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그 04. <근린 생활자>

배지영 지음 / 한겨레 출판

by 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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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들에게 띄우는 말.


01. <근린생활자>의 상욱 씨에게


'근생', '근린생활자'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상가로 건축 허가를 받았는데 주거 목적으로 용도를 불법 변경한 곳에서 살게 된 거잖아요. '자기가 내 동생 같아서 해주는 말인데'라는 공인중개사의 말을 다 읽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빨간 불이 울렸어요. 다른 주민들의 신고만 들어가지 않으면 괜찮다며, 보통 주차나 층간 소음 문제로 갈등을 빚으니 그것만 조심하라고, 혹시나 구청에서 사람이 나올 수도 있으니 잘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라고 대단한 선심을 쓰듯 말하더군요.


첫 만남에서 그처럼 무책임하게 친근함과 너그러움을 베푸는 듯한 말을 한다면, 무슨 말이 더 나오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한다니까요. 이유 없는 친절은 없다고요. 부동산 문제를 잘 모르면서도, 저는 속으로 외쳤어요. 그 집을 사면 안 되지! 반드시 반드시 후회하고 말 텐데,라고.


사람을 덥석 믿어버리고, 자신에겐 불행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쓸데없는 자존심은 포기하지 않는 태도. 불행의 원인을 당신에게서 찾는 건 쉬웠어요. 당신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서 여느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다가오는 불행을 예감하지 못했죠. 그리고 한 번도 주인공처럼 살아보지 못한 당신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가장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격을 당하게 되고요.


그러니까 그렇게 됐지. 쉽게 당신을 탓할 수 있는 저 스스로를 발견하고, 조금 놀랐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는 말을 믿은 건 당신이 요행을 바라는 바보이기 때문이었을까요. 역에서 멀고 어두컴컴하며 위생이 취약한 집을 피해 그럴듯하고 햇빛이 잘 드는 집을 선택했던 건 전적으로 당신이 어리석기 때문이었나요.


한편으론 제 처지가 당신과 얼마나 다른지 생각했습니다. 안전한 건강과 편리를 선택할 수 있다면 누가 불안한 건강과 편리를 선택할까요.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방법으로 확실한 행복을 얻고 싶어 하죠. 쉬운 길이고, 때로는 유일하게 눈에 보이는 길이니까요.


돌아보니 당신을 비난하는 것 또한 제게 가장 쉬운 선택지였어요. 미안합니다.




02. <삿갓조개>의 당신에게.


당신의 이름도, 나이도, 지난 삶도 모릅니다. 단지 당신이 도수관의 관리인으로 일하며 극한 작업환경을 하루 10시간, 총 2년 동안 용케 견뎠다는 것만 압니다. 산소통을 따로 구입해야 할 정도로 공기가 희박하고, 빛 한 점 들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나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동료들이 옆에 있어도 힘내라는 한마디 말조차 건넬 수 없는 곳에서 말입니다.


도수관은 발전소 시설의 일부였습니다. 발전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도수관의 상태를 늘 관리해야 했죠. 회사에서는 그 일을 위임할 '시설 관리인'을 고용했습니다. 더 견디지 못하고 퇴사하는 사람들을 회사는 굳이 붙잡지 않았습니다. 더 낮은 돈에도 일할 사람은 넘쳐난다는 게 그들의 태도였죠.


당신은 양날이 뾰족한 가위를 들고 근무 시간 내내 도수관 속에서 삿갓조개를 뜯어냈습니다. 도수관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점심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죠. 조개나 소라 비슷한 재료만 나와도 식당 아주머니를 증오하게 되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늘 들고 있었던 가위의 3번째 주인이라는 사실을 혹시 알고 있었나요. 몰랐다면, 이전 주인들에 대해서 궁금해한 적은 있었나요. 어떤 불행한 이가 당신 이전에 가위를 잡고 휘청이며 도수관 속을 오갔는지 말입니다.


누구보다 내부 구조를 잘 아는 덕분에, 당신은 동료들과 시작한 파업에서 끈질기게 버틸 수 있었습니다. 시급 900원을 올리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었죠. 파업을 진압하는 이들은 공기조차 잘 통하지 않는 곳에 최루탄을 던져 넣었고, 바깥사람들은 당신들의 파업 때문에 입을 어마어마한 손실을 따져댔습니다. 그동안 당신의 몸에서는 쥐젖이 자라났습니다. 도수관에서 일하며 생긴 쥐젖은 지치지 않고 자라나는 삿갓조개처럼 징그럽게 당신의 온몸을 뒤덮어갔죠.


날카로운 가위로 쥐젖을 긁어내는 당신의 모습을 지켜보기 괴로웠습니다. 왜 그렇게 버티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버티기 때문에 퇴로가 멀어지고 있다고, 참는 게 능사가 아니라고, 얼른 도수관 밖으로 뛰쳐나가라고, 당신 자신의 생명부터 생각하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왜 당신에게는, 당신의 동료들에게는 힘들고 위험한 일을 그만둘 수 있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나요.


당신 다음으로 가위를 사용하게 될 관리인은 더 편하게 숨 쉬고, 다치지 않으며 일할 수 있을까요. 5번째, 6번째, 7번째. 가위가 다음 주인들의 손에서 손으로 옮겨가다 보면 기술과 노하우에 자부심을 느끼며 일하게 되는 날이 언젠가는 오게 될까요. 사실 이 질문을 물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는 것 같군요.








***주인공들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은 소설.





"그런 면에서 쓸모없는 것들이 가장 쓸모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실용적인 것에만 매달리고 손해 보는 짓, 무용한 생각, 실없지만 피식 웃게 하는 농담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큰 불행을 당한 이들 앞에서 '지겨우니 그만하라'라는 식의 막말도 서슴지 않고 할 것 같아요.


따지고 보면 정말 중요한 거라 여겼던 것들은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고, 별거 아니라 여겼던 것들이 실은 진짜 중요했단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사소한 거라 여겼던 것들이 지나고 나서 가장 큰 후회로 남는 것처럼 말이죠." ('근생이 뭔데요?', 작가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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