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함께 나이 들다
그 집은 외진 곳에 있었다. 상업시설과 주거시설을 지나, 산등성이가 보이고 군부대를 지나치면 나오는 작은 마을, ㅇ동에 자리했다. 인천의 북쪽 끝자락에서 경기도와 마주한 곳이었다. 야트막한 낡은 주택이 오밀조밀 모여 있던 동네에는 그 흔한 식당과 슈퍼마켓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몇 안 되는 주택과 상점 뒤로는 논과 밭이 펼쳐졌다. 도시개발은 아직 행정구역의 경계지역까지 미치지 못했고 ㅇ동은 옛 모습을 간직한 채 겨우 아파트 하나를 허락했을 뿐이었다.
부모님은 ㅇ동, 그곳에 아파트를 샀다. 살던 곳보다 큰 집을 원했으나 돈이 많지는 않았으므로 외진 곳으로 찾아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시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ㅇ동의 낯선 모습에 동생과 나는 영 마뜩지 않았지만 별 수 없었다. 엄마도 그다지 내키지 않은 듯했으나 아빠만은 그곳을 좋아했다. 자신만의 방을 가지고 싶어 했던 아빠에게 방 4개짜리 아파트가 절실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ㅇ동 ㅅ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상권이 발달되지 않은 ㅇ동에는 밤이 일찍 찾아왔다. 저녁 9시만 되어도 주변은 고요해졌고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올 때면 도심지와 확연히 다른 상쾌한 밤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시골 같아 싫었던 ㅇ동이 시골 같아 좋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1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나이 들어갔다.
#1.
"빨리 서른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때는 뭐라도 되어있을 거 아니야?" 눈뜨면 서른이면 좋겠다."
아파트 단지를 서성이며 통화 중이다. 꿈꾸던 일에 연거푸 고배를 마시고 닥치는 대로 취업 원서를 내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았던 여름밤, 친구 H에게 푸념을 늘어놓는다. 졸업반인 우리는 꿈은 달라도 고민은 같았다.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해야만 하나, 언제까지 도전을 계속해야 하나, 무슨 일을 하게 될까?'
서로에게 답을 구할 수는 없어도 공감해 줄 수 있는, 위로를 건네고 다독여 주는 20대의 나와 친구. 청춘의 우리.
#2.
"정말 짜증 나, 완전 싫어!"
E와의 통화는 지하철에서부터 이어져왔다. 일에 지친 우리는 회사에 있는 짜증 나는 누군가를 욕하고 서로의 감정에 공감하며 위로했다. 길어진 통화는 집 앞에 와서도 끝나지 않는다. 고요한 ㅇ동 아파트 단지를 거닐며 속삭이듯 E와의 수다를 이어간다. 힘들게 들어간 회사는 왜 이렇게 우리를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말을 실감한다.
#3.
"어떻게 하면 좋을까?"
늦은 밤, 아빠가 내 방으로 찾아와 묻는다.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힘들다고 토로했다. 처음 본 아빠의 약한 모습이다. 엄마와 아빠의 싸움으로 몇 달째 집에는 냉기가 흐른다. 엄마도 아빠도 너무 싫다. "그냥 이혼해" 아빠의 질문에 소리쳐 대답한다. 그리고 아빠가 내게 한 질문을 동생에게 똑같이 되묻는다. "우리 어떻게 하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던 것이다. 아빠도 나도.
#3.
"감사합니다. 운전 조심하세요."
아파트 정문 앞에서 내려 그날 처음 본 남자에게 인사한다. 조수석 창문을 열고 그는 손을 흔들어 보인다. 잘 들어가라고 내게 말한다. 소개팅으로 만난 낯선 남자와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이다. 모처럼 설렌다. 짜증 났던 회사 일은 그 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아파트 단지에서 바라본 ㅇ동의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인다.
#4. "아파트 상가 빵집에 있어"
메시지가 왔다. 예고도 없이 불쑥 K가 찾아온 것이다. 당혹스러움과 행복한 마음이 교차한다. BB크림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편안해 보이는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다. 그에게로 간다. 엄마와 아빠에게는 남자 친구의 존재를 숨긴 채 그를 만난다. 친구와의 약속이 있다며 서둘러 집을 나선다. 그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어간다. 설레는 마음으로 단지를 빠져나간다.
#5. "나를 버리지 마요!"
조금은 비굴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파트 정문에서 '고맙다'인사하고 그의 차에서 내렸다. 그는 어느샌가 따라 내려 뒤돌아 가는 나를 향해 외치고 있다. 그와의 세 번째 만남. 그는 어떤 시그널을 보고 내가 그를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으리라 느꼈던 것일까. 나도 알아채진 못한 내 마음을 그는 나보다 먼저 알아차린 것인가. 그의 그 애절하면서도 비굴한 한 마디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단지를 걸어 집에 들어오는 길이 전과 달리 개운하지 않다. 어쩐지 덫에 걸린 듯한 느낌이다.
#6. "결혼해줘"
그가 현관문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손에 든 케이크를 문을 열고 나온 내게 내민다. 이미 우리는 결혼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형식상의 프러포즈를 하고 있는 것이다. 화려하지도 요란스럽지도 않았지만 그의 노력이 고마워 짐짓 놀란 척을 한다. 결국 '나를 버리지 말라'던 그의 외침에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일부러 ㅇ동을 지나치는 길을 택한다. 결혼 후 부모님은 또 한 번 이사를 했다. ㅇ동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돌아가는 줄 알지만 ㅇ동을 거쳐 가는 버스를 탄다. 낡은 집들이 허물어지고 4-5층짜리 건물로 바뀌었다. 독점하다시피 한 식당과 슈퍼마켓도 줄이어 생기기 시작했다. 도로는 좀 더 정비되었고 새로운 아파트가 하나 둘 들어섰다. 정비된 거리의 새로운 상점 사이로 방앗간과 철물점이 무심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눈을 감는다. 어둑하고 고요한 밤, ㅅ아파트가 있다. 집에서 새나오는 형광등 불빛과 단지의 백색 가로등이 단지를 밝힌다. 진한 라일락 향기가 코 끝을 간지럽힌다. 밤공기가 시원하다. 바로 집으로 가지 않는다. 단지를 빙빙 돌며 전화를 한다. 울고 웃는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