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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ㅈㅈ / 잠잠(潛潛)

by 그레용

와이키키~

당시에는 정말 유치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친구는 해외여행 가는 것 같고 좋다고도 했어요. 어린 시절 수련회로 전교생이 머물렀던 리조트 이름이었죠. 그곳엔 큰 실내 수영장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수영 못하는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낮은 깊이의 수영장도 있었어요.


친구들과 왁자지껄 물놀이를 했죠. 그런데 자연스럽게 양손을 이어 잡고 둥실둥실 떠 있던 어느 순간이었어요. 바닥에서 발이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걸 알아차렸을 땐, 이미 온몸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난 허우적대고 있었죠.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질 않네요. 하여튼 곁에는 다른 친구 한 명이 사정없이 두 팔과 다리를 내두르며 나를 어찌나 눌러대던지, 꼴깍꼴깍 수영장 물먹기를 반복했어요.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대로 수영장에서 죽을 순 없잖아. 다른 데도 아니고.’


그리고 그 순간.

‘미안하다. 잠깐이야.’


친구가 나를 눌렀을 때의 탄력으로 내 몸이 떠오를 때였어요.

나는 기회는 한 번뿐이라는 생각으로, 가차 없이 친구를 누르고 물 위로 떠올라 외쳤어요.

“살렷! 주세”


그리고 바로 물속으로 빠졌어요. 더 깊숙이.

그런데 이상했어요. 그 순간이 무척 고요했거든요. 귀가 먹먹하고, 세상의 소리가 사라진 그 몇 초.

물 위의 소란도, 친구의 발버둥도 멀어지고, 오직 물속에서 펄덕이는 내 심장 소리만 들렸어요.


그리고 다시 수면 위로 얼굴이 올라갔을 때 보았어요. 멀리서 수영장으로 뛰어드는 안전요원의 모습을 말이죠. 알고 보니, 수영장의 바닥은 낮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우린 노느라고 몰랐던 거였죠. 물 밖으로 나오자, 같이 물에 빠진 친구는 대성통곡을 하고는 숙소로 갔는데, 난 진정이 되자마자 다시 물에 들어가 놀았어요.


두려움을 몰랐을까요? 그냥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좋았던 거겠죠? 지금도 이해가 잘 안 되긴 해요.


정말 죽을 것만 같았던 그때, 그 순간은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고 오로지 그 순간에는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요.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고 나서야, 그날의 기억이 내게 주는 의미를 깨달았어요.


극한의 순간에 찾아온 침묵이 역설적으로 가장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는 걸요.

어떤 것들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 시나브로 찾아드는 것들이 있죠.

그 모습은 침묵이나 고요를 닮기도 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고, 세상이 고요해졌던 순간.

그런 순간을 기억하나요?


우린 침묵의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만들기도 하죠. 가수 크러쉬도 참가해서 화제가 되었던 ‘멍 때리기 대회’가 생각나요. 멍 때리기 대회의 규칙은 간단했어요. 90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기였죠. 잠들거나, 웃어도 탈락이었어요. 그냥 정말 고요하게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데, 이게 정말 어려운 일이었죠. ‘아무것도 안 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어요.


어쩌면 우리는 멈추는 법을 잊어버렸거나, 애초부터 멈출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마저 들었죠.

늘 우린 무언가를 해야 했고 배워왔어요. 행동하고, 말하고, 움직였어요. ‘오늘 뭐 했어?’,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라고, 요즘은 AI도 물어오죠. 심지어 쉴 때도 ‘의미 있는 휴식’을 무의식에 강요받는 기분이 들 때도 있어요. 요가를 하든, 뭘 보든, 뭔가는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되는 걸까요?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는 이런 장면이 나와요. 깨달음을 찾아 헤매던 싯다르타가 강가에서 수년을 보내요. 그는 강물을 바라보고 소리를 들으며 그저 머물러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강에게서 우주의 모든 소리를 배우고 있었죠.

“강은 동시에 모든 곳에 있었다.”

흐름 속에 잠잠히 머물며,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보게 돼요.


그리고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방 안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줄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라고 했어요. 우리가 끊임없이 자극을 찾고 소음을 만들고 움직이려는 건, 어쩌면 자기 자신과 마주하기 두려워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린 고요 속에서 비로소 내면의 소리를 들으니까 말이죠.


잠잠(潛潛)이라는 한자를 보면 재밌어요. ‘잠길 잠’이 두 번이에요. 물속에 깊이 잠긴 상태로 보이죠. 그런데 말이에요. 표면은 고요하지만, 그 아래에서는 생명이 꿈틀거리고,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물풀이 흔들리고, 물살이 흐른다고 생각해 봐요.

침묵도 그런 것은 아닐까요?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내면에서는 수많은 일이 벌어지는 거죠.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고 할 때, 난 무심코 나도 모르게 눈을 감게 되곤 하는데요. 그러면 조금 더 빠르게 생각해 내기도 하거든요.

침묵하거나 눈을 감거나 가만히 있는 건, 세상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더 깊이 받아들이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행동이라는 것이 밖을 향한 힘이라면, 고요는 안으로 들어오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숨을 들이쉬지 않고는 내쉴 수 없듯이, 고요 없이는 제대로 된 행동을 할 수 없을지도요.

내면에 집중하는 이유는 세상을 외면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싶어요. 마음이 소란스러우면 제대로 들을 수가 없죠. 누군가 말을 할 때 내 머릿속이 시끄러우면, 그 사람의 진짜 목소리는 들리지 않잖아요. 쉼이나 침묵이 주는 고요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요즘 나의 내면은 얼마나 고요한지 두들겨 보게 돼요.


그런데 이런 침묵에도 여러 얼굴이 있는 것 같아요. 멍 때리기 대회처럼 꼭 조용히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이 침묵은 아니란 생각을 했어요. 백색소음을 들으며 잠을 자거나 책을 보는 것, 시끄러운 마음 때문에 걸음을 걷는 것, 파도소리를 들으며 앉아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결국 침묵은 단지 말하지 않거나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바깥의 소란을 차단하고 내면에 집중하는 모든 행위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은 조용히 앉아서, 어떤 사람은 백색소음 속에서, 또 어떤 사람은 걸으면서 자기만의 고요를 찾아요. 더 잘 듣기 위해서,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요.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이 한 말이 떠올라요. 하루도 온전히 좋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구씨에게, 자신이 죽지 않고 사는 방법을 알려줘요. “하루 5분만 채우라”고요. 편의점에 갔을 때 문을 열어주면 고맙다고 말하는 학생 때문에 7초 설레고, 아침에 눈 떴을 때 ‘아, 오늘 토요일이지.’ 10초 설레면서 그렇게 하루 5분만 채우라고 말이죠.


편의점 문 앞에서의 7초, 침대에서의 10초. 그 짧은 순간에 우리는 세상의 작은 선의에, 하루의 작은 기쁨에 온전히 집중하게 돼요. 그 순간만큼은 다른 잡념이 사라지고, 그저 그 감정에만 머물러요. 작은 침묵들이 모여 하루를 채우고,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요.

이런 순간들이 우리를 온전히 살아가게 하는 거겠지요?


이따금은 쉼표를 찍어야 함을 느껴요. 문장 중간에 쉼을 내쉬듯 인생의 숨을 쉬어야 함을요. 자기만의 방식으로 잠잠해지는 거죠. 어떤 사람은 조용히 앉아서, 어떤 사람은 걸으면서, 또 어떤 사람은 단순한 일을 반복하면서요. 하루에 5분씩, 7초씩, 10초씩 작은 순간들을 모으면서요.


방법은 중요하지 않아요. 내면의 소음이 가라앉고, 세상의 진짜 소리가 들린다면요.

어떤 순간에 멈춰있는 그 하나의 행동이, 어쩌면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침묵은 비어 있는 게 아니라, 가득 차 있는 것일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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