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인천

동생에 관한 기억

by 아라온

아파트 입주가 드디어 시작됐다. 서울과 인천을 오가던 통학의 고됨도 끝이다. 새 학년은 새 집에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새 집이 있는 ㄱ동네는 국민학교를 다니던 ㅅ동네와는 차로 10분 정도의 거리다. 멀지 않은 곳이지만 학군이 달랐다. 덕분에 이 동네에서 혼자 튀는 교복을 입고 중학교를 다녔다. '저 교복은 대체 어느 학교야?' 하는 또래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것이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네 친구가 없었다는 사실이 조금 서운했지만 통학시간이 두 시간에서 한 시간으로 줄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더 이상 아침 6시에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았으니 말이다.


ㅅ아파트 101동 1202호. 그 집으로 간다. 그대로인 버스 정류장에 내려 그대로인 골목길로 들어선다. 입구부터 늘어선 낡은 5층짜리 단층 아파트는 더 나이가 들었다. 그 아파트를 지나 낮은 주택과 슈퍼마켓을 지나친다. 골목길 모퉁이의 슈퍼마켓은 그대로이다. 상점이 있던 자리는 동네 커뮤니티 센터가 되었고 그곳에서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쏟아지는 햇살과 함께 쏟아지던 졸음이 달아난다. ㅅ아파트가 보인다. 아래부터 층을 세어 12층에 멈춘다.

베란다는 골목을 마주하고 나 있다. 여기에서 밖을 내다본다.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아파트 입구까지 뻗은 골목길이 훤히 보인다. 낮은 주택과 저층 아파트뿐인 동네가 한눈에 펼쳐진다.

엄마가 골목을 들어서 걸어오고 있다. 아빠가 탄 흰색 프라이드 베타가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온다. 동생이 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달려간다.

아찔한 높이는 그렇게 익숙해졌다.


상아색 빛깔의 아파트는 아이보리 색을 새로이 입었다. 단지에 비해 넓은 주차장은 여전히 한산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을 누른다. 띵똥. 12층이다. 고개를 들어 왼쪽을 본다. 1202호. 20년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 현관문은 색이 벗겨지고 때가 탔다. 계단으로 향하는 문은 닫혔다. 그 문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온다.


동생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다. 벌써 1시간이 넘게 녀석을 기다리고 있다. 집 열쇠가 없는 까닭이다. 평일에는 집에 저녁이 되어서야 들어오니 괜찮지만 토요일에는 이런 일이 종종 벌어지고는 한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오는 나와 달리 동생은 천천히 집으로 왔다. 초등학교 남학생들이란 그랬다. 친구들과 축구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게임을 하다가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계단에 앉아 엘리베이터만 노려본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멈추고 동생이 내린다. 욕을 한 바가지 쏟아내며 동생을 몰아세운다. 당황하던 표정에서 억울한 표정으로 바뀌며 "왜 열쇠를 그러니까 안 가지고 갔냐"라고 말한다. 끝날뻔했던 욕이 다시 시작된다. 동생은 목에서 고무줄에 매달린 집 열쇠를 꺼내어 든다.


어느 날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동생이 베란다에서 잠들어 있었다고 했다. 베란다에서 골목길을 내다보며 식구들을 기다리다 잠이 든 것이라고 했다. 차가운 데서 왜 잠을 자냐며 동생을 다그치면서도 엄마는 너무 미안하고 슬펐다고 말했다. 그때였다. 동생이 너무 외로웠을 것 같다고 느낀 게 말이다. 학교가 일찍 끝나는 초등학생에게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 가서 혼자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는 일이 무섭고 쓸쓸했을 것이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놀거나 친구 집에 가거나 하며 시간을 보낸 것은 외로움을 덜 느끼기 위한 어린 동생만의 방편이었음이 분명하다. 동생이 갑자기 애틋해졌다.


여름방학에도 학교에 간다. 보충수업이라는 이름으로 공부를 시킨다. 더운 여름 에어컨도 없는 교실에서 선풍기를 틀고 수업을 듣는다. 그나마 4교시 정도까지만 하고 끝나는 것에 위안을 삼는다. 오후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동생이 없다. 역시 나가 노는 모양이다. 방문을 열고 책가방을 던지려는데 그만 놀란다. 노란색 풍선과 A4 종이를 찢어 만든 꽃이 방에 한 가득 붙여져 있다. 풍선에 달린 종이에 뭐라 쓰였다.


"누나 생일 축하해!"

울컥 눈물이 차 오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다. 바람이 고층 아파트를 넘어가지 못하고 맴돈다. 옆 동으로 가는 통로에서는 윙윙 소리를 내며 바람이 흐른다. 어쩐지 이곳을 지나면 기억이 사라질 듯하다. 잊지 않으려 기억을 붙잡고 걸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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