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진 지음 / 구픽
어린 시절의 꿈은 자주 바뀐다. 꿈의 형태는 특정 직업에 꼭 국한되지 않는다. 문방구 주인이 되고 싶었지만, 분식집 주인이 되고 싶었지만, 그 직업을 갖는 것 자체를 원하지는 않았다. 용돈이 부족해서 다 못 사는 색색깔의 펜과 공책을 마음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았고, 손님이 없을 때는 휘젓던 떡볶이를 야금야금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과 두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보이는 단면에만 혹했던 것이다.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누가 말해주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을 보냈던 다른 많은 아이들처럼. 어떤 직업을 갖느냐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직업이 아니라 일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요즘 시류에도 딱 맞지 않는가. 단지 잘 먹고 잘 자고 어른의 고민 따위에 관심이 없었던 초등학생은 문방구 주인과 분식집 주인의 일과를 전부 알지 못했을 뿐이다.
흐릿하지만 나름 오래갔던 꿈이 있었다. 투니버스가 나오는 집에 사는 것이었다. 엄마는 내가 자라는 데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중학생 때까지는 그 사실을 진심으로 한탄했다. 강철의 연금술사에 대한 무심한 듯 치열한 대화에 도무지 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는 많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 ‘이건 꼭 읽어야 해!’ 혹은 ‘그것도 안 읽었어, 아직?’이라는 말을 들었던 작품들을 하나씩 독파했다. 사놓고 까먹고 있던 종합비타민이나 프로폴리스를 챙겨 먹듯. 간혹 그렇게 어린 시절의 결핍을 채우면서, 투니버스 채널이 나왔다면 나는 조금 다른 어른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종이만화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여러 작가의 작품이 실린 잡지를 읽었던 것이 내가 기억하는 만화책과의 첫 만남이다. 이 책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를 읽으며 추억의 이름을 다시 만났다. 아마 <윙크>였을 것이다. 그때 허겁지겁 넘겼던 페이지에 어떤 만화가 실려있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 재생종이의 촉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허겁지겁 읽었던 이유는 친구가 마음이 변하면 언제 다시 놀이터로 나가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부드러운 종이에는 손을 베이지도 않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본 만화에 그렇게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만화 보기에 특화된 인재였다. 초등학교에 갓 들어갔을 때 그림 네 개를 자기 마음대로 배열하고, 어떤 이야기가 될지 제멋대로 지어내는 활동을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성장기의 열정에 불을 지필 자원이 부족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투니버스는 결국 갖지 못했지만, 지우와 친구들 그리고 로켓단, 자신의 원래 몸을 찾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어 보이는 꼬마 탐정, 양파를 싫어하는 천방지축 어린이, 우주 방랑 소년, 탱크 보이, 수녀 친구를 등에 업은 정의의 도둑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다.
조용하고 열렬한 시청자였던 이 어린이는 그중에서도 변신 소녀들을 유독 좋아했다. 복숭아 소녀들과 행성 소녀들. 친구들과 어느 캐릭터가 제일 좋니, 누가 제일 꼴불견이니 열심히 토론했다. 나는 수성을 상징하는 소녀와 단발인 헤어스타일 때문에 가장 인기가 적었던 소녀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느슨한 평화주의자였기에 대부분의 캐릭터를, 악역까지도 원만하게 포용했던 편이었다. 주로 개성 강한 친구들 앞에서 캐릭터들을 변호했다.) 씩씩하고, 허술하면서도 자주 비장해지고, 지구를 갖가지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켜내야 했던, 왕관의 무게를 감당한 소녀들.
한국 순정만화의 계보를 다루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그 소녀들을 떠올렸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집중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저자는 주로 80~90년대 (내가 모르는) 작가들의 (모르는) 작품들을 스토리라인부터 주제의식까지 자세히 다룬다. 앞에서 설명했던 작품이 뒤에 등장하는 작품과의 연관성 때문에 다시 소환되곤 했다. 각각의 작품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무려 계보를 논하는 책이 아닌가.
저자는 순정만화에 대한 숱한 폄하의 목소리를 지적한다. ‘순정만화’는 내용이 아니라 주요 독자층을 의식해 거칠게 묶은 분류명이며, 이 명칭에 대한 은근한 비하와 편견은 뿌리가 깊다. 뛰어난 성취를 거둔 작품을 칭찬할 의도로 ‘순정만화를 뛰어넘은 작품’이라는 웃지 못할 표현이 쓰이기도 한다. 실제로 순정만화라는 말이 일종의 멸칭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탄탄한 플롯, 개성 있는 인물, 신선한 소재 등 작품성과 밀접한 요건을 발전시키는 데는 소홀하고, 소녀팬들을 불나방처럼 몰려들게 하는 러브라인에만 치중한다는 시각이 깔려있다. 평범한 소녀가 소위 냉미남과 온미남을 양 옆구리에 끼고 행복한 고민을 즐기거나, 사회와 나라와 전 세계의 고민이 이런 ‘연애 놀음’ 앞에서 덜 중요한 것으로 축소되거나.
물론 순정만화라고 불리는 만화들은 러브라인을 활용한다. 하지만 책, 영화, 연극 등 장르를 초월해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 중에서 사랑 이야기를 하지 않는 작품이 어디 흔한가. 이성이나 동성 간의 사랑을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의 가치를 낮추어 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사랑 이야기가 전부인 작품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작품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애정관계가 한 축인 모든 작품에 혐의를 두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가끔 ‘로맨스 영화’가 싫다고 말한다. 그 말은 로맨스로 점철되었으며, 다른 요소가 너무 부실해서 차라리 빈 화면을 보면서 나초를 먹는 게 더 나은 작품이라면 지금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로맨스가 들어간 모든 작품을 배척하는 게 아니다.)
안타깝게 종료되고, 잊힌 작품들에 마땅한 위치와 역사성을 찾아주어야 할 때다. 저자는 80년대부터 최근까지 발표된 한국 순정만화에서 적극적으로 SF의 흔적을 찾으며, 도매 취급을 당한 작품들을 재조명한다.
사실 순정만화란 그저 로맨스를 다루는 장르의 갈래가 아니라, 그냥 주력 향유층에 따른 갈래에 가까웠다. 그 갈래 안에서 순정만화를 빙자하여 온갖 것들이, 혁명을 말하는 청년들이, 부친 살해가,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자아에 대한 질문과 정상성에 대한 의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는 그저 순정만화로 호명되었다. (p.13)
그래서 내가 궁금했던 질문으로 돌아간다. 복숭아 소녀와 행성 소녀들을 포함해 그 당시에 내가 보았던 소녀들의 이야기를 순정만화라고 할 수 있을까.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러브라인들이 분명 존재했으니 그렇게 부를 수 있겠다. 하지만 그 관계의 행방을 알기 위해 만화를 본 것은 아니다. (양보하자면 그다음 편을 보는 동기가 되었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TV앞에 끝까지 앉아있게 한 동력은 아니었다고.)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방대한 세계관보다는 화려한 의상과 액세서리에 현혹되었지만, 어쨌든 이야기에서 러브라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녹차 아이스크림에 들어가는 녹차의 비율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결국 작품별로 달라지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으며 아는 작품이 등장하면 속으로 환호하고, 그 작품들을 SF로 간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짜릿함을 느꼈다. <궁>이 대체 역사물이라고? <좋아하면 울리는>이 SF작품이라고? 작품에 대한 애정이 한층 샘솟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출판되어, 너무 어려서, 찾아보지 않아서 몰랐던 작품들에 대해 읽었을 때와는 확실히 온도 차이가 나서 아쉬웠다. 작품 사이의 연결성과 역사적 의의가 중요한 테마였는데, 사실 직접 읽지 못한 작품에 대해서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이런 책을 만날 수 있음에 일단 감사하기로 한다. 전자책으로 읽었는데, 책 마지막 장에는 오래된 작품들을 지금 읽을 수 있는 링크가 실려있다. 달려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