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아라 Nov 09. 2021

내 사랑, 정식

11월 9일 작성

안녕하세요.

또 오랜만입니다. 잊을만하면 날아오는 편지가 반가웠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겨울 게으름을 실컷 부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레시피가 아닌 홈그라운드 델리숍을 운영하면서 만들게 된 델리밀 정식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해요. 골고루 갖춰진 음식을 먹었을 때의 만족감이란, 정식 사랑은 어쩌면 어릴 때부터 먹어 온 백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싶어요. 지난 사진들을 타임라인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며 또 한참 그때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추억이 아닌, 정말 열심히 즐겁게 살았음을 보여주는 사진들이었거든요.


여하튼 흰 밥과 다양한 반찬이 갖춰진 백반을 먹고 자라 온 사람으로 백반은 늘 반갑고 생각나는 음식입니다. 요즘처럼, 간소하게 또는 한 그릇에 모두 담겨 나오는 외식과는 어딘가 분명히 다릅니다. 정식이라 하면, 잔치를 벌일 때 찾아가던, 반찬을 비롯한 음식이 끊임없이 나오는 한정식 집이 먼저 생각납니다. 부모님, 조부모님 댁에서 잔뜩 차려놓고 먹을 때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가족 행사에서 누구도 고생하지 않고, 먹고 즐겼으면 하는 마음으로 1년에 한두 번은 친지들과 모여 한정식 집에서 먹고 마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SNS, 포털 사이트, 티비 프로그램의 맛집 소개 같은 채널이 없던 시대에는 어른들, 선배들의 입을 통해 소문난 집들이 있었죠. 계속 나오는 반찬과 음식에 감탄하며 신나 했지만, 그때는 그 노고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어린이였습니다. 서울로 학교를 와서는 너무나 단출해진 반찬의 가지 수가 좁고 지저분하고 비싼 방보다 더 놀라웠습니다. 빈부를 떠나 기본 반찬의 가짓수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일상이라고 이전에는 생각했기 때문이죠. 가까운 종합병원이나 학교, 회사의 구내식당에서 좋은 백반을 팔면 그야말로 삶의 질이 바로 상승한 것처럼 아주 만족스럽고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네, 슬프게도 이제는 외부에도 문이 열린 구내식당을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좋아하는 백반집인데 반찬을 다시 쓰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가지 못하는... 반찬을 남기지 않으면 그럴 일이 없으니 부족하면 더 주십사 할 테니 조금만 담아달라고 합시다.


백반은 아마 누구에게나 정서적, 물리적 포만감을 줄 수 있는 좋은 음식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많은 정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난 델리숍을 운영하며 절절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늘 감사히 먹는 음식 중에 하나가 되었어요. 델리숍에서는 여러 양식이 혼재된 자유로운 반찬과 주먹밥, 메인을 차렸는데요. 구성원의 개성을 반영한 메뉴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한식을 구성해서 시도하기엔 무림고수가 너무 많고, 고생에 비해 가격이 아주... 그렇다고 매일 먹을 수 있어야 하는 밥이기에 이유가 있는 단가로 책정하긴 힘든데, 직접 해서 먹자면 손이 아주 많이 가고 음식쓰레기가 제법 나오는, 이 백반을 누군가는 사라질 수 있는 음식점의 음식 중의 하나라고 예언했습니다. 적어도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요. 김밥집도 사라지고 있는 걸 보면 늘 동네를 구석구석 걸으며 좋은 백반과 맛있는 김밥집을 찾아보고, 기억해두는 저로서는 조금 슬픈 일인 것 같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도 외식을 참 안 하는 편이었지만, 바이러스가 등장한 이후, 더 방문하지 못해서 사라지는 속도에 기여한 것도 같아요. 그렇지만 남의 밥짓기는 무진 힘들고, 희생-봉사 정신과 자부심이 없으면 지속할 수 없으니, 계속해야 한다고 조를 수 없고, 대신 국가적인 지원이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것이 바로 좋은 백반 공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운동도 중요하지만, 골고루 잘 챙겨 먹는 일은 도시에서 개인이 모두 해결하기에는 생각보다 큰 문제입니다. 잘 선택하는 교육조차도 적절히 이뤄지지 않고 있죠. 매일의 균형 잡힌 식사는 건강과 복지 정책에서 당장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반드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 영양사님은 동네마다 잘 갖춰진 구내식당이 하나씩 있는 것이 그 동네의 생활 만족과 건강 지수가 올라가는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라고 했어요. (제 머릿속에도 그런 몇 곳이 생각나네요.) 채소는 정말 섭취 정도를 신경 써야지 필요량을 채울 수 있거든요. 그래서 외식을 하게 되면, 본의 아니게 균형을 생각해 여러 음식을 시키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물론 음식과 관련한 일을 하게 된 다음부터 더 편하게 여러 가지를 골고루 누려보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경험으로… 또! 제가 이 분야에 입문하게 된 통로였던 장진우 씨가 어김없이 생각나네요. 당시 그는 경리단, 해방촌, 이태원 구석구석 맛집들을 꾀고 있었는데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이국적인 동네의 분식집, 백반집, 양식집, 클럽 등, 잠깐 놀러 갔어도 어디선가 "아라~!"하고 불러 세우던 장진우 씨가 있던 그때의 이태원에서 함께 일을 하다 어느 분식집에 갔습니다.


"어 여기 돈가스가 진짜 맛있고, 김치볶음밥도 맛있고, 찌게도 맛있어~"

"음 그럼 전 김치볶음밥."

"사장님, 여기 돈가스, 김치볶음밥, 시래기 국밥, 라볶이 주세요."

(메뉴가 가물가물한데 4개의 음식을 시킨 것은 정확히 기억나요)

"@,@;;;;; 머야 다 먹을 수 있어요????"

"아라, 분식집에서는 4개는 거뜬하지~."


국물, 튀김류, 조림, 밥을 골고루 다 시킨 것이지요.

그걸 거뜬히 해치우는 진우도 그렇지만, 이상하게 그다음부터는 저도, 남겨서 싸오더라도 궁금한 것은 거의 모두 시켜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 물론 저는 먹는 음식에서 채소의 비율을 살짝 강박적으로 생각해 메뉴를 시키는 편입니다.

(샐러드든 머든 채식이 꼭 포함되게 시키고 먹으면서 이런저런 채식을 섭렵하고 고약한 맛과 멋진 맛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델리밀 식사에 있어서도 구성에 신경을 썼는데요. 델리밀 구성으로 페스토, 피클, 조림 같은 반찬류가 있고, 메인이 되는 주인공, 주먹밥, 국물이나 스튜, 샐러드가 등장합니다. 처음 테스트를 할 때는 좋은 반찬가게를 생각하며 델리숍의 메뉴를 구성해보았습니다. 당시 한식 재료에 이해가 깊은 호상 요리사 님과 서양 가정식을 잘 해온 혜미 요리사님의 특징이 가득 담겼고, 저는 이런 구성, 저런 구성, 이렇게 조합해보고 저렇게 상품화해보는 일을 담당했죠. 갖추고자 하는 델리의 가지 수가 많은데, 모두 손이 많이 가는, 정성이 필요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음식들을 얼마에 팔고, 유통시켜야 할지는 처음에는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델리숍을 열기 위한 목적이 아닌 코로나 상황 상 여는 팝업 반찬가게였기 때문이죠.  

파프리카 절임, 콩 절임, 연근 커리스파이스 피클, 볶음 고추장, 로메스코 소스, 우엉절임, 시금치 카레, 금귤 당 절임, 유부 주머니 등 정말 다양한 반찬들을 조금씩 준비했습니다
준비한 다양한 델리를 하나씩 다 맛보고 싶은 마음으로 만든 델리밀 정식의 초창기 형태와 마지막의 형태 입니다.

여기서 나온 델리밀 정식은 초기에는 반찬 샘플러의 형태였다가, 후에 정식을 만드는 방식으로 발전했어요.

계절 샐러드, 계절 페스토를 바른 빵, 주먹밥, 메인 반찬, 수프, 절임, 입가심 과일 정도로 구성했습니다. 하나하나 손이 많이 가지만, 만드는 과정은 보시다시피 아름답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담당 요리사가 바뀌어도 처음의 취지를 잘 살려 맛과 분위기도 유지할 수 있었지요. 뒤에서 지켜보는 입장에 있었지만, 지난한 준비 과정을 거쳐 마지막 플레이팅을 하는 단계는 예술입니다. 결과물을 보면 만드는 사람도 나름의 카타르시스가 있었음 했습니다. 제가 요리를 할 때 그랬거든요.

7, 8월 델리밀 플레이트 - 크로켓
7, 8월 델리밀 플레이트 - 크로켓


계절을 가득 담은 델리밀 플레이트는 그 구성과 형태가 일본의 오반자이나 인도의 탈리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인도의 탈리와 일본의 오반자이

플레이트 안의 반찬들은 아주 경미한 위계 관계를 가집니다. 이를테면 고기나 큰 덩어리의 채소, 가열 정도에 따라 반찬 중 주인공이 되는 것과 절임 무침과 같은 채소류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도화지 같은 음식인 곡물을 이용한 빵이나 밥, 면과 같은 음식이 놓이는데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볼륨감(접시 위로 올라오는 정도)을(를) 달리하지 차지하는 면적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지 않게 잡았습니다. 비교적 평등한 상태로 나열되어 여러 가지 조화를 이룹니다. 원형 플레이트는 마치 상하가 없는 원탁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정식의 아름다움과 맛보기의 즐거움, 균형 잡힌 영양과 먹고 났을 때의 편안함을 생각하면, 그 국경이 무엇이든 거의 모든 종류의 정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식은 순서를 두고 내는 코스와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모든 요소가 한 접시 위에 올라가기 위해서 반찬의 온도, 즉 조리 순서와 플레이팅 순서를 계산하고, '이것을 먹으면 이것이 필요하지!', '이 양념은 이 반찬에 조금 묻어도 맛을 헤치지 않아.'와 같이 여러 가지 당위성을 만들어 자리를 잡습니다. 괜찮은 "새로운" 정식을 만들려면 여러 가지를 궁리해야 해서 어렵지만, 대신 숙제를 풀 듯 구성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홈그라운드의 정식은 주연과 조연이 명확한 경양식의 정식들(돈가스 정식)보다는 백반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에게 딱 맞춰 차려진 정식은 작은 소반에 1인분의 상만 골고루 차려진 정성이 가득한 진짓상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출처: 문화유산 채널-문화유산 칼럼

델리밀은 홈그라운드가 코로나 이전에 대형 잔칫상(오프닝 케이터링)을 정성스레 차리던 마음을 작은 원형의 플레이트에 옮겨놓으려고 했던 저의 야심이기도, 욕심이기도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한 마음으로 일을 했던 때도 있었고, 지쳐서 그렇지 못했을 때도 있었는데, 매일 잔칫상 같은 소반상을 차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어서 지나온 사진들을 들여다볼 때, 여러 사람의 노고와 고마움을 비롯해 다양한 감정들이 입니다.

그래서 "정식"은 "사랑"이라는 단어와도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도 지지고 볶는 관계와 과정을 지나 만들어 낸 플레이트들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런 것이 고스란히 담겨 오시는 손님들을 감동시켰을지도요.


이제 저는 11월 셋 째 주에 어떤 정식을 만들지 계획하려고 합니다. 분명히 지금 나는 맛있는 산물을 지난 겨울 어떻게 먹었는지 사진을 보며 생각해내고 함께 만들 수 있는 사람의 성향 역시 고려할 것 같습니다. 여럿이서 함께 준비하는 과정이 주는 희로애락과 결과물과 단출히 둘이서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겠지만, 그래도 예약을 하고 기꺼이 방문하는 얼굴을 생각하며, 으슬 으슬 추운 날 무엇을 먹여 몸을 데워 배웅할지를 생각해야만 남을 위한 요리를 할 수 있습니다. 요리를 한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만 골몰해서는 제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인데, 다른 분들도 그런지 궁금해집니다.


(그래서 오래전에 '혼자 사는 사람들의 요리'라는 가제로 주위의 몇몇 친구들을 인터뷰하고 원고를 정리하다 멈추었습니다. 이 주제도 쓸 예정이라 다른 매거진으로 남겨두었습니다.)


11월은 19~21일(금토일 점심, 저녁) 식사 오픈을 할 예정이고, 운영 공지와 예약 접수는 15일부터 합니다. 인스타그램 공지 기다려주셔요.


<위드 코로나> 체제로 변화했지만, 전염과 격리는 여전하니, 모두 조심조심 건강히 지내다 만나요. 정말로 이러한 상황에 마무리가 온다면 그것도 참 기분이 이상할 것 같습니다. 이전보다 조금 더 앞으로를 모르겠을 시대에 온 것 같은데요. 그럴수록 다정한 마음과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 나누는 일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 고맙습니다.


곧 뵈어요.


홈그라운드에서

안아라 드림

  

    



  




매거진의 이전글 만두, 만두, 만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