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정적으로 예민하다. 여러 감정 중에서 특히 서운함을 정말 잘 느낀다. 심지어 잊고 있던 서운함이 어떤 상황이나, 물건, 심지어 냄새로도 상기되곤 한다.
내 서운함의 대상은 끝이 없다. 가족, 친구, 반려동물 가끔은 이보다 더 넓은 범위의 관계에 대해 서운해하고 그 일에 대해 곱씹는 버릇이 있다. 내 역서도 아닌데 어떤 책에 역자 이름이 제대로 적혀있지 않으면 출판사에 서운해하기도 한다. 내가 서운함을 느끼는 리스트는 무한하고 상상을 초월한다.
예전에는 이런 감정이 들면, 서운함의 대상이 무심하고 미성숙하다며 상대방을 탓하며 엄한 사람에게 분노를 표출했다. 또는 (나중에 다시 들춰보면 부끄러운) 글로 감정을 지저분하게 쏟아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 서운함이 내가 준 것만큼 돌려받지 못했다는 계산적인 마음인 것 같아 왠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렇게 '옹졸한' 나 스스로를 탓하며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다. 억누르려는 과정에서 '이제 나도 그 사람한테 마음을 덜 주겠어!' 다짐하는 나를 보며 슬펐던 적도 있다. 근래에는 모두가 각자의 사정이 있고, 모두가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니 그 사람을 존중하자는 관점에서 서운함을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조금 더 성숙한 접근법을 시도했다(매번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오늘 물건을 정리하다가 억눌렀던 서운함을 상기시키는 물건을 발견했다. 이번에는 위에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도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여러 글을 찾아보았다. 이글저글 읽으면서 새로운 접근법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바로 "내가 이렇게 큰 서운함을 느낄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만끽하는 것"이다.
단, 이 방법은 나의 호의를 매번 무시하고 나를 하찮게 대하는 사람에게는 사용해선 안된다. 다행히 아직까지 지금 나에게 서운함을 느끼게 하는 대상 중에 그런 사람은 없는 듯하다. 상대방이 서운함을 느끼게 한 지점을 생각하다 보면 '아 그래도 지난번엔 00 이가 나한테 이런 걸 해줬는데...' 하면서 마음껏 미워하지 못한다. 이런 경우에는 내가 이렇게 아끼는 사람이 날 서운하게 할 정도로 나와 가까운 관계로 지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는 따뜻한 마음으로 서운한 마음을 감싸보려 한다. 서운함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주변에 소중한 사람이 없는 것도 끔찍하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나에게 단 한 번도 서운함을 주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일 터.
어쩌면 서운함은 분노로 표출하거나, 억누르거나, 부끄러워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려주는 시그널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읽은 <미운맛 사탕>이라는 책이 떠오른다. 언니의 미운 점들을 생각하면서 사탕을 만들고 있는 사키. 하지만 계속 언니가 상냥하게 대해줬던 일들이 미운 기억을 덮는다.
+ 서운함을 영어로 하면 뭘까? 사전에는 sad, unsatisfied, hurt 라고 나온다. 왠지 이것보다 더 어울리는 단어가 있을 것 같은데.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지금까지 찾은 것 중엔 그나마 disappointed이 제일 가까운 것 같다.서운함은 결국 누군가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기대치가 충족되지 않았을때, 실망했을때 느끼는 감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