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ㅁㅇ ㄱㅇㅎㄴ ㅁ / 물이 기억하는 말
어린 시절, 친구 집에 자주 놀러 갔어요. 그런데 어느 날 침대에 누웠을 때였어요. 침대 옆, 벽 속에서 아주 미미하게 물소리가 들려왔어요. 아마도 수도관이 지나가는 벽이었을 거예요. 친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는 일부러 귀를 벽에 대고 그 소리를 들으며 잠들곤 했어요. 잔잔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거든요.
당신에게도 그런 소리가 있나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계속 듣고 싶은 소리 말이에요.
엄마가 들려주신 나의 태몽도 물과 관련이 있었어요. 맑은 냇물에서 놀다가 물속에 있는 예쁜 돌멩이들을 발견하고, 두 손으로 물을 퍼올리듯 조심스럽게 그 돌멩이를 들어 올리는 꿈이었대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미 나는 돌멩이와 물을 좋아하고 있었어요. 태몽을 알기 전이었는지 후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요.
그래서였는지, 에모토 마사루의 ‘물은 답을 알고 있다’를 읽었을 때, 그 내용은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물에게 ‘사랑’, ‘감사’와 같은 고운 말을 들려주면 아름다운 결정이 만들어지고, 거친 말을 들려주면 일그러진 형태가 된다는 거였죠. 우리 몸의 70%가 물이라면, 우리가 듣는 말과 하는 말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나는 더욱 말의 힘을 믿게 되었죠. 아니, 믿는다는 표현보다는 두려워했다고 하는 게 맞을 거예요. 말은 한번 내뱉으면 되돌릴 수 없잖아요. 물에 파문이 일면 계속 퍼져나가듯이요. 그렇게 무심코 말의 힘을 느끼게 되었어요.
나는 개인적인 얘기를 쉽게 하지 않았어요. 말하기 싫은 상황이 오면, 나도 모르게 엄지손가락을 검지손가락과 약지손가락 사이로 꾹 넣고 움켜쥐곤 했어요. 주먹을 쥐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손 모양이었죠. 언제부터 시작된 습관인지도 몰랐어요. 그저 그렇게 손을 움켜쥐고 있으면 그 순간이 지나갈 때까지 버틸 수 있었어요.
그런데 글은 달랐어요. 글은 퇴고할 수 있었어요. 한 번 쓴 문장을 지우고, 다시 쓰고, 또 고칠 수 있었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듬을 수 있었어요. 말처럼 공중에 흩어져버리지 않고, 돌멩이처럼 손에 쥘 수 있었죠. 그래서 글쓰기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몰라요. 퇴고의 시간은 내게 주어진 작은 특권 같았어요. 말을 신중하게 골라 담을 수 있는 여유 말이에요. 물론 공개가 되면 어려운 일이지만요.
나는 어려서부터 특히 ‘욕’을 싫어했어요. 남자들끼리 친하다는 표시로 던지는 ‘새끼’라는 말, 여자친구들끼리 장난스럽게 부르는 ‘이년’이라는 표현까지도 욕처럼 들렸어요. 지금도 여전히 쉽게 나오지 않는 말들이긴 해요.
그런데 이제 나도 욕을 하곤 해요. 물론 상대방을 앞에 두고 하지는 않지만요. 어느 날, 화가 치밀어 속이 상할 대로 상한 순간이었어요. 그때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는 ‘똥’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었어요. 순간 멈칫했죠.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젊은 시절의 아빠가 화나셨을 때 쓰시던 욕에 들어있던 단어였어요. 이상하게 통쾌했어요. 억눌렀던 뭔가가 확 풀리는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불쾌한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았어요. 욕을 했는데도 여전히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어요. 역시나 욕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죠. 말은 퇴고할 수 없으니까요. 이미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다 친구와 욕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되었어요. 친구가 흥미로운 말을 해주더라고요. 조상들도 욕을 했고, 그 욕에는 다 뜻이 있었다고요. 무심코 내뱉는 말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표현이었다는 거죠.
그 말을 듣고 궁금해졌어요. 조상들은 어떤 욕을 했을까? 어떤 의미를 담았을까?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먼저 ‘욕’이라는 한자를 알게 되었어요. 욕(辱)은 별 진(辰)과 마디 촌(寸)이 결합된 글자더라고요. 그 어원을 찾아보니 별 진(辰)은 농지를 만들려고 돌을 옮기는 행위를 의미하고, 마디 촌(寸)은 손을 의미했어요. 그러니까 욕(辱)이라는 글자 자체가 본래 노동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던 거죠. 간혹 ‘욕봤네’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수고’를 속되게 부르는 말로, 점점 부정적인 단어로 인식되었더라고요.
그리고 조상들이 실제로 했던 욕을 보면서 더 놀랐어요. ‘육시(戮屍)’라는 말은 죽은 사람의 시신을 토막 내는 무서운 형벌을 뜻했고, ‘경(黥)’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끔찍한 형벌의 이름이었어요. ‘염병(染病)’은 본래 전염병이라는 무서운 질병의 이름이었고요. 그 시대 사람들은 가장 두렵고 무서운 것들을 욕으로 사용했던 거예요.
이것이 다는 아니었겠지만, 아마도 그 시대에는 욕조차 가볍지 않았을 것 같아요. 어쩌면 그들에게는 일상의 대화 자체가 퇴고의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상들은 말할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한 번 내뱉은 말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알고 있었을까요?
주변 사람들은 말했어요. 감정을 누르고 참는 것보다는 욕을 해서라도 표현해야 건강에 좋다고요.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 몸에 더 나쁘다고요.
그 말을 듣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조상의 지혜를 빌려봐야겠다고요. 무작정 욕을 하는 게 아니라, 지혜롭게 욕을 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요. 말에는 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때로는 그 힘을 빌려 쌓인 감정을 풀어낼 필요가 있다면 말이에요.
글을 퇴고하듯, 나는 말하기 전에 마음속에서 한 번 더 말을 골랐어요. 그러고보니 생각나네요. 어렸을 적 집에는 三思一言(삼사일언)이라는 한자를 서예 글씨로 써 놓은 액자가 있었어요. 어쩐지 나도 모르게, 말에 대한 의미를 느끼며 자랐던 것 같기도 해요.
누군가는 나와 대화하는 것이 답답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욕설까지도, 할 말을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사람들과는 달라 보일 테니까요. 하지만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닐 수 있잖아요.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을 했다고 해요. 언어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세계와 만난다는 의미였다죠. 또 어디선가 ‘말은 세상을 짓는 도구다’라는 문장을 인상 깊게 본 적이 있어요. 이처럼 언어는 세상과 나 자신을 규정하는 것만 같아요. 말은 자유롭지만, 동시에 무거워요. 어떤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 누군가 또는 나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죠. 언어가 현실을 만들고, 현실이 언어를 통해 변형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전히 나는 물소리를 듣던 그 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물이 말을 기억하듯, 나도 말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그때와 다르다면, 말의 힘을 믿는다는 건, 말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현명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걸 안다는 거죠. 언어를 어떻게 쓰느냐가 곧 내가 어떤 세상을 짓느냐를 결정하니까요.
지금 내가 내뱉는 말들은, 내 몸속의 물이 기억할 만한 말들이었을까요? 누군가의 세상을 허물지 않고 세워줄 말들이었을까요? 퇴고할 수 없는 말이기에, 한 번 더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