. 살아가는 방법을 바꾸게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숙희는 위험하다. 그런데 너무 사랑스럽다.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은 위험하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자꾸 끌린다.
이 만남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릴 수도 있다. 어쩌면 파멸시켜 버릴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내 인생을 망치러 왔다. 나의 편안하게 보장되어 있는 인생을 망치러 왔다.
그래서 그는 내 인생의 구원자다. 남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길이다. 내가 나로 살 수 있는 순간을 선물해 줄 수 있다.
이 길은 힘들다, 불편하다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 길은 나를 파멸시켜 버릴 수도 있다.
여성주의에, 페미니즘에 눈을 떴을 때 나의 상태를 말하자면 바로 이런 상태였다.
- 여고 앞에만 등장하는 ‘바바리맨’ 나만 당한 것이 아니었어?
-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당했는데 남자들은 한 번도 못 봤다고?
- 남자 아이들은 아무 데나 OO 내놓고 쉬를 해도 괜찮은데,
- 여자 아이들은 다리도 마음대로 벌리면 안 되는 게 당연한 게 아니었어?
- 남자는 어른이 되려면 총각 딱지를 떼야 한다는데,
- 여자는 찐한 연애 한 번 하면 ‘걸레’가 되는 거였어?
(죄송. 예시가 좀 강합니다 ㅎㅎㅎ)
이런 충격파를 계속 받으면 나를 돌아보게 된다. 모든 것을 돌아보게 된다. 세상을 다시 보게 되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는 순간,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린다.
이 때쯤 내 삶이 뭔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지금 사귀는 남자 친구랑 결혼할 수 있을까?
남성적 질서가 지배하는 보통의 직장에 취직해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최근 탄핵이 가결되던 날, 나는 여의도에 있었다.
함께 하는 분들과 인근의 전철역에서 만나 서로 짧은 인사와 소개를 주고받고 작은 초록별 응원봉을 나누어 받았다. 작은 초록별을 쥐니까 갑자기 든든하게 느껴지고 용기가 충전되는 기분. 서로의 마음을 느끼며 여의도까지 함께 걸었다.
사람이 많다. 분명히 앞 사람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초록별이 안 보인다. 저 앞쪽 초록별을 눈으로 찾으며 내가 손에 든 초록별을 높이 들어 본다.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이 내 초록별을 보고 따라 걸을 수 있도록.
지나가던 분이 함께 온 10대 아이에게 과자를 전해 준다. 아이는 뜻밖에 건네오는 인사와 과자에 당황하면서도 곧 감사 인사를 하고 과자를 받아 든다. '엄마, 과자를 주셨어.', '아이고, 고맙네.'
계속 걷는다. 드디어 여의도로 들어왔다. 사람이 더 많다. 집회 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 일단 여기 잠시 앉을까요?
넓은 인도에 10명쯤 앉을 수 있는 빈 자리가 보인다.
누군가의 제안에 잠시 자리를 잡아본다. 주섬주섬 방석을 꺼내 펼치고 따뜻한 음료를 담아 온 텀블러를 꺼내 나누어 마신다. 누구는 귤을 꺼내 나누어 준다. 누구는 초콜릿을 꺼내 ‘하나 드시고 뒷 분에게 전해 주세요’ 한다. 와중에 한 사람이 일어난다.
- 음료 필요하신 분! 저희가 인근 카페에 아무나 드실 수 있게 음료 100잔 주문 걸어 두었거든요. 몇 잔 가져오려고 하는데 필요하신 분 주문하세요!
몇 사람이 레몬티요, 따뜻한 커피요, 주문한다.
나는 텀블러에 자두청을 넣고 따뜻한 물을 부은 음료를 집에서부터 챙겨 갔다.
한참 후에 돌아와 음료를 나누어 주며 길 잃어서 못 찾아올 뻔 했다며 웃는다.
집회 발언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앉아 있어도 사실 잘 안 들린다. 너무 먼 곳인가 보다.
게다가 계속 앉아 있으니 급격히 추위가 느껴진다. 또 누군가가 제안을 한다. "저희, 조금 더 소리가 잘 들리는 곳으로 가 볼까요?"
다들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선다.
- 초록별 보면서 잘 따라오세요.
서로의 초록별에 의지해 걷다 보니 어느 새 여의도 공원까지 왔다. "이 쪽은 길이 없어요!" 누군가 알려 주셔서 잠시 대기. 한 사람이 어느 쪽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길을 확인하고 온다. "좁은 길이 하나 있으니 조심조심 이 쪽으로 가요, 우리."
다시 이동을 시작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오! 저 멀리 LED 화면이 하나 보인다. 소리가 크게 들린다. 국회 의결 상황이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다. 차도는 이미 꽉 차 있다. 우리는 인도에 서서 사람들 틈에서 나아가지도 못하고 뒤로 가지도 못하고 서 있다. 어쩌다 보니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오늘도 안 되면 어쩌지?’라는 걱정과 ‘오늘은 되겠지?’ 라는 기대의 사이 어디쯤에 서 있는 우리들은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소식을 듣는 사이사이 노래를 따라 부른다. 아니, 사실 따라 부르기 어렵다. 가사를 모르겠다. 낯설다.
에스파 – 수퍼노바
투어스 –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유다빈밴드 – 좋지 아니한가
무한궤도 – 그대에게
김연자 – 아모르파티
지오디 – 촛불 하나
윤수일 – 아파트
로제 – 아파트
소녀시대 – 다시 만난 세계...
그 와중에 딱 한 번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는데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묻는다.
- 엄마, 이 노래만 유독 큰 소리로 열심히 부르는데?
- (미안하다.) 다른 노래는 가사를 모른다. ㅎㅎㅎ
낯설다. 모두가 다른 각양각색의 응원봉을 들고 있다. 주위를 둘러 보니 색깔도 모양도 다양하다. 어떤 가수의 응원봉인지 아이에게 물어본다.
- 저건 방탄, 저건 아이브, 저건 스트레이키즈...
이 와중에 엄마, 아빠를 따라나선 우리집 고딩 아이도 NCT 응원봉을 들었다는 것은 안 비밀.
너무 추워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과 추워도 끝을 보고 가겠다는 생각, 떨리는 마음과 결연한 마음, 이런 세상을 물려주어 미안하다는 생각과 이런 세상에서 살 수 없다는 생각들로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실시간으로 들려오는 소식에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드디어! 탄핵이 가결되었다는 외침!!!!
“와~~~~~~~~~~~~~~~~~~~”
함성 소리가 심장 박동과 음악 소리가 엉켜 하나가 된다.
그제서야 어느 새 빈 자리가 보이는 차도로 뛰어 나간다.
사회자가 외친다.
- 여러분! 드디어 탄핵이 가결되었습니다! 매일 추운 겨울날에도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좋지 아니한가요!
유다빈 밴드의 ‘좋지 아니한가’가 울려 퍼진다.
——-
그래도 우린 좋지 아니한가
바람에 흐를 세월 속에
우리 같이 있지 않나
이렇게 우린 웃기지 않는가
울고 있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세상에
우린 태어났으니깐
우린 노래해 더 나아질 거야
우리 추억해
부질없이 지난 날들
바보같이 지난 날들
그래도 너는 좋지 아니한가
강물에 넘칠 눈물 속에
우리 같이 있지 않나
이렇게 우린 웃기지 않는가
울고 있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세상이
멋지지 않았는가
아아아
그녀가 그려갈 세상
또 사회자가 외친다.
- 너무 좋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 다시 힘을 내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진다.
——-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눈 앞에 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
사랑해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메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
이렇게 까만 밤 홀로 느끼는 그대의 부드러운 숨결이
......
사랑해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메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
이 순간의 느낌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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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집회에 오면 ‘우리’가 주인공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아니다. 응원봉을 들고 신나게 ‘다시 만난 세계’에 화음까지 넣어 노래 부르는 이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어느 새 가사가 익숙한 후렴구쯤을 함께 부르면서 주위의 여성들을 돌아본다. 너무 든든하고 너무 믿음직스럽다. 추운 데 고생했다고 와락 안아주고 싶다. 어른들이 망쳐놓은 세상에서 희망의 길을 찾는 이들이 너무 사랑스럽다.
그리고 내 앞에서 신나게 음악에 맞추어 응원봉을 흔들고 춤추는 아이를 바라본다.
이제 네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다. 아이는 오늘, 여기에서 어떤 세상을 만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