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ㅅㄹㅇ ㅁㅂ / 사랑의 문법
말수도 많지 않으신 할머니께서 어느 날 순대 국밥집을 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직접 순대를 만드셨죠. 그 과정이 어린 내가 보기에는 좀 그렇다고 보지 못하게 하셨는데, 그래서인지 더 궁금해지기도 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실 설거지가 다였지만, 학교를 다녀오거나 방학이 되면 나는 자주 식당에서 지냈어요.
어떤 날엔 바쁜 주방을 돕겠다고 가스레인지 위에서 토치를 눌러서, 순식간에 눈썹을 그을리기도 했어요. 어디선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난 엄마는 내 얼굴을 꼼꼼히 살피다가, 침을 묻힌 손가락으로 다급하게 보슬보슬 그을린 눈썹과 속눈썹을 매만지시며 말씀하셨어요.
“괜찮아, 이뻐, 눈썹은 금방 자라.”
그리고는 옅은 미소를 지어주셨죠. 난 금세 진정되어 아무렇지 않게 다시 식당 일을 도와드렸어요. 엄마는 혼을 내시기보다는 그것을 재미난 해프닝으로 만들어주셨죠.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의 그 행동과 말에는 어떤 마법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빠는 ‘뚝딱뚝딱’ 집에서 필요한 것들을 잘 만드셨어요. 난 종종 나서서 거들었어요. 한참 생각이 많던 사춘기의 나는 생각했어요. ‘마음은 쓰면 쓸수록 깊어지고, 몸은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고 말이죠. 그래서인지 아빠와 함께 하는 그 과정이 즐거웠어요. 실제로 얼마나 힘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우리 딸 든든하네.” 부모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뿌듯했어요. 든든하다는 건 힘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어린 제게 힘은 단순했어요. 뭔가를 들어 올리고, 무언가를 해내고,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는 것이었죠.
그런데 그때 내가 진짜로 쓴 건, 단순한 힘은 아니었어요. 든든한 자식이 되고 싶은 마음,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 사랑받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이 몸을 움직이게 했고, 시간을 쏟게 했고, 계속 그 자리에 있게 했어요.
그러면서 느꼈어요. 힘을 쓴다는 것은 마음과 시간을 쓰는 일이라는 것을요. 마음의 힘은 다른 모든 힘의 뿌리라서, 마음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몸도, 돈도, 말도, 시간도 따라가게 했어요. 내가 쓰인다는 건, 든든함이고 뿌듯함이었어요.
어렴풋이 기억나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자주 들었던 부모님의 말씀.
“난 우리 딸 믿어.”
그런데 믿음이란 것도 ‘쓰는’ 것이었어요. 부모님은 내게 믿음으로 마음을 쓰고, 기다려주는 시간을 쓰셨던 거예요. 내가 식당 일을 서툴게 도울 때도, 눈썹을 그을리며 실수할 때도, 그분들은 나를 믿는 데 자신의 마음과 시간을 썼어요.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 믿음은 ‘든든함과 뿌듯함’에서 ‘책임’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못하면 어쩌지? 실망시키면 어쩌지? 믿음은 짐으로 느껴지며 더 잘하려는 마음을 부추겼고, 그것은 점점 ‘부담’이 되었어요. 어느 날엔 벗어나고픈 마음으로 번져가기도 했어요.
그때의 나는 자신감만 쌓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할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믿음이요. 믿어주시니까,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 내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들을 무심코 하게 되었어요.
그러니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었어요. 잘하면 올라가고, 못하면 떨어지는 롤러코스터 같은 마음이었죠.
익숙한 세계를 깨뜨리고 나와야 비로소 태어날 수 있다는 말처럼, 기대와 믿음이 때로는 깨고 나와야 할 알처럼 느껴졌어요. 하지만 그분들의 믿음은 나를 가두려는 것이 아니었죠. 내가 성장하며 겪어야 하는 과정이었던 거죠. 그렇게 삶을 책임지는 어른의 모습이 되어가면서 깨달았어요. 믿음의 진정한 모습을요.
믿음은 자신감과 자존감의 마중물과도 같았어요. 그런데 자신감과 자존감은 다른 거였어요.
자신감은 ‘나는 이걸 할 수 있어’이고, 자존감은 ‘나는 이걸 못 해도 괜찮은 사람이야’인 거였죠. 자신감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자존감은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날 힘을 주었어요.
부모님이 내게 준 건 단순한 자신감이 아니라 자존감이었죠. “괜찮아, 이뻐. 눈썹은 금방 자라”라는 말속에는 ‘너는 실수해도, 서툴러도, 그을려도 여전히 소중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었어요.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것도 못 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
나를 믿어주는 그 마음은 내가 내 스스로를 믿게 만들었어요. 나를 기르시던 내 부모의 ‘믿음’은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더 깊이 느끼게 되었죠.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박해영 작가가 작품집에 쓴 “잘 쓰려고 하면 영점 조준이 잘못된 것, 인물을 아끼고 사랑하자. 사랑이 다 한다”는 그 말을 발견했을 때에도, 문득 같은 생각을 했어요. 이 말은 캐릭터를 향해 마음을 쓰고, 시간을 쓰고, 애정을 쓰면 작품이 살아 움직인다는 의미였겠지만, ‘사람을 향한 믿음도 마찬가지겠구나’ 하고 말이죠.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그 사람을 향해 내 마음과 시간을 쓰는 일이고, 그렇게 쓰인 믿음이 결국 그 사람이 스스로 살아갈 힘이 되는 거라고요.
최근에 본 광고에서 ‘나를 믿다’라는 카피를 봤어요. 그 순간 이상했어요. 미래에서 온 듯한 캐릭터가 던지는 질문에, 내가 답을 찾으려 하고 있다는 게요. AI 모델 에이첼이 하는 말, “믿음은 뭘까?”라는 물음이 무엇보다 나 자신을 향하고 있었죠.
어쩌면 믿음이라는 것이 답을 구하는 게 아니라, 계속 질문을 던지는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되었어요. 믿음의 힘이란 마음을 움직이고 몸을 움직이고 결국 걸음을 내딛으며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요.
믿음은 단순히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쓰면 쓸수록 자라고 살아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어요.
“우리 딸 든든하네”라고 하실 때, 내가 실제로 힘이 센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함께하려는 마음, 돕고 싶은 마음을 알아봐 주는 그 말이 나를 정말로 든든한 사람으로 느끼며 자라게 했어요.
믿는 시간과 마음의 크기, 그 정도에 따라 나는 달라질 수 있는 거였어요.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천사는 깨달아요. 결국 사람은 서로를 향한 마음으로 산다는 걸요. 부유하거나 가난한 사람, 강하거나 약한 사람도, 그들이 살아가게 하는 건 서로를 향해 쓰는 마음이라는 것을요.
할머니가 순대를 만들며 들인 시간, 엄마가 식당에서 쓰셨던 마음, 아빠가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며 쓰셨던 정성, 그 모든 쓰임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어요.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요?
마음과 시간을 쓰고 쓰이며 사는 게 삶이라면, 쓰임(用)이 있는 삶이란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 싶어요.
누군가를 위해 내 마음과 시간을 기꺼이 쓰는 것. 그 과정에서 나 역시 채워지는 것.
어떻게 쓰느냐는 곧 어떻게 사느냐의 해답인 것만 같아요.
그래서 쓰는 일은 더욱 어렵게 느껴져요.
쓰임이란, 쓰여지는 ‘기록’일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지금 무엇을 새기고 있는 걸까요?
그것은 어디서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