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그 38. <아쿠아리움>

데이비드 밴 지음, 조연주 옮김 / 아르떼

by 몬순



닫힌 결말의 팬이다.


싸움이 있으면 화해도 나오는 게 좋겠다. 갈등이 있다면 봉합의 과정이 뒤 따라 나와야 한다. 상처가 생기면 아물어야 한다. 완전히 그 상처가 아물지 않더라도 적어도 딱지는 앉았으면 좋겠다.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 속에서는 더 그것을 바라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왜 이렇게 좁냐, 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가도 종종 도망치기에 세상은 결코 좁은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다. 싸움의 상대가 나를 두고 사라지기도 하고, 내가 링을 먼저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어떤 갈등은 끝내 해결되지 않고, 어떤 상처는 절대 아물지 않는다. 상처를 주고받은 사람들은 지지부진하게 멀어진다. 가끔 내가 겁쟁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일과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좋은 방법이며 가끔은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겁쟁이라도 가끔 정면 대결을 꿈꾼다. 단단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내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과거나 현재의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고 싶다. 삶에서 부딪히며 배우는 게 가장 좋겠지만, 간접체험도 훌륭한 시뮬레이션이 된다. 생각하기 싫은 기억이 밀려오더라도 이야기라는 완충물이 있으니 내상의 위험이 적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힌다면, 어떤 상처든 개선의 여지는 있을 거라고. 억지로 잊고 덮어두려고 하기 때문에 상처가 덧나는 거라고. 하지만 책 <아쿠아리움>을 읽으며 '상처의 치유'라는 게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 욕망을 발견한다.


도망가지 않는 인물이 과거의 상처에서 자유로워지는 모습을 꼭 보고 말겠어. 이건 대리만족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엄마와 단둘이 살아가는 소녀. 매일 힘든 노동에 시달리는 엄마와 태어난 도시에서 한 발짝도 나간 적 없는 소녀의 고단한 삶. 그들의 세상은 소녀가 매일 엄마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잿빛 아쿠아리움과 닮았다. 눈과 얼음 한복판에서 서 있는 무미건조한 삶. 적어도 아쿠아리움 속의 물고기들은 자유롭게 헤엄치기라도 하지.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아버지, 그러니까 소녀의 할아버지가 불현듯 나타난다.


책 초반 주인공 소녀 케이틀린이 낯선 노인을 만나는 장면을 읽었다.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걸 보니 과거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는 것 같고, 그가 다시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겠다고 짐작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 케이틀린의 엄마가 생각보다 더 격렬히 반응하는 데 놀랐다. 나도 모르게 견적을 냈나 보다. 청소년 문학인 것 같으니 갈등은 짧고, 확실한 행복이 결말에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응당 겪어야 하는 갈등 이후에 모두 행복의 (적어도) 첫 계단을 밟게 될 거라고.


케이틀린의 엄마가 돌아온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는 상식적이지 않다. 어린 자식을 버려두고 떠난 아버지이니 온당한 반응이다. 하지만 정말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것은 딸에게 하는 행동이다. 할아버지를 반기는 딸에게,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것의 무게를 똑똑히 알려주고야 말겠다는 속셈이다. 상처의 대물림이라고 해야 할까. 그보다는 과거의 상처가 일으킨 연쇄반응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대물림이라고 쓰면 너무 무력해 보인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 딸을 책임지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왔다. 자신이 겪었던 일을 딸이 겪지 않도록, 딸은 다른 세상에 살 수 있도록.


하지만 결국 오래 숨어있었던 내면의 아이가 튀어나온다. 그리고 딸에게 상처를 입히고야 만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안전하다. 직업이 있고, 서른 두 살이다. 나는 이 도시에서도 좋은 구역에 살고 있다. 나는 용서하고 또 잊어야 할 것이다."


이 문장은 책의 결말이 아니라 중간 부분에 나온다. 과거를 돌아보는 케이틀린의 다짐이다. 이 구절 이후에 왠지 먹먹해져 책장을 넘기기가 싫어졌다. 엄마를 용서하는 것이 케이틀린에게 아직도 현재의 과제로 남아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책이 끝나더라도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용서라는 테마를 볼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영화 <밀양>이다. 세상에는 불가능한 용서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영화다. 이 주인공에게는 끝없이 원망할 대상이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간 범인이다. 하지만 원망의 대상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떡하나. 가족 말이다.


아이에게 부모는 온 세상이다. 고립되어 살아가는 케이틀린에게는 특히 그랬고, 케이틀린의 엄마에게도 할아버지가 온 세상이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언제까지나 아이에 머무르지 않는다. 성장하며 부모 밖의 세상을 만나고. 자신만의 비밀을 만든다. 책에 나온 극단적인 사례는 아니더라도 모든 부모 자식 관계에는 충돌이 있다. 부모 또한 테두리가 한정된 불완전한 인간이다. 아이의 모든 변화를 따스하게 품어주는 것은 지향점이지만, 늘 닿기 위해 애쓰는 목표다. 아이는 부모의 손을 붙잡고 큰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보호와 관심을 뛰어넘어 스스로 서야 한다.


갈등과 상처는 그 과정의 부산물이다. 우리 모두의 몸에는 그 흔적이 흉터로 남아있다. 영광의 흉터이지만, 성인이 된 후에도 가끔 통증을 유발한다. 함께 한다는 것은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가까워지기 위해 치고받고 싸울 필요는 없지만, 상처가 없는 무결점의 깊은 관계는 없다고 믿는다. 아무리 조심하고 서로 배려하더라도.


어쨌든 이미 다쳤다면,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잘 나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시시할 수도 있겠지만 책이 제시한 길은 '잊는 것'이다. '어린 시절, 가장 힘든 것은,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다 지나가버린다는 것을, 그 시간들도 결국 지나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점'이라고 케이틀린은 말한다. 이또한 지나갈 일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바로 그 순간에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못했던 우리 대부분은 과거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발견이라고 느껴지는 것들은 단지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문득 드러나는 것'일뿐이다. 관계가 개선되었다는 신호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슬쩍 드러나기만 한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망각은 인간이 받은 축복이다. 모든 흉터는 결국 연해지고 흐려지다가 더러는 사라질 것이고, 어떤 것은 깊숙이 남을 것이다. 단순히 과거의 상처를 방치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살다보면 자연스레 덮어지는 일도 있겠지만, 적극적으로 돌보아야 할 상처도 있다. 케이틀린의 엄마는 긴 세월 이후에도 아버지를 향한 생생한 분노를 토해냈다. 대상이 없어진 분노는 메아리처럼 그대로 가슴속에 남았을 것이다. 해결되지 못한 분노의 불씨는 사라지지 않고, 다시 때를 만나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책장을 덮는다. 화해와 용서, 성장을 (쉽게) 보고자 했던 기대가 내 속에 있었음을 다시금 분명히 깨닫는다. 책이 보여준 것은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한편, 일단 도망가지 않으면 기회라도 생기겠구나 하는 희망도 생긴다. 용서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용서는 기다린다고 당연히 주어지는 티켓이 아니다. 그러나 기다리지 않으면 용서의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 감당해야 할 인연이라면, 쉽게 도망가지 말자. 사라지지 말자.


엄동설한에 무릎을 꿇고 눈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기다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잘못을 빌어야 한다면 제대로 된 용서를 받고 싶다. 당장 '미안해'라는 말을 끈질기게 되풀이하다가 질린 표정의 상대에게서 '응, 괜찮아, 너 용서함'이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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