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따라 하기' 프로젝트, 이번 작가는 노르웨이의 크누트 함순(Knut Hamsun)입니다. 처음 들어봅니다. 함순? 혹시 동양계? 라고 생각했으나, 토종 노르웨이 사람입니다. 윌리엄 케인이 친절하게 요약한 함순 일생을 평하자면,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딛고 자수성가한 사람입니다. 미국에서도 활동했으며 수많은 소설, 에세이 등을 남겼고 1920년엔 노벨문학상도 받았네요. 가장 큰 업적은 전통적 소설 작법을 거부하고,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기법을 사용한 일입니다. 인물의 '주요 성격 특성'에 의존하는 작법(운명, 평면적)을 비판하고, 입체적이며 복합적인 인물을 묘사했습니다. 또한, 한 장면에서 세 가지 각기 다른 시간대를 넘나들며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지만, 수많은 동시대 및 후대 작가에게 영감을 줬습니다. 버지니아 울프, 제임스 조이스 등 '의식의 흐름' 파 거장들보다 더 혁신적이고 더 집요하게 이런 심리 기법을 썼나 봅니다.
그런데도 함순은 헨릭 입센보다 지명도가 낮습니다. 나치 옹호자이자 '불안정한 사상'을 가진 작가라서 그런가 봅니다. 불온(?)하고 위험한 예술가야 널렸으니, 내가 끌리면 한 번 모방도 해 보고 작가의 '불온사상'은 그것대로 따로 다루면 될 것 같습니다.
함순의 다중 시간대 기법이란, 한 장면에서 먼 과거, 최근 일, 현재 일을 섞어 사용하며 인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강력한 심리 현상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지난주 스파에서 실제 경험한 일을 현재 시점으로 쓰고, 약 2주 전 또 다른 스파 레스토랑 경험을 과거 시점으로 쓴 후, 오래전 본 영화 장면까지 추가해 총 3가지 시간대를 오가 보겠습니다. 윌리엄 케인이 콕 찍어준 함순 소설 "빅토리아" 예문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강력한 감정'을 강조하는 케인 조언대로 여기서는 나의 '불안'이라는 감정을 축으로 써보겠습니다.
통유리 너머 호수가 눈부시게 빛난다. 오후 3시 아로마 증기 쐬는 시간. 한적하던 스파 건물 어디선가 사람들이 나와 사우나실로 속속 모여들고, 넓은 3단 나무 계단 정면과 측면 그득 자리를 채운다. 벗은 몸으로 낯선 사람들과 옹기종기 앉아 땀 빼는 광경이 이젠 익숙할 만한데도 늘 처음 몇 초간은 생경하다. 3시 정각이 되자 중년 남성이 나무바가지와 대형 부채를 들고 들어온다. 우리 중 유일하게 주요 부위를 수건으로 가렸다. 친절하게 주의 사항을 말한 후 소나무 향 인퓨전을 뜨거운 돌 위로 졸졸 붓는다. 지글지글 물 튀는 소리, 순식간 퍼지는 증기, 그윽한 소나무 향이 억센 열기와 함께 훅 몰아친다. 내 앞자리 빨강 머리 젊은 남자가 깔끔한 전신 문신을 화폭처럼 보여주고 있다. 음영 깃든 나뭇가지 그림은 풍경 추상화(?) 같다. 땀을 똑똑 흘리며 내 앞 등 문신을 보고 있자니, 2주 전 가족과 갔던 하벨 테르메 레스토랑 문신남이 떠오른다.
그날 우리는 신나게 물놀이한 후 스파 안 식당에서 주문한 식사가 나오길 기다렸었다. 앞 테이블엔 다둥이 가족이 왁자지껄 식사 중이었는데, 남편이 그 가족 중 아빠로 보이는 남자의 커다란 등 문신을 유심히 봤다. 내가 "왜?"라고 물으니, 남편은 여전히 시선을 남자 등에서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Reichsflage 야." 엉? 극우들이 쓰는 독일 제국기? 안경 없인 두더지 신세인 난 남편이 바라보는 그 등짝을 눈에 힘주고 초점 맞춰 다시 봤다. 어두운 레스토랑에서 근시인 내가 알아볼 만큼 잘 보이진 않았지만, 떠들썩한 다둥이네 가족의 한 아빠는 일순간 어둠의 기운을 뿜는 '요주의 인물'이 됐다. 오래전 영화 속, 살 떨리는 장면과 겹쳤다.
"아메리칸 히스토리 X" 초반부, 에드워드 노튼이 흑인에게 끔찍한 린치를 가한 후 경찰을 향해 미소 지으며 돌아서는 바로 그 장면! 천천히 돌아서는 그의 등에 하켄크로이츠(나치 심벌)가 드러나는 순간, 무섭게 소름이 돋았었다. 역설적으로, 영화가 주는 강력한 쾌감의 순간이기도 했다.
다둥이 아빠 등짝을 다시 보며 혼자 생각했다. 굳이 왜? 저렇게 눈에 띄게 옛 국기를? 신나치? 독일 대안당(AfD)? 어느 쪽 사람일까. '요주의 문신' 카탈로그라도 찾아봐야 하나. 이렇게 안경 없이 두더지처럼 다니면 내 옆에 극우가 활개 쳐도 난 전혀 모를 거 아니야! 누가 날 고깝게 보는지도 모르고 예의 K-미소를 짓는다면? 헐. 안경 챙기기와 문신 공부를 다짐했다!
세 번째 소나무 향 인퓨전이 돌에 떨어지고, 뜨거운 부채 바람에 살이 익는다. 힘들면 알아서 중간에 나가라는 주의 사항대로 두세 명이 사우나실을 먼저 빠져나간다. 통유리 사우나실에서는 밖으로 나간 벗은 몸들이 호수에 잠기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영화관 같다. 15분 인퓨전이 끝나고, 새빨개진 나도 섭씨 5도 호수로 들어간다.
크누트 함순은 논쟁적 인물이지만, 강단 있는 혁신 작가임은 분명합니다. 헤르만 헤세도 함순을 따라 해 도플갱어를 사용했다고 하네요. 이 글 쓰면서 극우 문양 정보도 다시 찾아봤습니다(아래 링크). 귀찮아도 앞으론 안경 잘 쓰고 다니렵니다!
위대한 작가는 어떻게 쓰는가, 윌리엄 케인
아메리칸 히스토리 X, 토니 케이, 1998
극우 심벌:
독일 연방헌법수호청(Bundesamt für Verfassungsschutz) - Verbotsmaßnahmen - Verbotene Organisationen und Kennzeichen im Rechtsextremismus. - https://www.verfassungsschutz.de/DE/themen/rechtsextremismus/verbotsmassnahmen/verbotsmassnahmen_artikel.html#St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