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 체험기

by Aragaya

"위대한 작가는 어떻게 쓰는가"(윌리엄 케인)를 읽으며 거장의 글쓰기 비법을 모방하는 중입니다. 1탄 발자크를 읽고는 나도 규칙적 글쓰기 루틴을 세웠습니다. '고립과 집중'으로 어마무시한 분량을 뽑아낸 발자크의 다작 비결을 내 패턴에 맞게 바꿔 따라 합니다. 그는 세상과 자신을 단절하고(커튼 쳐두기, 남들 다 자는 밤에 몰아 쓰기) 독한 커피를 들이켜며 썼습니다. 난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평일 아침 8시에서 약 1시간 동안 공백 포함 1,000자를 쓰기로 합니다. 뭐라도 쥐어짜서 내지르고 나중에 지우겠단 각오입니다. 열흘만 이렇게 해도 엉터리 초안이 무려 10,000자 나올 테니 밑져야 본전입니다.


2편 찰스 디킨스부터는 모방할 포인트를 잡아 실제 글로 연습했습니다. 윌리엄 케인이 정리한 디킨스의 비법, "웃게 하라, 울게 하라, 기다리게 하라" 중에서 내가 겪은 강력한 감정을 떠올려 활용하고(울게 하라) 독자가 궁금해할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봤습니다(기다리게 하라). 그래서 2022년 여름, 한국에서 겪은 '황당'하고 '불안'했던 일화를 쓰기로 합니다.


2022년 8월 8일 강남 침수 뉴스 기억하시나요? 그날, 한국을 방문한 나와 딸도 서울에서 발 묶여 구로 지구대에서 새벽을 맞았습니다. 소위 '경찰서'(경찰서-지구대-파출소 순서로 규모가 크다고 합니다.)에 들어간 본 적도 처음, 하염없이 죽치고 있던 경험도 처음이었습니다. 구로 지구대 안에서 초조하고 막막했던 그날 일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딸과 한국에 가면 놀이동산 코스를 빼먹지 않습니다. 그날도 몇 시간 줄 서고 바가지 음식값 펑펑 쓰다가 쓰러지기 직전 전철에 실려 집으로 돌아오는 루틴을 기대하며 즐겁게 놉니다. 개장 시간에 입장하려고 인천 본가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 오픈런해서 인기 놀이기구 두 개부터 줄 없을 때 후딱 탔죠. 문제는 저녁에 마지막으로 "프룸라이드"를 타겠다고 4시간 줄 서 기다렸다 기어코 탄 후 밤 10시가 돼서야 집으로 향했다는 겁니다. 4시간 기다리는 게 가능하냐고요? 예, 1시간 반쯤 기다리다 보면 오기가 생겨 가능합니다. 아무튼 잠실역 바닥에 물이 흥건합니다. 실내에서만 있었으니 얼마나 비가 왔는지 몰랐고, 내 낡은 독일 폰은 무료 와이파이가 잡히면 잠시 확인했더랬죠. 그마저 배터리 아낀다고 거의 안 들여다봤고요. 신도림 환승역에 도착하니 1호선 인천행은 폭우로 끊겼습니다. 폰 배터리는 한 15% 남았고, 일단 택시를 찾으러 신도림역 지상으로 올라갑니다. 택시가 잡힐 리 없습니다. 비 오는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휴대폰 동냥, 인터넷 동냥을 해서 그날 주변 숙소는 다 찼고, 카카오 택시를 비롯해 잡히는 택시는 없을 거라고 듣게 됩니다. 경찰서에 가보기로 합니다. 드라마에서 봤죠. 민중의 지팡이 대한민국 경찰이 우릴 도와주리라. 비를 맞으며 구로 지구대를 찾아가는 길에도 포기하지 않고 호텔이나 모텔이 먼저 보이면 들어가려고 두리번거리며 딸과 잰걸음을 걷습니다. 숙박 앱에 나오지 않는 숙소도 있을 거야, 하면서요. 종일 롯데월드를 누빈 9살 딸은 파김치였지만 비상 상황이니 군말 없이 엄마 작전을 따릅니다. 눈에 뜨인 모텔에 들어가 그날 수없이 들은 거절의 말 "(방) 없어요"를 또 듣고 그 옆 지구대로 들어갑니다. 젊은 남자 경찰관이 응대합니다. "인천 집에 가야 하는 데 전철도 끊기고 숙소도 없고 택시는 안 잡힐뿐더러 휴대폰은 방전됐으니... 예, 충전과 인터넷이 필요해요." 이런 요지의 말을 비 맞은 생쥐 꼴로 에어컨 바람에 덜덜 떨며 했을 터입니다. 친절한 경찰은 충전기를 건네며 "일단 여기서 충전하세요, 나머지는 저희도 응급 전화가 많이 오고 해서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라고 합니다. 폰을 충전하며 여전히 '호줄 중' 상태인 택시 앱을 또 확인합니다. 카카오가 '오늘 택시 못 탐!!'이라고 좀 솔직했다면 좋았을 텐데요. 일단 호출이 되고, 택시 종류도 선택되고, 대기하라는 메시지가 나오니 그렇게 붙잡고 있었던 거죠. 일반 택시는 진즉 실패하고, 프리미엄 택시를 계속 호출해 두고, 저녁잠 많은 언니에게도 일단은 SOS 문자를 보냅니다. 인천도 비가 쏟아지는 데 차도 없는 언니가 우릴 구할 순 없지만, 같이 검색이라도 해 줄 수 있을 테니까요.


택시 앱을 돌려놓고 충전하느라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폰을 뒤집니다. 잘 시간 훌쩍 넘은 홀딱 젖은 딸은 지구대 소파에 누워 잡니다. 그 와중에 경찰관 여럿이 출동했다 복귀하고, 전화벨은 계속 울립니다. 어디가 폭우로 무너졌다, 막혔다, 그런 통화가 많습니다. 청소년 여학생이 경찰과 함께 들어옵니다. 사연은 모르겠으나, 집에 가고 싶지 않은 모양입니다. 부모와 연락 끝에 여차저차 집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처럼 지구대로 들어와 도움을 청하는 사람도 봅니다. 소심한 목소리의 젊은 남자가 "잘 데도 없고 탈 차도 없는데, 집에 어떻게 가야 좋을까요?"하고 공손히 묻자, 경찰은 "여기 둘러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렇게 여자분(나)과 어린애(내 딸)도 집에 못 가고 있는데, 지금은 저희가 도와드릴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소심남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주저하다 쭈뼛쭈뼛 지구대 유리문 밖으로 나가 한참을 서 있습니다. 영화에서 보던 것보다는 덜 드라마틱하지만, 아무튼 부산스러운 지구대에서 난 불안하고 조급합니다. 여기서 밤새면 어쩌지? 애 감기 들 텐데. 푸름라이드가 뭐라고 4시간을 기다렸을까. 좀 일찍 나섰더라면. 막막한 상태로 시간은 흐릅니다. 여기서 나가면 다시 충전할 곳은 없다, 우리는 연결 끊긴 미아가 될 것이다, 라는 생각에 조금만 더 충전한 후 나가고 싶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나이 지긋하신 경찰관이 우리 얘기를 들었는지 한 마디 툭 던지고 사라지십니다. "부천 가는 버스가 여기 있는 거 같던데?" 일단 부천이라도 가면 좋죠! 검색해 보니 웬걸, 88번 버스가 구로역에서 출발해 부평까지도 갑니다. 이걸 난 왜 못 찾았을까요! 전철 끊기면 늘 총알택시로 집에 왔으니, 그날도 택시 생각만 했던 거죠. 혹시 몰라 반쯤 충전된 휴대폰에 88번 버스 정류장 가는 길 화면을 여러 개 캡처하고 딸을 깨워 지구대를 나옵니다. 다행히 오래 안 기다리고 버스에 탑니다. 새벽에 잘 모르는 동네에서 내려 집까지 30분을 더 걸어가야 하니 배터리 절약을 위해 최대한 폰을 보지 않습니다. 딸은 버스에서 다시 곯아떨어집니다. 그렇게 버스를 1시간 정도 탄 후 네이버가 알려준 생전 첨 가보는 정류장에서 내리니, 비는 그쳤고 조금 전 겪은 신도림과 구로역, 지구대 아비규환과는 다르게 한적한 풍경이 초현실적입니다. 젖은 옷은 찝찝하고 다리는 피곤합니다. 늘 다니던 길이 아닌 첨 가보는 아파트 뒤편 동네입니다. 집 문을 열고 걱정과 안도감 섞인 언니 얼굴을 보니 긴장이 풀립니다. 딸은 바로 씻고 침대로, 나도 씻고 그제야 제대로 뉴스를 읽습니다. 역대급 폭우로 수도권이 비상이었던 밤이었습니다.


이상 생애 첫 경찰서(지구대) 체험기였습니다. 느낀 점: 1. 경찰은 친절했다. 2. 보조배터리 좀 챙기자. 3. 세상에는 전철과 택시 말고도 '버스'라는 게 있다. 4. 그리고 '찜질방'이란 곳도 존재한다.


(이미지 출처: 공유마당 경찰 이미지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21430&menuNo=20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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