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쓸모한 아름다움도 삶의 본질
예술가이자 사회주의자였던 윌리엄 모리스는 1880년 디자인 대학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인테리어 황금률은 쓸모 있거나 아름다운 물건만 집에 두는 겁니다.*
모리스의 이 말은 일본 '정리의 여왕' 방송부터 숱한 미니멀리스트 슬로건까지, 여러 버전으로 진화해 떠돌아다닌다. 그런데, 막상 나는 방 청소나 옷장 정리할 때 이렇게 묻는다. '꼭 필요한가?' 아니면 '추억 담긴 물건인가?'
아름다움 보다는 추억, 사연이 더 중요한 조건인 걸 보면 모리스가 말한 미적 감각이 내겐 없는 걸지 모른다.
그런데, 최근 이 아름다움(beauty)과 자꾸 마주친다.
1. 영화 '오브젝트 오브 뷰티' (The Object of Beauty)*
존 버거의 미학 에세이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읽다가 오래전 본 이 영화의 반전이 퍼뜩 떠올랐다. 속물인 남녀 주인공이 헨리 무어의 작고 값비싼 조각품으로 보험 사기 칠 궁리를 하는 와중에, 그 조각상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진정한 미술품 감상자는 바로 청각 장애인 청소부라는 반전! 말이다. 영화에서 '아름다운 물건(the object of beauty)'은 헨리 무어 조각품이자, '아름다움 그 자체'(the object of beauty)는 예술품에 순수하게 감동받는 청소부 아가씨의 마음 아닐까!
영화에서 소란을 피우는 런던과 미국의 상류층(상류층 호소인)과 대비되는, 침묵하며 노동하는 청소부. 그 청소부가 한눈에 반해 비싼 미술품인 줄 모르고 슬쩍 훔치게 되는 작은 조각상. (배경 지식 없이) 보는 사람의 혼을 사로잡는 작품을 만든 헨리 무어가 위대한 걸까, 아니면 인간 본성이란 게 이런 쓸모없는 아름다움에 위험하게 끌리는 걸까?
2. "아름다움"은 "삶에서 불가피하고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조지 손더스
꿈보다 해몽이 늘 더 좋은 조지 손더스의 책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에서 독자는 러시아 단편을 먼저 읽은 후, 손더스의 해설과 글쓰기 팁을 읽는다. 지난주 체호프의 '구스베리'라는 밋밋한 단편을 읽고, 어제 손더스의 해설을 궁금해하며 읽던 중, 마구 밑줄치고 싶은 대목이 나왔다.
'구스베리'에서 러시아 남자 둘이 비를 피하려 지인 집에 들어선 순간, 그 집 하녀 팔라게야의 아름다움에 얼어붙는 대목이 있다. 손더스는 이렇게 평한다.
그녀가 있는 목적은 부정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것인 듯하다. 또는 무의미한 어여쁨의 구현체 역할을 하는 것. (중략) 그녀는 그 집에서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아름답고 필요 이상으로 아름답다. 그녀는 간단히 말해 꼭 필요하지는 않은 즐거움의 원천으로서 아름다움이 사실은 삶에서 불가피하고 본질적인 부분임을 일깨워준다.
무쓸모한 아름다움이 우리 삶에 필수고 본질이라니! 그건 예술이기도 하겠지? 소설과 음악, 미술품?
사실 손더스의 이 체호프 해설은 지나치게 우아하다고 생각한다. 손더스는 젠틀맨이고 현대를 사는 미국 교수니, 관대하게 해석한 것이다. 체호프 시대의 러시아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비에 홀딱 젖은 남자 둘은 그냥 너무 예쁜 하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 어색하게 쭈뼛거렸던 것 같다. 물론, 손더스의 아름다운 체호프 해석은 읽기 즐겁다. 작품 해설이 이렇게 쾌감을 주다니. 게다가, 내가 요사이 자주 마주친 '아름다움'에 관해 듣기 좋은 이야길 건넨다. 우리는 인간이라서 아름다움 (예술) 없이는 살 수 없다고!
146년 전 윌리엄 모리스가 인테리어 팁으로 알려준, '쓸모 있거나 아름다운 게 아니라면 집에 들이지 마라'에서 나는 쓸모 위주로 살았던 것 같다. 물론 우리 집에도 그저 예쁘다는 이유로 찬장 자리만 차지하는 금색 테두리 찻잔 세트가 있으며, 읽지도 않을 책인데 커버가 예뻐서 책장 정리 시즌마다 살아남는 책들이 있다. 그리고 화요일마다 가는 헬스장 코어 운동 시간, 앞에서 가르치는 선생님의 수려하고 매혹적인 얼굴과 몸매를 늘 감탄하며 바라본다. 머리로는 쓸모와 절제를 원하지만, 나 역시 도처에 널린 아름다움에 맘을 빼앗기며 사는 걸까?
당분간 이 아름다움 화두는 왠지 주변을 맴돌며 나를 자극할 것 같다.
* 윌리엄 모리스 강연 원문: If you want a golden rule that will fit everybody, this is it: Have nothing in your houses that you do not know to be useful, or believe to be beautiful."
* 1991년 개봉, 제작: Avenue Pictures Productions & BBC, 한국 제목: 위기의 남과 여
출처:
영화 포스터: 평론가 로저 에버트 홈피 https://www.rogerebert.com/reviews/the-object-of-beauty-1991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조지 손더스, 체호프의 구스베리 편, 비 오는 연못에서 헤엄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