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의 종이책

Ep.05. 퍼시

by 그레용

마켓을 가로지르는 강이 보인다.

그리고 어디서 본 듯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프린티드 매터가 아닌가.

문을 연 지 20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모습은 거의 그대로였다.

종이책도 사라진 시대에 이 독립서점이 여기 있다니! 그것도 이곳 런던에, 뉴욕에 있는 서점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잠시 어리둥절했다.


몰리는 이 강이 감정이 지나는 길이고, 마음이 닿는 곳이면 실제로 가거나 볼 수도 있다고 했다. 또, 보고 듣는 것이 많아진 만큼 강이 늘 넘쳐난다고도 했다.


저 멀리 강가에서 강물을 고르고 뜨는 사람이 보였다. 마치 감정의 수위를 조절하는 듯 보였다. 내가 알고 있는 인공지능 e북 리더기의 핵심기술, 그것이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음을 순간 느낄 수 있었다.


푸르게 넘실대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 전 보았던 강은 분명 아니다. 거대한 바다와도 같다. 그것은 몇 년 전에 보았던 푸른 천정이었다.


철썩! 쌰아~


철썩대는 물결은 여러 갈래의 빛과 모양으로 부서진다.

진귀한 모습에 취해 바라보던 내 시선은 이윽고 한 곳에 닿았다. 부서지는 것들을 부지런히 몸에 담고 있는 사람. 몰리가 말한 발행인인 듯했다. 저만치에 몰리가 다른 발행인과 함께 있는 게 보였다.


"반가워요. 기다렸어요."


내 앞에 그가 방긋 웃으며 날 반겼다.


‘날 기다렸다고?’


"네, 맞아요."


흠칫 놀라 두발이 뒷걸음쳤다.


"하! 미안해요. 내 맘이 들려요?"


"네, 아라."


네모난 머리 위로 푸른빛의 캡슐 같은 것이 꽂혀 있다. 말을 할 때마다 눈은 쉴 새 없이 별자리를 그려낸다. 반투명의 작은 몸은 파도가 닿으면 영롱한 빛으로 물들었다.


"아무래도 좀 움직여야겠어요. 아! 나는 퍼시예요."


그는 로봇이다. 다른 발행인은 분명 사람이었다. 아니 그도 모습만 사람인 로봇이었나?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찌 됐든 상관없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푸른 물결에 몸을 맡기다 보니 어느새 나는 그의 작업실에 도착해 있었다.

인간에게 따스한 차를 대접하는 로봇, 퍼시는 마치 오랜 친구 같았다.


"공감 로봇이에요. 이곳에서 유일하죠. 그래서 아라를 만나고 싶었어요."


"내 이름은 어떻게.."


미소 짓는 네모난 얼굴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느껴지는 친근한 말투. 자신을 공감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며, 그게 바로 나였다는 말도 함께.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 내 손톱도, 이별의 이유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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