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그 28. <페인트>

이희영 지음 / 창비

by 몬순



매일 무엇을 입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교복쟁이 시절을 생각해본다. 너무 지루해서 끈끈하게 고여있다고 느끼는 순간들도 많았지만, 사소한 차이에서 행복을 느끼는 법을 배웠던 때이기도 했다. 매일 가는 똑같은 매점과 식당은 매일 다른 기쁨을 발견하는 장소였다. 친구 따라 처음 먹어본 라면이 첫인상과 다르게 꼬들꼬들 맛있거나 배식 아주머니가 탕수육을 한 점 더 주시면 그날은 즉시 행복한 날이 됐다.


물론 두드러지게 특별한 날도 있었다. 매일 반복되면 이벤트라고 부를 수 없다. 선생님들이 유일하게 학생인 우리에게 존댓말을 쓰는 날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학부모와 장학사, 그리고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장학사가 교실에 찾아오는 날이었다. 무대 동선을 지시하는 연출처럼 진지한 선생님을 제외하고 교실의 모두가 반 스푼 정도 더 유쾌했다. 재미의 가장 큰 지분은 선생님이 진땀 흘리는 모습을 관찰하는 데서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선생님들에게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늘 평가의 주체였던 선생님이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함께 공모자가 되는 느낌까지 더해져 선생님이 왠지 더 가깝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중고등학교에서도 선생님의 스타일에 따라 질문마다 대답자가 사전에 정해지기도 했다. 실제 수업 시간에 "대답해볼 사람?"이라는 질문 뒤에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손이 올라가는 것을 봤을 때 느꼈던 소름 돋는 어색함이란.


이처럼 기존의 질서를 뒤흔드는 데서 이야기는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수직적 관계만 존재했던 교실에 또 다른 평가자인 장학사가 끼어들고,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가 마치 모종의 계약 하에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조금 더 동등한 관계로 전환되는 것처럼. 물론 선생님의 지시로 이루어지는 일이었지만, 평소 선생님의 처사에 불만이 가득했던 학생이라면 보이콧을 선언할 가능성도 있지 않겠나.


책 <페인트>는 모두가 알고 있는 기존 관계를 전복하는 설정만으로 이미 흥미롭다. 국가가 운영하는 시설에서 아이를 양육하고, 아이들이 18살이 되기 전까지 면접을 통해 자신의 부모를 설정하는 미래의 한국이 배경이다. 주인공은 양육 시설인 NC센터에서 생활하는 생각 깊은 17살 제누. 센터를 나가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아직 부모를 선택하지 못했다. 그가 만난 예비부모들은 아이에 대한 진심 어린 마음보다 국가에서 지금 하는 양육 보조금 등 복지 혜택에 대한 욕심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효과적으로 숨기기 위해 연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일종의 안전장치가 있다. 부모를 만나고 싶은 아이와, 아이를 데려가고 싶은 부모에게는 만날 수 있는 삼세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책 제목인 <페인트>는 작품 속에서 NC센터의 아이들이 '부모 면접(parent's interview)'를 일컫는 은어다. 우리는 감히, 아이가 자신의 부모를 선택한다는 가정을 해본 적이 없다. 아이의 탄생부터가 아이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물론 아이가 부모를 평가할 수는 있지만, 현재의 부모 자식 관계에서는 그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부모가 자식에게 원하는 삶의 모습이 있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지만, 자식이 부모를 다른 부모들과 나란히 세워두고 평가하는 것은 불경하게 느껴졌다.


전복적인 상상력이 무조건 유쾌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것이 무조건 유쾌하거나 의미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기존 질서에서의 일탈이 최소한 '어, 이럴 수도 있네?' 정도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능성이 보여주는 미래가 의미 있어야 한다. 즉, 유쾌한 상상력은 쓸모 있는 상상력이기도 하다. 기존 질서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왜 그런 질서가 생겼는지 자문하게 하고, 신선함을 느끼며 동시에 대안 역시 비판적인 눈으로 검증하게 해 준다.


<페인트>에서 보여주는 미래가 우리의 미래와 얼마나 비슷할지는 알 수 없다. 10년 안의 근미래라면... 예언적이라기보다는 소설적인 상상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가족관계에 던지는 메시지는 유효하다. 가족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은 생각해볼 만하다. 가족은 자신의 이상을 투영하는 설계물이 아니고, 전통을 불변의 진리처럼 떠받들며 늘 살아왔던 대로, 남들이 사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구성원들의 의사이고, 함께 행복하기 위한 의지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오랜만에 떠오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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