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그 32. <인간의 흑역사>

톰 필립스 지음 / 윌북

by 몬순



어제 자기 전에 영화 <4등>을 봤다. 개봉 당시부터 봐야지, 하며 보석함에 넣어만 놨던 영화다. 몇 줄의 짧은 설명만으로 구미가 당겼다. 시놉시스 외에 다른 정보가 없었는데, 영화가 시작되고 박해준의 이름이 뜨자 ‘오?’ 싶었다. <부부의 세계> 출연 이후 박해준이 이전에 출연했던 몇몇 영화에서 강렬한 악역으로 주목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급된 <독전> 등을 보지 못했기에 어떤 연기를 했을지 궁금했던 차였다.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주목받던 수영 국가대표, 아시아게임을 앞두고 선수촌에서 무단이탈했고 복귀한 날 감독의 심한 폭행으로 결국 선수촌을 뛰쳐나온 인물.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광수(박해준)의 프로필이다. 시간이 흘러, 어떻게든 아들을 1등으로 만들고 싶은 준호 엄마가 수영 코치가 된 광수를 찾아온다. 광수는 준호 엄마에게 수영장 출입 금지령을 내린다. 교육 철학인가, 했지만 뻔뻔스럽게 기대를 배반한다. 준호는 수영장 대신 PC방 의자에 푹 눌러앉은 광수를 발견한다. 도박과 자만에 빠져 훈련에 불참한 과거의 광수나, 흐릿한 눈매로 게임에만 빠져있는 현재의 광수나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더 큰 문제가 남아있다. 어쨌든 단기간의 특훈이 효과가 있었는지 만년 4등이던 준호는 2등을 차지한다. 준호의 집은 축제 분위기다. 준호 엄마는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눈치챘지만, 그에게는 결과가 전부다. 그리고 동생 기호는 아빠가 있는 자리에서 해맑게 묻는다. “옛날에는 안 맞고 해서 4등 했던 거야?” 자신 또한 폭행으로 선수생활을 그만뒀던 광수가 아이에게 매를 휘둘렀던 것이다. 그는 불 같이 화를 내는 엄한 스승과 먹을 것을 사주고 마사지를 해주는 자상한 스승의 모습을 번갈아 연기한다. 자신은 성적이 좋아 얼차려 등 기합에서 제외되곤 했다며, 그때 스승들이 자신을 더 엄하게 대했으면 자신의 미래가 바뀌었을 텐데 아쉽다고 말한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논리는 자신을 때렸던 국가대표팀 감독의 말과 섬뜩하게 닮아있다.


-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게 진짜 스승이다, 나중에 네가 나한테 감사할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흑역사는 세대를 넘어 전승된다.


우리는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인간의 흑역사>는 이 질문에 답하는 블록 초콜릿 같은 책이다. 역사 마니아들이, 잡학다식러들이, 발췌독 러버들이 반길만한 풍부한 ‘바보짓 사례집’이다. 정치, 경제, 환경 등 각 분야에서 인간이 저지른 코미디 같은, 코미디였으면 좋았을뻔했던 실책을 소개한다. 꽤 아픈 실수에서 대규모 재앙에 이르기까지, 바보짓의 스펙트럼은 폭이 넓다.


사례를 읽기 전에 왜 우리가 흑역사를 재생산하는지 알아봐야 한다. 우리는 뇌가 접한 정보를 기준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가장 쉽게 떠올리는 정보와 기준으로 세상을 파악한다. 이 ‘기준점 휴리스틱’과 ‘가용성 휴리스틱’은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복잡한 현대사회 속에서 현명한 선택을 내려야 할 때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본능 대신 이성에 힘을 싣는 것도 노력만으로는 쉽지 않다. 자신의 믿음에 부합하는 정보만 레이더망 안에 들이는 ‘확증편향’과 자신의 선택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선택 지지 편향’ 때문이다. 우수한 사회적 동물이다 보니 눈치코치 아는 어른이 되려다가 ‘집단 사고’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다. 인지적 오류 중에서도 저자가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근거 없는 낙관과 지나친 과신이다.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한다는 게 ‘더닝 크루거 효과’ 이론이다.


또한 늘 내일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은 ‘소망적 사고’로 미래를 바라보곤 한다. 개인과 집단의 탐욕, 이기심이 이런 태도를 지탱하는 축이다. 자신과 조직의 이익만을 좇다가 다 함께 망하는 길로 접어들게 된다. 잘 모르는 타인을 단면으로 파악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믿은 채 이런저런 편견에 근거해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이런 경향이 집단의 광풍과 만나게 되면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적 사건들이 언제라도 재현될 가능성이 있다. 예전 사람들이 특별히 멍청해서 인류 역사가 멍청한 사건들로 점철된 게 아니라는 점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나면, 이 책을 읽을 준비는 끝난 셈이다.



- 밑줄 긋기


역사상 최악으로 꼽히는 인재들은 대개 천재 악당의 소행이 아니다. 오히려 바보와 광인들이 줄지어 등장해 이랬다 저랬다 아무렇게나 일을 벌인 결과다. 그리고 그 공범은 그들을 뜻대로 부릴 수 있으리라고 착각한, 자신감이 넘쳤던 사람들이다. (챕터 ‘대중의 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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