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지음 / 창비
또래보다 덩치가 큰 한 소년이 있다. 조금 더 크면 날렵하고 훤칠한 몸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어른들의 말이 지겹다. 소년은 계속 먹는다. 먹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다. 끔찍한 허기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각자의 이유로 떠나갔다. 고통과 가난을 모른척하는 할머니와 단둘이 산다.
소년은 학교에서 씨름을 만난다. 자신에게서 가능성을 보는 사람들도 이때 처음 만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시시한 인생을 훌쩍 들어 던져버리기에는 소년의 기술이, 그 어떤 무엇이 약간 부족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주유소에 있다. 홍대의 랜드마크였던 청기와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백악관을 베낀 것 같은 청와대, 청와대를 베낀 것 같은 청기와 주유소. '기골이 장대한' 그 주유소는 소년이 홍대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장소가 됐다.
그리고 유독 그를 총애하는 주유소의 점장이 있다. 아르바이트생에 불과한 그를 불러내어 골프를 치러 가고, 골프에 재능이 있다며 그를 추켜올린다. 그리고 점장과 소년의 관계가 점점 돈독해지던 어느 날, 그는 소년을 프로 골퍼로 데뷔시켜주겠다고 호언장담한다. 그의 양아버지가 되어주겠다고도 한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도깨비와 씨름을 하라는 것. 씨름을 해서 이겨야 한다는 것.
소년은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어느 비 오는 날,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
도깨비와의 씨름 대결에서 가능한 경우의 수는 세 가지다. 이기거나, 지거나, 그도 아니면 비기거나. 우리가 이야기에서 기대하는 것은 이야기 속 점장이 바라는 바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든 이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관중은 스펙타클을 원한다.
즉, 씨름 장면이 클라이맥스가 되는 이야기 속에서는 싱거운 승리보다 뜨거운 패배가 낫다. 씨름이 좋았지만, 최고가 되기에는 조금 미지근했던 소년이 승부수를 띄워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상대의 샅바를 움켜쥐고 버틴다. 기회를 엿보다가 상대의 약점을 공략해야 한다. 무엇보다 신중해야 한다.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를 돌려 던질 힘을 얻기 위해 굳이 비장해질 필요는 없다. 고생했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거나, 할머니에 대한 효심이 끓어오를 필요는 없다. 그간의 간절함으로도 부족했던 씨름을 완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소한 것이다. 좀처럼 드러내지 못했던, 스스로 억누르고 있었던 솔직한 자신의 목소리, 어쩌면 짜증 같은 것.
잊고 지내던 것을 일깨우는 소설이다. 사라진 것이 부활하고, 보이지 않던 존재들이 빛을 얻는다. 우선 청기와 주유소, 도깨비 등 잊혀져 가는 소재를 가져왔다. 또 자신의 목소리를 잊고 살던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운명처럼 눈 밝은 어른이 된다. 옛날이야기를 손자들에게 들려주듯이, 이제 그는 새로운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
**책장을 닫는 바람:
일찍 어른이 되어야 하는 아이들이 조금 더 적어졌으면 좋겠다.
p.77
문제는 절박하고 절박한 씨름 선수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 지다. 그때의 나처럼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안쪽으로는 살아가는 일의 비참함에 이를 악문 이가 어딘가에 아직은 무른 살로 걷고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