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4. 지도
아른아른거리는 플랫 캡 모양의 간판에 ‘B612’라는 문구가 보였다.
끼이-익
난 한걸음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인과 눈인사를 하는 동안 얼른 주변을 스캔했다.
알파벳 ‘B’가 박힌 모자를 쓴 사람들이 보인다. 분명 지난번엔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그들은 분주하게 바느질하고 망치질을 한다. 느리게 정교한 붓칠을 하기도 한다.
몇 년 전 이사를 하다가, 소복하게 먼지가 쌓인 오래된 책을 발견했었다. 거기엔 내 이름과 숫자들이 쓰여 있었다.
엄마의 가계부.
그곳엔 철없던 내 어린 시절이 기록되어 있었다. 엄마의 손 글씨, 종이 냄새, 그 촉감을 잊을 수가 없다. 종이책에 대한 애착은 엄마를 향한 간절한 마음, 그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종이책을 만드는 모습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상했다. 내가 어렵게 구매한 책들과는 다르게 모양도 크기도 천차만별이었다.
글이 펜이나 키보드 없이 쭉쭉 쓰이고 새겨진다. 제작자로 보이는 이는 잠자코 지켜본다. 그는 다 쓰여질 때쯤 일어나더니 분주하게 물감을 바른다. 구멍을 뚫고 눈물을 떨어뜨린다. 눈물이 책에 스미자 세상 어디서도 보지 못한 색과 빛이 글에 입혀졌다.
쾅쾅! 탁! 탁!
글을 망치로 새기는 사람도 있다. 자세히 보니 그는 집을 짓고 있다. 창문 안에 모여 있던 글은 현관문을 내자 뜰을 메운다.
그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무를 만든다. 누워있는 나무 위에 글이 앉는다. 문장 하나, 어휘 한 개가 꿈틀거릴 때마다 나무는 간지러운 듯 붉어지고 놀란 듯 파래지기도 한다. 잠시 뒤 졸린 듯한 글이 집 안으로 들어간다. 그때서야 그는 어디론가 연락을 한다.
마켓 주인 ‘몰리’는 그들이 발행인이고, 각자의 방식으로 책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처음이지만 익숙한 듯, 어느새 곁에 붙어 서 있는 몰리와 눈이 마주쳤다.
"지도를 보고 왔나요? 아니면 사진?"
"아! 있어요. 그런데 안 보여서."
난 다급히 ‘홀로’를 꺼내 열리지 않는 이미지를 내밀었다.
몰리는 뿌듯한 표정으로 그것이 바로 지도라고 말해주었다.
놀랍게도 그건 정말 지도였다.
서비스센터에 리더기를 맡긴 일부터 이곳을 찾아다니던 내 여정까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암호가 든 지도를 만드는 발행인은 수준 높은 기술자였다. 그 기술이란 다름이 아닌 발행인의 유일한 마음이었다. 그의 마음이면 암호가 든 지도를 그려낼 수 있었다.
감정이란 그가 가진 유일한 세상이고 나는 그 세상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받은 것이다.
몰리는 곧 그 책을 제작한 발행인을 만나게 해 준다며 내 팔을 잡았다.
저녁 약속은 이미 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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