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그 09. <칵테일, 러브, 좀비>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by 몬순

이른 아침 기차에서 책을 읽었다. 가로가 좁고 세로로 길쭉한 판형이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미니북보다는 크지만 일반적인 단행본 소설책보다는 작다.


자기 전에 가방에 톡 챙겨 넣었지만 차 안에서 읽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자러 간 시간이 꽤나 늦었기 때문이다. 좌석에 앉으면 눈 감고 잠을 청할 가능성이 컸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쉽게 잠들지 못하고, 새벽 내내 잠을 설친 후 찬물 세례 같은 알람 소리를 들으면서 그 가능성이 점점 0에 가까워졌다.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호되게 당한 기분으로, 얼떨떨한 표정을 한채 집을 나섰다.


그 와중에 책 생각을, 읽기 힘들겠다는 생각이긴 했지만 그래도 책 생각을 했다는 게 돌아보니 신기하다. 웬일인지 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부터 책을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조예은 작가의 소설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을 읽고 나서 그다음 작품을 읽게 되길 마음속으로 고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차 안에서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넘어가는 동안, 아파트 밭이 진짜 논과 밭을 슥슥 스쳐가는 동안. 네 개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된 단편소설집을 읽으며, 한 이야기가 끝나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때마다 한 번씩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일단 한 이야기를 끝내면 내 속의 저울을 다시 영점으로 맞추어야 할 것 같았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다음 이야기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좀비 사냥꾼처럼 짧은 재장전의 시간이 필요했다. 또 다르게 이야기하면, 이야기에 눈을 박은 동안에는 경치를 볼 여유가 없었다.


각 이야기마다 주인공도, 그들이 사는 세상도 슥슥 달라진다. 주인공은 목에 가시가 걸린 여자였다가, 물귀신이었다가, 좀비가 된 아빠와 사는 딸이었다가, 가정폭력 속에서 자란 남자가 된다. 그 인물들이 초반에 던져진 난처하고 황당하고 기상천외한 상황을 헤쳐나가는 전개가 이야기의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다. 제목에 좀비가 들어갔으니 이야기 곳곳에 피가 흐를 것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워킹데드는 영원히 못 볼 것이다) 초록초록한 풍경을 한 번씩 힐끗거리면서 자는 것도 잊고 읽어나갔다.


읽으면서 어렴풋이,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다. 독특한 설정과 흥미로운 전개에 대한 기대가 무엇보다 컸는데, 거기에 입에 붙는 문장의 맛 또한 좋았다. 계속 읽기 위해서 여러 번 곱씹고 싶은 문장을 여러 번 뿌리쳐야 했다. 꼼꼼히 정리하면서 읽지 못했지만, 기억에 남는 구절을 그림과 함께 남겨본다.



01.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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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나는 늘 목의 이물감에 시달렸다. 크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고, 잊고 있다가 침을 삼킬 때면 한두 번씩 따끔하는 정도였다. 너무 사소해서 남에게 말하기조차 민망하지만 확실히 나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 존재하지 않지만 나에겐 느껴지는 것. 그런 걸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p.17)


- 나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어릴 적 친구 중에 빨간 점이 있었던 친구가 오랜만에 생각났다.





2. 습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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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귀신의 하루는 한가하고 지루하다. 찾는 이도, 알아보는 이도 없는데 하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으니 지루할 수밖에 없다. 물은 떨어지는 나뭇잎을 세거나, 못생긴 물고기들에게 인사를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정도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p.43)


-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아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다. 자꾸 '못생긴 물고기'가 머릿속에 맴돈다. 못생긴 물고기는 어떻게 생긴 물고기일까. 그나저나 5월 22일 아침 기준 가장 좋았던 이야기. 끌어당김과 끌어안음의 이야기.





3. 칵테일, 러브,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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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힘든 건 평일 아침이었다. 아빠는 엉성하게 양복 재킷을 걸치고, 출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주연과 엄마는 새벽같이 일어나 골프채와 헬멧, 밧줄로 무장을 하고 아빠의 출근을 막았다. 아침마다 전쟁이 벌어졌다. (p.81)


- 어느 날 갑자기 좀비가 된 아빠를 제압하는 장면. 두꺼운 이불부터 뒤집어써야 하는 거 아냐, 했다가 아, 그러면 기동성이 떨어지겠구나, 그래도 헬멧보단 목을 잘 감싸야지, 라고 생각했다. 이 작품을 재미있게 읽으면서 여러 생각이 났는데, 그중 하나는 전도연이 출연하는 영화 <인어공주>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작품 초반에 '나 이제 지쳤다'라고 고백하는 장면. (그리고 뭐한 게 있어서 지쳤냐고 극 중 아내인 고두심에게 구박을 받는다)





4.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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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족이니. 그래, 가족이니 이제 내 피까지 섞인다면 우리는 과도 안에서 다시 살 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기가 싫었다. 죽어서까지 피가 섞이는 건 싫었다. 그래서 새 칼을 꺼냈다. (p.113)


- 초반부터 잔혹한 이야기를 잘 못 읽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약간 실눈을 뜨고 읽은 것 같은데,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다시 눈이 제 크기로 돌아왔다. 가족, 그리고 운명이라는 말은 참 잔인하다. 타임리프를 소재로 삼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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