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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Mar 02. 2023

3월 1일에 본 것

넷플릭스, <우리의 지구>

자기 전 <우리의 지구>를 봤다. 우리의 지구 시리즈를 이제서야 발견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넷플릭스를 유영하면서 이렇게 듣기 쉽고 보기 쉬운 다큐멘터리를 여태 발견하지 못했다니. 보기도 듣기도 어려울 것 같은 장면을 너무도 능숙하게, 성우의 또박또박한 내레이션을 얹어 보여주고 그걸 거실에서 볼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남극해의 수면을 박차고 올라가는 혹등고래의 육중한 몸과 시커먼 파도 사이로 사라지는 그 거대한 꼬리나, 체한 아이의 손가락을 따는 것처럼 빠르게 수면을 헤집고 수백 수천개의 물방울을 흩날리며 올라가는 물총새의 화려한 깃털을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예쁘다'는 말의 비루함을 느끼게 했던 물총새의 사냥 장면이야말로 슬로우를 걸기에 참 적합한 장면이었다.


범고래는 혼자서 또는 무리로 사냥을 한다. 혼자라면 먹이감으로 점찍어진 펭귄은 도망갈 수 있다. 그러나 무리일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펭귄을 비치볼처럼 번갈아가며 주둥이로 튀기는 범고래의 사냥장면을 본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펭귄은 무력하게 공중으로 튀겨져 올라갔다가 떨어져내리기를 반복했다. 그 장면은 범고래 몇 마리의 협업이 한눈에 보이도록 수십 미터 위에서 촬영됐다. 피 한방울 보이지 않았지만, 펭귄이 장난감처럼 다루어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아니, 충격적으로 불쌍했다. 펭귄은 결국 범고래의 입에 '담겼다.' 크릴새우를 먹기 위해 수심 200미터까지 집단 잠수하는 펭귄들의 모습이 지나치게 아름다웠기에 바다 한복판에서 홀로 사냥당하는 모습이 있어서는 안되는 일처럼 보였다. 자주 다니던 길목이었을지도 모른다.


먹이사슬이 다 뭐람. 잠들기 전 그 장면이 다시 떠올랐을 때 나는 애니메이션처럼 그 모습을 상상했다. 사냥이 놀이로 바뀔 수 있도록. 


사는 일은 싸움일까. 바다코끼리에게 물어보면 아무 대답도 들려주지 않을 것 같다. 해빙 위에 살던 그들은 얼음이 녹으면서 사냥터와 가까운 곳에 자리잡기 위해 러시아 해안가로 몰려들었다. 그곳의 밀도는 뉴욕, 도쿄, 서울, 타이베이, 그 어느 곳의 인구밀도도 뛰어넘는다. 다닥다닥 붙은 몸들 사이로 땅을 발견하는 일이 어렵다. 이동하기 위해서는 옆에 있는 바다코끼리를 짓뭉개야 하고, 선제공격을 당해도 피할 곳이 없다. 옴짝달싹못하고 한 곳을 점유하는 그 모습을 보고 땅의 지배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좀더 한적한 곳을 찾아 벼랑 근처로 올라간 바다코끼리들은 제 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추락하기도 한다.


10년에 한번씩 생긴다는 호주의 에어호는 모든 기상현상이 하나로 꿰어졌을 때 만들어진다. 호수에 물이 다 차는 일도 드물다. 물이 마르기 전에 아이를 완연한 성체로 만들어놔야 하는 펠리컨 엄마들은 분주하다. 음식을 받아먹는 새끼들도 분주하다. 펠리컨 옆에 펠리컨, 그 펠리컨 옆에 또다른 펠리컨. 다같이 바쁜 모습을 보면서 쯧쯧, 알바트로스로 태어났으면 1년 동안 캥거루족처럼 살 수 있는데, 라고 혀를 찼다. 


알바트로스는 1년 동안 어미의 돌봄을 받는다. 복슬복슬한 털이 아니면 새끼와 어미를 구분할 수 있을까. 새끼 역시 다 펼친 날개가 3미터에 육박하는 어미와 몸집이 맞먹는다. 그렇게 큰 새끼도 계속 어미가 먹이를 가져오길 기다린다. 몇달동안 속성 성장해야 하는 펠리컨과는 형편이 다르다. 알바트로스는 그대신 고독을 견뎌야 한다. 어미는 길게는 2주 가까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역시 사는 일은 싸움인가 보다. 낯익은 곳에서 섬뜩한 위협과 싸워야 하고, 나처럼 생긴 누군가와 싸워야 한다. 시간과, 고독과도 싸워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책임이 아닌 자연의 변화와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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