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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더 웨일

by Aragaya

영문학 작문 강사인 찰리는 동성 제자와 사랑에 빠진다. 아내와 딸을 떠나 제자와 행복하고 싶었을 터이다. 선교사 가정에서 자라 자신의 성 정체성을 부정당해 온 제자는 자살하고, 찰리는 사랑하는 이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어린 딸을 떠났다는 죄의식도 그를 짓이긴다. 절망한 찰리는 자신을 파괴하며 몸을 정크푸드를 버리는 쓰레기통으로 만든다. 해양 쓰레기를 빨아들이는 거대하고 처연한 고래처럼.


거구의 몸이 되고 신체 기능이 파괴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찰리는 치료를 거부한다. 생명줄을 놓아 버리기로 마음먹지만, 죽기 전 "단 한 번은 제대로 된 선택을 하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이 버린 딸, 이제는 '비행 청소년'이 된 딸에게 전 재산을 주려 한다. 단, 딸이 본인 재능을 되찾도록(글쓰기) 우선 설득하려 한다. 그는 의료 개입을 거부하고 죽음과 딸을 기다린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온라인 강의를 하면서 말이다.


찰리는 어린 딸이 썼던 "모비딕" 에세이를 여러 번 인용한다. 딸의 재능을 되찾아 주고 싶다. 나는 죽지만 딸은 풍파를 이기고 꿋꿋이 항해하길 소망한다. 감히 속죄나 화해는 바라지 않는다. 딸은 아버지를 모질게 거부하고 그의 마음을 짓밟는다. 여러 번, 잔인하게 짓밟는다. 작살이 꽂히고 함부로 내동댕이쳐져 숨이 곧 끊길 찰리를 지켜보는 관객은 고통스럽다. 찰리를 연기한 배우 브랜든 프레이저는 선한 눈매를 가졌다. 겹겹이 출렁이는 희고 몸피 큰 살 위에 마치 아기 얼굴을 얹은 모습이다. 찰리의 마지막 소망은 이루어질까? 태어나 "단 한 번은 제대로 된 선택을 하고" 죽을 수 있을까?






"위대한 작가는 어떻게 쓰는가" 3탄 허먼 멜빌 편을 읽고 시적인 글을 써봤습니다. 쉽지 않네요. 운율, 두운법을 적용하기엔 어휘력과 시인의 창의력이 부족한가 봅니다. 읽는 이에게 '소리와 오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만, 이것도 쉽지 않네요. 시각은 물론, 청각과 촉각을 자극하는 한강 작가의 이런 문장이 좋은데 말입니다.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 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희랍어 시간" 중).

한강의 이 구절은 귀와 입술을 자극합니다. 속삭이듯, 바람이 가만히 새어 나오듯. 동시에 ㅅ, ㅜ, ㅍ 음운들이 탑 모양을 그리며 이미지를 만듭니다. 눈, 귀, 입술을 자극하는 글은 시적 효과를 줍니다.


"희랍어 시간"에서 신을 믿지 않는 주인공은 신을 믿는 애인과 격렬하게 논쟁한 후, 애인에게 이런 항변을 듣습니다. 철학적 논증을 직관적으로 깨버리는 시적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하고 퍼하는 .

ㅅ이 4번 반복됩니다. 이 문장은 앞에 진행된 대화 흐름 상 독자의 허를 찌르는 부분입니다. 희랍어와 철학에 심취한 주인공이 신의 부재에 대한 멋진 논증을 내놓아 독자가 설득됐을 무렵, 주인공의 애인은 머리가 아닌 심장에서 이렇게 터트립니다.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이때, 독자는 내용이 강렬하므로 형식인 두운법은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윌리엄 케인이 말한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두운법을 활용하면 가장 좋은' 사례입니다.


시적인 표현은 일상적, 상투적 표현이 아니라야 합니다. 영화 "더 웨일"로 돌아가자면, 나는 처음에는 '죄책감에 시달린다'로 썼다가 '죄책감에 심연으로 가라앉는다'로 바꿨습니다. 이미지를 연상하게 만드는 문장도 써봤습니다. 시각 자극까지는 할 만한데 청각, 촉각, 후각을 자극하는 글 쓰기는 여전히 어렵네요. 브런치 작가 @멈블비 님의 시적인 식물 묘사는 훅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습니다(https://brunch.co.kr/@62e69ebd1ece4fd/3).


참고한 작품 목록

"위대한 작가는 어떻게 쓰는가" 윌리엄 케인

(3편 허먼 멜빌)

"더 웨일"(2022) 대런 애로노브스키

"희랍어 시간"(2011) 한강

https://brunch.co.kr/@62e69ebd1ece4fd#articles


(사진: UnsplashIswanto Ar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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