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역서를 일찍 마감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친구들을 만나다 보니 친구들을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대화 스타일, 관심사 등. 그리고 그 각각의 디테일을 기억해 두었다가 내가 불편하지 않은 범위라면 그 친구에게 맞춰주는 배려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친구를 적게 만나면 한 명 한 명의 친구에게 더 집중해서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어서 좋다.
어제 우연히 본 유튜브에서 젊었을 때 가장 중요한 게 '돈'이었다면 점점 나이가 들면서 가장 중요해지는 게 '에너지'라는 말을 들었다. 젊었을 때는 에너지가 넘쳐흐르니 여기저기 에너지를 펑펑 쓰고 다녀도 됐는데, 아무리 운동으로 젊음을 보강한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가용한 에너지가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돈을 현명하게 소비해야 하는 것처럼, 에너지를 아껴뒀다가 나에게 정말 가치 있는 일에 제대로 써야 하는 것 같다.
친구가 편안하게 느끼는 '대화 가능 시간'에도 각자의 스타일이 있었다. 대화의 흐름이 조금 처진다 싶으면 '이제 갈까?'라고 말하는 친구, 흐름이 끊겨도 잠시 쉬었다가 천천히 이어나가는 친구. 뒤에 일정이 있는지의 여부는 상관없었다.
오늘 전화 영어를 하던 중에 "보통 친구들이랑 만나면 얼마나 오래 같이 있니?"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내가 아프거나 뒤에 일정이 있지 않은 이상 그때그때 친구의 스타일에 맞춘다'라는 걸 영어로 표현하려는 데 머릿속에서 '맞추다'라는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이 단어를 영어로 번역하다 보니 'adapt', 'fit' 등의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한국어로 사고한 뒤 영어로 번역해 말하기보다 영어로 사고해서 바로 말해야 자연스러운 영어 문장이 나온다는 걸 알지만, 긴 문장으로 말할 때면 어김없이 한국어 문장이 떠오른다. 이때 선생님이 제안해 준 단어는 'flexible'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이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돌며 여운이 남았다.
한국어로 '유연하다(flexible)'는 '몸이 유연하다'나 '사고가 유연하다'로 활용할 때 어울린다. 한국어로 '시간이 유연하다'는 어색한데, 영어에서는 flexible을 시간에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재밌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장소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몸도 사고도 시간도 장소도)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유연함은 때에 따라 '하나를 고르지 못하며 우유부단하다'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되기도 하고, '여러 선택지 또는 의견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긍정적인 뉘앙스가 되기도 하므로 상황별로 적절한 유연함을 발휘하려고 노력한다(쉽지 않다). 'I can be flexible'이라는 말이 내가 추구하는 '알잘딱깔센'한 유연함을 잘 표현한 것 같아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