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그 책
인생 책을 기억에서 끄집어내 그 시절 나를 추억합니다.
2003년쯤, 페미니스트 불교학자 리타 그로스의 "비상하기와 정착하기: 불교 관점에서 본 우리 시대 사회·종교 문제" ⃰를 읽었다. 리타 그로스의 다른 책들은 한국에도 소개됐는데, 아쉽게도 이 책은 번역본이 없다. 1998년 책이니, 그동안 여성주의 불교 관련 많은 책이 나왔을 테다. 시류를 타지 않는 분야는 드무니까. 한편으론, 당시 내게 신선했던 이 책의 핵심 문제의식이 25년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만든 종교라는 '문화'는 변화가 더디니까. 과학, 예술, 정치, 종교 통틀어 가장 보수적인 게 종교 같다.
그나저나 페미니스트 불교학자라니, 어불성설 아닌가? 전 세계 수많은 절과 교회에서 봉사하며 먹이고 돌보는 사람들 성별은 유독 한쪽에 치우친다. 우두머리는 남자일 때가 많다. 서구 개신교 일부 종파는 조금은 진보한 듯하지만, 주류 가톨릭, 주류 불교, 주류 이슬람은 보수 성향이 짙다. 불교가 국교 거나 국교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진 태국,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스리랑카, 부탄 같은 나라는 가부장 권위주의 체제가 견고한 것 같다. (남자) 승려들은 우대받고, 여성은 주로 신도이자 봉사자로 산다. 기독교, 이슬람, 어디건 비슷하다.
출산장려주의, 소비주의 비판
20여 년 전 이 책을 읽었을 때 가장 즐거웠던 부분은 출산장려주의, 소비주의를 실천 불교로 극복할 수 있다는 대목이었다. 다산(多産)을 칭송하는 모르몬교, 피임과 임신 중단을 죄악시하는 가톨릭 등 대부분 주요 종교는 출산을 장려한다. 독일 기독교민주당 유력 정치인이자 EU 집행위원장 우르술라 폰데어라이엔은 아이를 무려 7명 낳았다! 저출산 대책에도 앞장섰던 보수 기민당 정치가다. 종교계가 출산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이유는 교세 확장 때문이다.
그런데, 리타 그로스는 불교의 연기(緣起, Interdependence)를 깨닫고, 내 욕망만 우선할 게 아니라(번식, 핏줄 잇기) 환경, 타인을 살피자고 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라는 다소 뻔한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풀었던 것 같다. 학창 시절 외웠던 불교 이론을 서구 학자 입을 통해 들었으니 반갑고, 참신했나 보다.
더 많이 낳고,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버리는 대신, 내 욕망이 진짜 내 건지, 사회가 주입한 소비주의,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인지 살피라고 말했다. 당시 작은 기숙사 방에서 최저 생계비로 살던 나는 책과 아이디어에 흠뻑 빠져 신나게 비상(飛上)할 수 있었다. 혼자였고, 가진 것도 없었다.
위계는 나쁜 걸까?
나는 경직된 위계를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권위에 저항하고픈 맘을 한편에 쥐고 살았다. 그런데, 리타 그로스는 자연(nature)과 문화(culture)에서 위계란 필연이라고 했다. 나무를 비유로 들었다. 흙 속에 깊이 박혀 위로 수분과 영양을 몰아주는 뿌리, 단단한 기둥, 햇볕을 독차지하는 찬란한 잎사귀, 화려한 꽃과 열매. 여기에 위계가 있는 듯 보이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각기 역할이 다르지만, 인간의 눈에는 생기를 상징하는 녹색 이파리, 화려한 꽃, 영양 가득한 과실이 가장 좋아 보이지 않는가.
힘든 일을 묵묵히 해내는 뿌리와 탄탄한 기둥, 곳곳에 뻗어 영양을 전달하는 가지도 나무의 생명선이지만, 덜 찬양받는 걸까? 나무의 각 부분이 제 역할을 하며 조화를 이루듯이, 인간계도 위계처럼 보이는 모임·조직 서열에는 각각의 역할이 있을 뿐, 우열은 없다는 것이 리타 그로스 주장이었다. 위계는 나쁘다고 여겼던 내 단세포적 생각을 흩트려놓았다. 이 책 덕분에 세상을 좀 더 유연하게 여러 각도에서 바라봤던 것 같다.
나는 여전히 갈망하고 절제하지 못하며 아이도 낳았고, 소비(체험)도 늘 많다. 삶이 선택의 연속이라면, 내 선택은 타협의 결과인 적이 많았다. 그런데도 인생 책 열 권에 이 책을 넣은 걸 보면, 리타 그로스 주장을 내면화하고 내 방식대로 소화한 것 같다. 아이는 하나만, 물건 소비는 최소로 하려고 노력한다(동거인 둘은 나 때문에 집에 물건을 못 들인다고 불평이다). 그리고 '종교'에 늘 관심이 간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상하기(날아오르기)와 정착하기"는 정신은 자유롭게 날아오르되, 땅에 발붙이고 현실 사회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남과 자연과 어우러져(정착해) 살자는 뜻이다. 종교사회학 책이지만, 문학적이었다. 미국 시골, 독실한 개신교 집안에서 자란 리타 그로스는 배우고 깨달으며 변해 온 본인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줬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말이다. 자서전과 논쟁적 글쓰기를 결합하는 게 내 취향인데, 이 책 "비상과 정착"은 독서의 즐거움을 극대화한 책이었다.
⃰ 책:
https://www.bloomsbury.com/us/soaring-and-settling-9780826411136/
Soaring and Settling: Buddhist Perspectives on Social and Theological Issu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