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견식 지음 / SIDEWAYS
언어의 ‘우주’ 정돈 돼줘야지
다 읽고 난 다음 든 생각이다. 언어의 바다라는 표현은 너무 겸손하다. 저자가 ‘난 탈지구급이야’, 라는 자신감을 보여주려고 이 제목을 짓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헤매고 헤매고 헤매도 끝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그 광막한 세계를 혼자 유영하며 느끼는 재미와 아득함을 공유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인 나는 총 25개의 언어를 번역한 경험이 있는 사람의 책을 막 다 읽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감탄하고 싶어 진다.
영어로 쓴 책을 번역하면서 헝가리어 원서, 러시아어 번역을 참고하며 간간이 일본어 역서를 들여다보는 사람. 그는 언어천재라는 항간의 칭찬에 손을 내저으며 자신은 언어의 맛을 느끼는 어도락가일 뿐이라고 말한다. (천재라는 말을 남발하는 것도 썩 좋지는 않지만, 이런 경우에 천재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 단어에 먼지가 앉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단어를 씹고 맛보고 즐기며, 여러 언어 간에 존재하는 유사성과 차이점을 찾아내길 좋아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고대와 현대, 대륙과 대륙을 넘나들며 서로 다른 언어 간 연결 지점을 지치지 않고 탐구한다.
그 여정에 탑승하는 것만으로도 사실 어질어질했고, 눈 밝은 저자가 제시한 사례를 다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흥미진진한 부분이 많았다. 프랑스어로 하얗다는 뜻의 blanc과 영어로 검은색을 의미하는 black은 사실 뿌리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됐고,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올바른 표현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인생은 태어나(birth) 죽을(death) 때까지 선택(choice)의 연속이다’, 즉 ‘인생은 b-c-d다’가 사르트르가 한 말이 아니라는 것도 처음 안 사실이다.
언어의 뿌리와 연결지점을 들여다보고 또 잘못된 통념을 지적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실생활에서 다른 언어가 한국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소개하는 부분이 특히 흥미로웠다. 108페이지에서 영어의 팬츠pants를 어원으로 하는 말은 한국에서도 두 가지 종류로 쓰인다고 했던 것이 그 예다. 일본식 표현인 판쓰의 영향을 받아 팬티를 ‘빤스’라고 부른다. 한편 패션업계에서는 팬츠를 원래의 뜻인 바지의 의미로 사용한다.
지금, 이곳에 외국어가 미친 영향을 들여다본다는 측면에서 일본어의 영향에 대한 저자의 시각도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바르고 고운 ‘우리말’만 써야 한다는 순혈주의는 난감하다는 입장(입장도 일본식 한자어)이다. 외래어도 적절하게 사용하면 괜찮다는 유연한 태도다. 번역할 때 최대한 외래어나 외국어 대신 우리말을 쓰려고 노력하지만, 강박적으로 언어를 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반대한다.
한국에서 일본어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상으로 취급된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정부 차원에서 일본어의 영향을 지우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왔다. 하지만 일본어 역시 중국어, 영어와 같은 외국어이며, 일상어에서 일본어의 영향을 모조리 지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들어온 일본식 한자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 역시 일본어를 다른 외국어보다 더 적대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원래 충돌하고, 그 과정에서 섞이고, 어떤 것은 내치며 어떤 것은 껴안는다. 광복 이후 일본어가 남긴 흔적이 상대적으로 많다 보니 한국어에 제자리를 돌려주기 위해 솎아낼 필요는 있었겠지만, 애국심으로 일본어를 뽑아내는 것이 곧 과거사 청산을 의미하는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실제 언어생활을 더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자는 규범 언어도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우리말이 아닌 것을 다 덜어내야 한다면 한국어는 홀쭉하다 못해 피골이 상접해질 것이다. 하지만 언어를 언어답게 하는 것이 정해진 규범이다. 언어를 구사하고 잘 다루기 위해서는 문법적 지식이 필수다. ‘짜장면’을 인정하지 않았던 국립국어원에 대한 숱한 비난과 분노를 기억한다. 실제 우리가 쓰는 말에 비하면 표준어로 등재된 말은 너무나 왜소해 보인다. 하지만 실재언어와 규범언어 간의 괴리와 모순을 지적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규칙을 잘 알아야 한다.
언어 간의 차이와 유사성, 번역의 단맛과 쓴맛과 애매한 맛을 들여다본 저자는 잘못된 언어생활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지적한다. ‘분명 책을 덮으면 다 잊겠지만 참 흥미롭군요’, 하며 읽고 있던 나는 가슴이 덜컥, 했다. 그리고 ‘저희 봬요’라는 말을 안 썼다고 주장할 수 없는 나는(무려 한 장에 걸쳐 혼난 느낌), 갑자기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야단맞는 사람처럼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예의 없는 사람이라는 오해를 살까 봐 ‘적당히, 아무렇게나’ 경어체를 남용한다는 지적에 뜨끔하고, 주체를 낮추는 ‘뵈다/뵙다’를 청유문에서도 쓴다는 지적에 도 뜨끔했다. (‘뵈다/뵙다’는 주체를 낮추는 겸양어다. “저는 이따 어머니를 봬요”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저희 이따 봬요”는 말하는 이를 높이거나 듣는 이를 낮추는 셈이 되어 잘못된 용법이다.)
읽고 쓰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내가 사용하는 언어에 좀 더 신경 써야겠다. 꾸준히 하는 것만 생각했지, 내가 쓰는 언어를 좀처럼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을 반성한다. 너무 기계적이었다. 전국, 세계의 진미를 찾아다니는 식도락가처럼, 다양한 언어를 찍어 먹어보길 좋아합니다,라고 얘기하는 저자를 보니 ‘좋아한다’라는 말은 꽤나 무거운 것 같다. ‘널 좋아해’라는 말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나도 읽고 쓰기를 좋아합니다, 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어 진다.
꽃밭 전체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도 느낄 줄 아는 사람.
넓고 깊게 아는 저자가 쓴, 이 책에 대한 최종적인 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