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그 23. <무증거 범죄>

쯔진천 지음 / 한스미디어

by 몬순

중국 작가의 추리소설을 처음 읽어보았다. 사실 먼저 읽고 싶은 책은 따로 있었다. 같은 작가가 쓴 <동트기 힘든 긴 밤>이라는 소설이다. 한 검찰관이 10년 동안 국가 권력에 맞서 투쟁한 내용이라는 소개를 읽고, 중국에서 저런 소설이 출판된다는 데 호기심을 느꼈다. 일당 독재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법제도의 실패를 꼬집는 소설이 나올 수도 있다니.


생각해보니 일본 추리소설은 자주 읽는 편인데, 중국 추리소설은 아예 찾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중국'과 '추리소설'을 묶는 게 아직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추리소설이 대부분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자. 대부분의 작품 초반에 살인 등 강력범죄가 발생한다. 그리고 형사나 탐정 역할을 하는 인물이 범인을 추적한다. 사건이 진행될수록 주인공은 실패를 거듭한다. 스스로 헛발질을 하거나 진실을 찾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거나. 대개 둘다인 경우가 많다. 범인의 정체는 미궁 속에 빠진다. 남은 책장이 얼마 되지 않을 때 주인공이 뜻밖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범인은 독자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인 경우가 많다.


반전의 재미를 주는 것이야 문제 될 일이 없겠지만, 사회파 미스터리가 아니더라도 장르 자체가 체제의 무능을 어떤 식으로든 드러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건의 발생과 동시에 가장 중요한 단서를 착, 범인의 뒷덜미를 딱 낚아채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한 챕터만에 이야기가 끝나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어설픈 초동수사, 의욕만 넘치고 무능한 형사, 허점투성이의 사법제도가 나올 수밖에 없다. 재미를 위한 장치인 동시에 현실 반영적인 요소이기도하다. <차일드 33>에서 등장했던, 지상 낙원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지키기 위해 살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구소련 정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도 썩 추리소설 장르를 반기진 않을 것 같다. 이건 내 짐작일 뿐이다.


어쨌든 내 눈앞에 중국 추리소설이 있었다. '추리의 왕' 시리즈를 썼으며, 중국 3대 추리소설가 중의 한 명이라는 쯔진천의 책. (나머지 둘은 출판사의 책 소개 페이지에 따르면 레이미雷米, 저우하오후이周浩暉라고 한다.) 중국에서 어떤 추리소설이 인기있는지 궁금했고, 지독한 순한 맛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처음 뵙겠습니다'라서 의미가 남달랐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그렇듯, 처음 만나는 책도 출신국가에 대한 특정 인상을 심어주기 마련이다. 한강의 소설을 처음 읽었는지, 박상영의 소설이 처음이었는지에 따라 외국인이 받는 한국문학에 대한 느낌이 전혀 다르지 않을까. 첫인상에서 벗어나 확장하는 것이 중요함은 물론이다.


결론적으로 출발이 좋았다. 중국 추리소설과의 첫 만남이 이 책인 것도, 이 책의 도입부도 좋았다. 이렇게 배려가 뛰어난 작가는 오랜만이다. ‘서막’의 첫 장을 펼치며, 히가시노 게이고 식의 1막을 기대하고 있었다. 의문의 장소에서, 의문의 인물이 끔찍하게 최후를 맞는, 이어질 본격적인 이야기의 한 조각임은 분명하지만 어느 부분에 들어가게 될지 바로 짐작하는 게 불가능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했다. 흥미진진하고, 독자의 호기심을 쥐고 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 책은 서막에서 앞으로 벌어질 몇 가지 사건과 관련 인물을 몇 문장으로 요약해 보여주며, 관련 없어 보이는 그 사건들이 사실은 한 몸으로 이어져 있다는 언급까지 해준다. 서문의 내용과 전체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1) 천재 법의학자였던 뤄원이 8년째 실종된 아내와 딸을 찾아다닌다. 2) 항저우시에서는 3년 동안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범행도구는 늘 줄넘기 줄이다. 범인은 사건 현장에 특정 브랜드의 담배 한 개비와 ‘나를 찾아주세요’라고 쓴 종이, 심지어 지문까지 대담하게 남겨놓지만 경찰은 어떤 단서도 잡지 못한다. 3) 항저우시에 사는 어떤 여자와 그 여자를 몰래 좋아하던 남자가 깡패를 우발적으로 죽이게 되는데, 어떤 중년 남자가 그들을 목격하고 사건을 은폐할 방법을 알려준다. 4) 깡패 살인사건을 조사하던 경찰은 이 사건이 연쇄살인사건과 연관 있음을 깨닫는다. 4) 범죄논리학 전문가이자 경찰이었지만 지금은 수학교수로 일하는 옌링이 사건 해결에 가담하는데, 그는 범인의 범행 동기를 발견하고 충격에 빠진다.


첫인사가 친절했다고 순순히 패를 다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범인의 정체는 이차적인 문제다. 누구인지 확실히 밝혀지는 순간 약간의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큰 반전은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범인의 동기다.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알아내는 것이 물증이 없는 사건을 해결할 돌파구가 된다. 옌링이 고단수의 범인과 대적하는 것을 고차원 방정식 풀이로 비유하는 것이 흥미롭다. 공식이 존재하는 다른 방정식들과 달리 5차원 이상의 방정식은 직접 대입을 통해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범인을 제대로 가정했다면 그가 남긴 증거를 대입해보았을 때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자신을 체포할 수 있는 유효한 단서를 남기지 않는 범인을 체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범행을 저지를 때는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유속이 느린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닮았다. 연속적인 반전의 충격보다 '왜'라는 질문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용의자X의 헌신>과 설정면에서 유사하다고 말이 많았다는데, 이 책의 작가가 이미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2012년에 <용의자...>를 읽고 사회파 미스터리를 써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니 더 이상 논란이 될 여지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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