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 모모
책도 낡는다. 누렇게 변색되거나 잦은 손길에 얇아진 책장, 색이 바랜 표지 등 책의 물성은 물론이고 속에 담긴 콘텐츠도 마찬가지다. 바깥의 시간은 흐르고 있지만 책의 시간은 발간된 당시에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과거의 책을 현대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작업도 물론 필요하지만, 21세기의 눈으로 내용과 그것을 쓴 작가의 후진성을 질타하는 것을 보면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다. 질타해야 할 것은 오래된 것을 비판의식 없이 무조건 고전으로 추앙하고 있는 이 시대의 게으름이 아닌가 하고.
어쨌든 어떻게 보면 가는 세월이 가장 야속한 것이 본격 미스터리 장르가 아닌가 싶다. 본격 미스터리는 탐정이 등장해 트릭의 존재를 간파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주력하는 추리소설의 세부 장르다. 범인도, 탐정도 둘 다 똑똑해야 하고, 둘의 지력에 너무 큰 차이가 나서도 안된다. 탐정이 남들과 비교 불가능한 천재이고, 범인은 허점투성이의 좀도둑이라면 책은 한 챕터 만에 끝날 것이다. 탐정의 추리력과 범인의 계략이 어느 정도 밸런스를 이뤄야 똑똑한 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다. 나는 추리소설광은 아니기 때문에 서사가 흥미진진하게 이어질 정도면 불만 없이 끝까지 책을 붙드는 쪽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사법권력을 비웃듯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범인들의 시도를 현대에 와서 상당 부분 무력화시키는 것이 있으니, 바로 과학수사다.
물론 과학수사시스템이 도입되고 난 후에도 미제로 남은 사건들이 있으니, 과학수사가 만능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기보다는 범인들이 억세게 운이 좋은 경우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기술과 법의학의 발전으로 범인이 남긴 아주 작은 흔적으로도 수사망을 좁힐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단서를 보관하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범인을 검거할 가능성이 생긴다.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엄청난 진보다. 그래서 이전 세대의 추리물을 읽으면, 채 20분이 안되어 이렇게 얘기하게 된다. 아, 이 추측은 좀 말이 안 되는데. DNA 검사만 하면 되는데 아쉽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했던 생각이기도 하다. 무려 30년 전에 나온 추리소설이다. 노리즈키 린타로는 본격파를 계승한 신본격파의 주요 멤버로 손꼽히곤 한다. <요리코...>는 그가 대학 재학 시절 미스터리 서클에서 활동했을 때 발표한 작품에서 기본 플롯을 가져와 확장시킨 작품이다.
책은 유지가 자살을 기도하기 전 써놓은 열흘 동안의 수기로 시작한다. 그의 딸인 고등학생 요리코가 살인범에게 희생당한다. 경찰은 이 사건을 과거에 연속적으로 일어났던 성범죄와 연결하지만, 유지는 경찰의 추론에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요리코가 살해당했을 당시 임신 중이었던 것을 알게 된다. 딸을 임신시킨 사람이 살인범일 거라는 가정 하에 그 남자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며, 확실한 증거를 잡으면 그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기로 다짐한다. 결국 살인에는 성공하지만, 자살에는 실패한다. 요리코가 다니던 명문 고등학교의 이사장과 유력 인사는 학교의 이미지를 실추시키지 않기 위해 탐정인 노리즈키 린타로를 고용한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보다는 대중에 널리 알려진 탐정을 고용해 진상 규명에 최선을 다한다는 인상을 주고 사건을 묻어버리기 위함이다. 그러나 린타로는 아버지 유지가 남긴 수기에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고 진실을 찾기 위해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린타로가 의문을 제시하기에 앞서 유지가 살인 대상이 될 후보를 골라내는 과정을 읽으면 이미 의문이 싹튼다. 나름 논리적인 기준을 세우지만 어디까지나 추론에 지나지 않을 뿐, 죽음으로 책임을 묻기 위한 선발이라기에는 너무 불확실한 방법이다. 임신한 상태로 살해당했으면 아이의 친부가 살인범일 가능성을 높게 보고 DNA 검사를 했으면 됐을 텐데, 당시 일본 또한 충분한 기술과 수행 능력이 없었나 보다. 유지는 수기를 통해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지만, 아무리 봐도 죗값을 제대로 묻는 일보다 무차별 살인에 가까워 보인다.
결국 린타로가 밝혀내고 독자가 확인하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편이 좋았을 혼란스럽고 끔찍한 진실이다. 린타로의 말을 듣고 인물들이 보인 행동으로 그의 추리가 타당했다는 것이 증명되지만 영 뒷맛이 개운치 않다. 시대적 한계라고 눈감아줄 수 있는 부분은 DNA 검사 등 과학기술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다는 사실, 딱 거기까지다. 아무리 봐도 추리를 완성시키기 위해 인물의 성격을 단편적으로 무리하게 설정했다는 느낌이 든다. 사건의 시작이자 결말인, 책 속에서는 이미 살해되어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했던 요리코를 설명하는 방식이 그렇다.
작가는 린타로를 통해 왜 요리코가 죽어야 했는지 서술하며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의 지적은 일정 부분 옳다. 요리코를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유지를 포함해 결국 산자들 중에 요리코를 진정으로 위하는 사람은 없었다. 요리코에 오롯이 집중했고, 그랬기에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던 린타로가 유일하게 요리코만을 바라본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제목과 어긋나는 충격적인 결말은 확실히 인상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요리코의 상처를 대변하려는듯한 엔딩에서, 일본에서 여고생이 어떤 전형적인 이미지로 소비되는지 엿보이는 게 상당히 씁쓸하다.
시리즈에 걸쳐 탐정 일에 관한 린타로의 고뇌를 깊게 그려내는 작가가, 왜 요리코의 선택을 그렇게 형상화했는지는 의문이다. 일본에서 ‘여고생’이란 어떤 존재인가. 작가에게 요리코라는 인물은 어떤 존재인가.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결말을 완성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었을까.
흥미로우나 조금 불쾌했던 독서 경험이었다. 내 잣대가 옳은 것이었는지는 시간을 두고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