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그 08. <방콕>

김기창 지음 / 민음사

by 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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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얼마나 어이없을 수 있는가. 소설을 읽으며 이것을 처음으로 느낀(느꼈다고 기억하는) 순간이 있다. 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로 유명한 미치 앨봄의 소설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을 읽을 때였다. 정비공으로 일하던 주인공 에디가 우연한 사고로 세상을 등지고, 자신의 인생과 관련 있는 다섯 명의 사람을 만난다는 게 대강의 줄거리다.


소설의 제목대로 주인공 에디는 총 다섯 명의 사람을 만나며 인간 사회의 연결성과 사랑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머릿속에 남은 것은 첫 번째 에피소드밖에 없다. 어떤 사소한 행동이 인명 사고로 이어지는 대목이다. <나 홀로 집에> 케빈이 설치한 트랩처럼, 구슬로 시작하는 장치의 연쇄작용처럼, 어떤 의도도 없었던 행동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산타클로스가 부모님이라는 걸 알아버렸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누군가 길거리에 씹다 뱉은 껌, 생각 없이 걷어찬 깡통, 바닥에 떨어뜨리고 줍지 않은 연필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파국의 첫 번째 도미노가 될 수 있구나.


인생이 손가락 하나 퉁기는 것으로 끝장날 수 있다는 허무함을 느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파괴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괜히 조심스러워졌다.


그 대목 때문에 매사에 조심성 많고 소심한 어른으로 자랐다고 미치 앨봄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소설 <방콕>을 읽으며 오래된 기억이 다시 살아났을 뿐이다. 그리고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찔한 것 같기도 한 이 느낌을 기억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작가가 이야기하려 했던 다른 많은 것에 앞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한 사실이 마음을 친다. 삶은 정말 어이없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한국과 태국의 수도 방콕을 넘나들며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국적도 성별도 다른 남녀 등장인물들은 매 순간 출렁거린다. 비극의 주인공들처럼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른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이 한 지점으로 우연히 수렴하게 되고, 오해가 비극을 낳는다. 사소한 오해가 중첩되어 비극이 탄생하는 그 과정은 지극히 희극적이다.


비극일지 희극일지 모를 이 찐득하고 찝찝한 이야기의 중심에는 '훙'이 있다. 한국에 밀입국해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일했다가 방콕에 머무르며 '린'과 살고 있다. 한국에서 일했을 당시 그는 '윤사장'의 딸이며 피아니스트인 '정인'을 자주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어느 날 초과근무를 하다가 사고로 세 손가락을 다쳤다. 한편 정인의 오빠인 '정우'는 동물권 운동가인 미국인 '서머'와 만나고 있다. 서머의 아버지 '벤'은 방콕에 거주하며 현지인 '와이'와 동거 중이다.


소금을 뿌리면 음식의 단백질이 응고된다. 손가락을 다친 훙이 했던 행동으로 앞서 언급한 인물들이 한 데 엉기게 된다. 전혀 관계없던 인물들이 한 곳에서 만난다. 보이지 않는 실로 서로 연결된 듯한 인간 사회의 속성이 드러난다. 책 후반부로 갈수록 전개에 속도가 붙는다. 작가의 건조하고 냉정한 문장이 전체를 관망하는 시선을 구성한다.


나는 평소에는 딱히 보이지 않는 관계망을 의식하며 살지 않는다. 모두 의식할 수 없겠다는 표현이 맞겠다. 주변에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행동의 나비효과를 파악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이다. 그렇다고 인생 뭐, 하며 허무함에 취해 되는대로 살겠다고 마음을 놓지도 않는다. 그저 적당히 편안하게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나비의 날갯짓에서 발생한 작은 바람이, 휩쓸린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이렇게 광풍으로 발전하는 작품을 읽으면 잠들어있던 불안감이 고개를 든다.


작품이 겨냥하는 것은 이런 불안감 자체는 아닐 것이다. 얼떨떨한 머리를 흔들어 정리하고 나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질문이 먼저 떠오른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삶뿐만이 아니라 견생, 묘생을 포함한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운명 공동체다. 하지만 인간의 시야각과 시력은 한정적이다. 내 주변밖에 볼 수 없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 중에도 초월적인 시선을 가진 신 같은 존재는 없다.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관심사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첫 번째 질문은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사는 대로 사는 대신, 다른 생명을 향한 윤리적인 태도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모든 가치와 권리가 존중받는 세상은 가능할까. 이 작품은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치의 층위를 보여준다. 부상을 입고 직장에서 해고된 외국인 노동자 훙, 동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투쟁하는 활동가 섬머, 버림받은 과거를 마음에 묻은 채 벤이 떠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태국 여성 와이, 자신이 그렇게 큰 잘못을 했냐고 자문하는 윤사장.


모든 인물에게는 그들 나름의 합리적인 동기가 있다. 소설이나 현실 모두에서 일반적으로 악한 강자와 선한 약자를 찾기는 힘들다. 세상의 약한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결국 하나로 통한다고 생각하지만, 옳고 그름의 경계는 자주 뭉개지고 개인이 가진 약자로서의 모습은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된다.


이런 복잡한 세상에서 당신과 나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하시다면 먼저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많은 질문을 품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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